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0. 변화의 조짐(2)
"..야, 너 지금 뭐하냐?"
유트리안은 멀지 않은 곳의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아시엘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언제나 유트리안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아시엘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그는 나무 둥차에 기대 멍청하게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그 상태더니 아까 도서관에서 황자궁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돌부리에 걸려 우당탕 엎어지기도 했다.
유트리안은 그런 그를 보고 황당해졌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고 핀잔도 줬지만 소용 없었다.그래도 나름 걱정되는 마음에 황자궁의 뒤뜰로 데리고 나왔건만 아시엘은 좋아하는 과자도 마다하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야."
"......."
"...야."
"......."
"..이... 야! 아시엘 아르셰인!"
"에, 네. 네?"
결국 유트리안이 우당탕 티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빽 지르자 아시엘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야! 넌 하루종일 왜 그렇게 얼이 빠져 있냐? 내 말은 들리지도 않지?"
"아.. 죄송해요. 생각할게 좀 있어서."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미소도 평소와는 다르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라 유트리안은 더욱 언짢아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까지 축축 처지잖아! 날씨도 좋은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물며 황자랑 같이 있는 자리에서!"
"죄송해요."
아시엘은 다시 한번 사과하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솔직히 너무 심란해서 유트리안의 호통 소리는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
첫날 발견했던 낡은 종이. 그게 문제였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펼쳐본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오래된 곰팡내가 풍기는 양피지에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마치 어느 왕국 병사들의 명단처럼 이름과 특징이 줄줄 서술되어 있었다. 아시엘은 오래지 않아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릴수 있었다.
'의외의 수확이라고 해야겠지.'
바로, 흑마법사들이 소환했던 마족들의 명단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계약했던 마족들의 이름과 특징-그 고유 능력을 대략적으로 기술해 놓은 물건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글이 어색한 부분에서 잘려 있었으니 분명 이어지는 뒷장이 도서관 어딘가에 더 있을 터였다.
일단 그것을 찾아야 했다. 오늘 오전 유트리안의 수업 시간 동안 아시엘은 도서관 서고를 이 잡듯이 뒤져 두 장을 더 찾아냈고, 그것들은 지금 그의 주머니 안에 고이 접혀 자리잡고 있었다.
분명 이건 이득이었다. 적은 알면 알수록 유리한 법이니까. 하지만 아시엘은 불안해졌다. 마치 오래 전 살해당해 봉인된 시체를 억지로 끌어내는 듯한 기분. 옛날에 죽어 묻혔어야할 망령이 저주스러운 손을 뻗쳐 오는것 같았다.
"..야, 괜찮은 거냐?"
그가 오랫동안 말이 없자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는지 유트리안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묻자 아시엘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유트리안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그에게 고마움을 담아 살짝 미소지은 아시엘은 한숨을 내쉬며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지, 새파란 하늘은 언제나처럼 침묵을 지켰다. 천국에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지는 그분은 앞선 세월동안 그랬던 것처럼 방관자로만 남아 있었다. 아아, 누가 보고 있다면 좀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시엘은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속으로 삼켰다.
"어라, 새네."
".....?"
유트리안의 다소 뜬금없는 한 마디에 그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바닥에 놓인 아시엘의 손 바로 옆에, 작고 예쁜 새 한마리가 앉아 있었다.
아시엘은 생각하던 것을 잊어버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대다 곧 총총 뛰어서 그의 손가락 위에 사뿐 올라탔다.
"착하네. 사람도 잘 따르고."
삐익, 삑, 하는 소리를 내는 새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아시엘은 히히 웃었다. 유트리안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넌 황자보다 새가 더 중요하지?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에이, 설마요."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다정하게 손가락에 부리를 부벼오는 새를 내려다보았다. 유트리안이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하든 현실세계는 평화롭기만 했다. 딱 좋은 계절에, 딱 좋은 바람. 시끄러운 황자님과 지금 손등에 앉아서 애교를 부리는 새까지.
"..아."
아시엘은 흠칫 몸을 떨었다. 동시에 총총거리며 까불던 참새가 포르르 날개를 펴고 도망치듯 날아가버렸다.
