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48. 철부지 황자, 바보 기사(3)
자신의 거처로 들어온 유트리안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방 안을 서성거렸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호위병에게 신경 끄라고 큰소리치며 들어왔지만 가슴 한 켠이 계속 찜찜했다. 미소짓고는 있었지만 매몰차게 돌아섰던 그의 작은 등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젠장!"
그는 거칠게 욕설을 내뱉았다. 뭐가 이렇게 신경쓰이는지. 내 잘못이 아냐, 말도 안 하고 간 그놈 탓이라고- 그렇게 계속 되뇌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잘못인가."
순간 신경질이 치밀어 올랐다. 먼저 기어오른 쪽은 그 꼬마였으니 황자로서 못할 짓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세튼 제국의 제 1황자로 태어나서 19년동안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에 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까, 말 한마디 했다고 이렇게 신경을 쏟아부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먼저 말을 안 들은 건 저쪽이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만 유트리안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목이 타는 느낌에 그는 방 한켠에 달린 호출용 줄을 당기고 호화롭게 꾸며진 자신의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5분.
"....왜 안와?"
분명 시종들의 방과 주방에 연결된 벨이 울렸을 텐데 감감 무소식이었다. 원래라면 줄을 당기면 1분 안에 시종들 중 한 명이 달려오곤 했다. 하다하다 하인들까지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는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이 자식들, 뭐 하는 거.... 아!"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상기한 유트리안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까 아시엘이 황자궁에 머무는 시종들을 5명만 남겨두고 돌려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악-! 이 썩을 꼬맹이! 아주 실시간으로 열받게 하네, 진짜!"
한참동안 씩씩거리던 그는 결국 힘이 빠져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원래 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면 하인 한 둘쯤 뛰어들어오고도 남았을 텐데 바깥은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
조용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복도는 바삐 오가는 시종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방문의 바깥에는 바로바로 시중을 들기 위한 시녀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언제나 넓은 궁을 하루종일 청소하는 나이 많은 하녀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곤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린 오늘은 그저 차가운 고요만이 감돌았다.
"......."
천장에 달린 휘양찬란한 샹들리에를 멍청하게 응시하던 유트리안은 어쩔수 없이 몸을 일으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 그는 벌컥! 조금 거칠게 문을 젖혔다.
역시나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바닥에 곱게 깔린 카펫과 줄지어 서있는 여러 장식품들, 조각상들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지만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어? 이리 좀 와봐!"
그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빈 복도에 메아리가 되어 웅웅 울려퍼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제야 유트리안은 혼자 지내기에는 이 궁이 지나치게 넓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칫, 그는 혀를 차고 방을 나서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하게 혼자가 되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때까지 혼자가 되기를 갈망했다. 툭하면 따라붙는 시종들과 호위병을 따돌리고 숨어버리기도 했고-물론 금방 들켰지만- 시중을 들기 위해 곁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낸 적도 많았다.
"야! 누구 없어?"
유트리안은 한번 더 크게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 뿐.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물을 마시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그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그 꼬마 녀석, 쓸데없는 짓거리 하고 있어."
괜히 소리내어 툴툴거린 그는 잡념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세게 털었다. 그리고는 더욱 보폭을 크게 했다.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없는 건가, 진짜? 자유를 원했지만 이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진짜였지만 그에 뒤따르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였다. 유트리안은 아시엘을 두 번째로 만났던 그날 그가 왜 자신을 철부지라고 불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것같은 기분이었다.
'바보같아.'
하지만 그는 한번 더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절대로 내 잘못이 아냐,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말로?
"저, 전하! 어찌 여기까지 나와 계십니까?"
"아."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유트리안은 걸음을 멈췄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접객용 홀까지 와 있었다. 그를 부른 사람은 다름아닌 몇 남지 않은 시종 중 한 사람이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
유트리안은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의아해진 시종이 까닭을 묻기 위해 막 입을 열려고 했을때 그는 시선을 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별로."
"아.. 그.. 러십니까. 곧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 드릴 테니 시장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순간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곧 그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아니, 물러가려 했다. 다급하게 붙잡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야, 자, 잠깐만!"
"예?"
저도 모르게 불러 놓고서야 실수를 깨달은 유트리안은 할 말을 찾기 위해 아- 하고 눈을 데구룩 굴렸다. 분명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목끝까지 치솟았지만 언제나와 같이 먼저 고개를 내민 것은 자존심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 용건 끝났으면 얼른 꺼져."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릴듯 했다. 그는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채 그대로 돌아서 방으로 직행했고 결국 그날 밤은 심란한 마음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지새야 했다. 내일 아침에도 그 꼬맹이 녀석이 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그 전에 하인들을 돌려보내서 일을 이따위로 만들었으니 죽여버리겠어- 등등을 중얼거리며.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어떻게 그의 얼굴을 마주할지였다. 그가 원망스럽게 쳐다보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좋을까, 유트리안은 착잡해졌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안녕히 주무셨어요?"
"......"
유트리안은 쾡안 눈으로, 생글생글 해맑게 미소지으며 아침 햇살과 함께 찾아온 아시엘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야, 너."
"왜요? 뭐 문제라도 있어요?"
아시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늦은 아침의 볕이 그의 금발을 반짝였다. 큰 적안은 여전히 천진한듯 아닌듯 알쏭달쏭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너무 허탈해진 그는 자존심도 잊어버리고 빽 소리를 질렀다.
"화 난거 아니었어? 왜 멀쩡하게 기어 오는데! 네놈은 속도 없어? 신경질도 안 나냐고!"
"아.. 그 얘기였어요?"
아시엘은 잠깐 생각하는듯 음- 소리를 내며 턱을 톡톡 두드리다 오래지 않아 싱긋 웃었다.
"물론 처음에는 좀 화나서 어떻게 해버릴까 생각했는데요, 그러기도 귀찮아서요. 이제 괜찮아지기도 했고."
"뭐야..?"
어떻게 해버린다, 라니 어떻게? 하고 따지고 싶은 것을 유트리안은 꾸욱 참았다. 더 이상 들었다가는 후회할것 같았다. 아시엘은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듯 바라보았다.
"좋은 친구도 있고, 좋은 선배들도 있고, 좋은 아버지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이긴 거잖아요? 황자님한테 친구 같은게 있을 리 없으니까."
놀리려는 의도가 명백히 보이는 말이었다. 그의 눈에는 다른 종류의 기쁨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것을 유트리안이 알아볼리 없었다. 결국 아침부터 노성이 터졌다.
"이.. 짜증나는 꼬맹이! 책임 져, 어젯밤에 잠 한숨도 못잔거 책임 지라고!"
"어라, 못 주무셨어요? 왜요?"
"너 때문이잖아, 너! 네가 하인들도 보내버리는 바람에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키도 작은게 하나하나 마음에 안들어, 진짜!"
"여기에서 키가 왜 나와요?"
결국 황자궁 앞마당에서 어제부터 계속 반복되는 말싸움이 벌어졌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왁왁 큰 소리를 내는 두 사람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청명한 하늘, 두 소년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구름까지 닿을것 같이 맑은 날이었다. 그리고 아시엘의 얄미운 한마디 한 마디를 받아치는 와중에도 유트리안은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라고. 더 이상의 초조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까닭 모를 안도감이 그 자리를 천천히 스멀스멀 차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