"별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
"뭐?"
뜬금없이 아시엘이 중얼거리는 말에 유트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시엘은 답을 주는 대신에 씨익 입가에 비대칭의 미소를 띄웠다.
정확히 유트리안 쪽으로, 담장으로부터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가르고 쇄도해 온 것은 그때였다.
"....앗!"
유트리안은 몸을 경직시켰다. 굉장히 익숙한- 목숨을 위협받는 이 상황. 위험하다, 겨우 거기까지 사고를 진행한 그가 피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 황금색의 돌풍이 몰아치더니 까앙, 깡! 하는 쇳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
유트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아시엘이 금빛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그의 앞을 막듯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방금 쳐낸 검은색 단도가 뒹굴고 있었다.
"불청객이네요."
".....!"
방금 전까지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앉아있던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시엘의 음성은 침착하고 깨끗했다. 흐리멍텅하던 그의 눈동자에는 빛이 돌아와 있었다.
"거기 있는거 아니까 슬슬 나오시죠?"
유트리안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아시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스락, 하는 인기척이 나더니 뒷뜰과 외부를 차단하는 낮은 담장을 넘어서 수상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 소속 병사의 옷차림을 한 다섯 명의 남자였다.
".. 대낮부터 습격이라니."
유트리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곳은 황자의 정원. 호위병들은 아예 궁 바깥에 대기시켜놔 두 소년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아시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들은 배신한 거에요? 아니면 임무 때문에 잠입합 거에요?"
여유 있지만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이 대답하지 않고 두 소년을 포위하듯 움직이자 아시엘은 검 끝을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역시 대답 안 해 줄거죠? 그럼 나중에 알아내는 수 밖에 없겠네요."
"......"
스릉! 암살자들이 저마다 검을 뽑아들고 검기를 일으켰다. 그들에게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살기를 느낀 아시엘 역시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전하, 여기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야! 너 혼자 뭘 어쩌려고?"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유트리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작은 등은 누군가를 지킨다기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보호받아야 마땅할것 같았다. 하지만 아시엘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 못 믿겠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그 생각을 바꿔 드리죠."
"뭐?"
유트리안이 황당하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다섯 암살자가 일제히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아시엘은 지체 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실드!"
카아앙! 곧바로 날아든 검이 두 소년 앞의 방어막에 막혀 튕겨났다. 암살자들은 당황한듯 재빨리 시선을 교환하고 뒤로 물러나, 곧장 아시엘에게 단도를 날렸다.
챙, 챙그랑! 실드 마법 안쪽에 유트리안을 남겨두고 튀어나온 아시엘은 지체 없이 검으로 그것들을 쳐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를 노리고 파고드는 다른 암살자에게 손을 뻗어 마법을 시전했다.
"라이트닝 에로우!"
그의 손 위에 새하얀 마법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전기 속성의 화살 여덟 개가 생성되어 빠르게 암살자에게 쏟아졌다.
".....!"
그는 멈칫하더니 검을 뽑아들고 그것들을 쳐냈다. 채재쟁, 전기와 검기가 충돌하며 소음이 일었다. 하지만 그 중 마지막 하나를 놓쳐버려 그의 뺨에 한줄기 상처가 그였다.
"큭!"
살짝 닿였을 뿐인데도 전기 때문에 짜릿한 충격이 가해졌는지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트리안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뭐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목도한 마법에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유트리안은 아시엘의 옆구리를 노리는 한 남자의 검을 포착하고 외쳤다.
"....! 조심해!"
"네? 우왓!"
아시엘은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공격을 막았다. 카아앙! 기습공격이 차단되자, 공격을 가한 남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손을 이용해 단도를 찔러넣었다.
"....!"
아시엘은 급히 몸을 숙여 공격을 피했지만 뜨끔하는 느낌과 함께 이마가 찢어졌다. 하지만 아파할 틈도 없이 뒤쪽에서 다른 이의 검이 날아들었다.
"칫!"
아시엘은 혀를 차고 몸을 굴렸다. 콱! 그가 서있던 자리에 장검 하나가 깊숙히 박혔다.
"이런 쥐새끼같은 놈!"
암살자는 이를 부득 갈고 그가 쓰러진 자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시엘은 상체만 일으키고 그를 조준해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스톤 스피어!"
".....!"
남자가 밟은 땅에 마법진 하나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고,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날카로운 창으로 변해 순식간에 치솟았다. 당연하게도 그는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꿰뚫렸다.
"크악!"
붉은 선혈이 튀고 남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시엘은 곧바로 다른 시동어를 외쳤다.
"아직이에요. 아이스 스피어!"
그의 주변에 푸른색의 마법진이 떠오르고 네 개의 얼음창이 나타났다. 그는 그것들을 나머지 네 사람 쪽을 겨누고 날렸다.
푸욱, 푹! 그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거리를 벌이자마자 방금전까지 암살자들이 서 있던 땅에 인정사정없이 얼음창이 박혔다. 그 사이, 아시엘은 흙의 이빨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에게 다가섰다.
"홀드!"
"이...!"
암살자는 자신을 옭아매는 마력을 느끼고 몸을 뒤틀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딱딱하게 얼어붙은듯 꼼짝도 할 수 없게되었다. 그때, 물러섰던 이들 중 하나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아시엘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앗!"
".....!"
카아앙! 아시엘은 반사적으로 레이피어를 들어 간신히 그를 막아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남자는 소년을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윽..!"
손목이 시큰거려와 아시엘은 작게 신음을 흘리고 대치중인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머금어저 있었다. 하지만-
"헤이스트!"
아시엘은 가속 마법을 시전해 몸을 빼냈다. 갑자기 마주오던 힘이 빠져버리자 남자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는 순간, 그는 등에서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허억! 큭!"
남자는 한쪽 발을 콱 내딛어 중심을 잡고 그것을 회전축으로 몸을 억지로 확 돌리며 검을 내질렀다.앗, 짧게 비명을 지른 아시엘은 몸을 확 숙였다.
부웅! 한끗차이로 칼날이 그의 머리 위로 스치며 반짝이는 금발 몇 가닥이 잘려나갔다. 칫, 혀를 찬 아시엘은 연속적으로 날아드는 검을 피해 뒤쪽으로 도약해 거리를 벌렸다가, 그대로 파박 땅을 박차고 다시 돌진했다.
유트리안은 완전히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화려하다, 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아시엘의 상징과도 같은 레이피어는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번뜩였고 하안 제복은 마치 날개처럼, 종횡무진 움직이는 소년의 유연하면서도 빠르고 격한 몸짓을 따라 펄럭였다.
'저게....'
마검사, 아시엘 아르셰인. 다섯 명의 암살자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인데다 자신이라는 혹을 달고도 한없이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때까지 꼬맹이라고 놀려댄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때 터져나온 비명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일깨웠다.
"크아아아악!"
"....!"
유트리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금 아시엘이 공격을 감행한 남자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팔뚝을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잘려나간 그의 손은 주인 잃은 검과 함께 잔디 위에 고인 피웅덩이에 잠겨있었다.
"끄아아아아! 썩을! 아악!"
"잠깐 주무세요."
빠악! 강한 타격음이 울리고 뒷목을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기절했다. 아시엘은 그 앞에 서서 힘겹게 숨을 골랐다. 그의 하얀 턱선을 타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함께 방금 튄 적의 혈액이 함께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바닥에 작은 원을 그렸다.
"자, 두 사람 끝."
아시엘은 고개를 들고 남은 적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라, 유트리안은 멍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저녀석 눈, 원래 저랬던가?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시엘이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를 그리고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암살자들에게 검을 똑바로 겨눈 것이다.
"자, 다음은 누구죠?"
금색이어야할 레이피어의 도신은 선명한 붉은색에 감싸여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암살자들은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놀라움에 가득 찬 그들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유트리안 역시 다른 것은 잊어버리고 아시엘에게 망연한 시선을 고정시켰다.
검기. 뜨겁지만 차갑게, 농밀하지만 순수하게 빛나는 화려한 적색의 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