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1. 변화의 조짐(3)
'하지만-'
아시엘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려 애쓰며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대강 훔쳤다. 더이상 끌면 불리한 것은 이쪽. 암살자들 개개인은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지만 역시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었다.
".. 어째서 죽이지 않는 건가."
암살자들중 한 명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한층 짙어진 살의와 노기가 서린 눈으로 아시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비를 두는 건가. 네 목숨을 노리는 우리에게?"
"무슨 헛소리인지. 댁들한테 자비를 베풀 바에야 지나가는 개한테 밥을 퍼주는게 낫죠."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러자 입을 열었던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군. 하긴 사냥감에게 말을 붙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두 남자가 단도를 날렸다. 아시엘 쪽이 아닌- 무방비 상태의 유트리안 쪽으로.
"어어?!"
"젠장, 실드!"
당황하는 유트리안의 앞에 재차 투명한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까앙, 깡! 쇳소리를 내며 단도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아시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유트리안의 다급한 외침이 날아들었다.
"아시엘, 옆! 옆에!"
".......!"
아시엘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레이피어를 들자마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카아앙!
"크윽!"
끼기기긱- 듣기 싫은 마찰음이 아시엘의 예민한 귀를 때렸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앞의 적을 쏘아보았다. 힘으로 아시엘을 밀어붙이는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키긱, 끼기긱. 레이피어가 가늘게 떨렸다.
유트리안은 자신을 감싼 공기가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아시엘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마법이 불안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드는 와해되지 않고 있었다.
"칫!"
아시엘은 거칠게 혀를 차고,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뿌리치고 재빨리 땅을 박차 유트리안 쪽으로 물러섰다. 검에 살짝 베인 팔 부분의 제복에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괜찮냐?"
"안 괜찮아요."
아시엘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남은 적은 셋- 한 곳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그는 힐끗 곁눈질로 이미 제압한 두 사람을 확인했다. 한 명은 홀드 마법으로 눈 하나도 깜빡거리지 못한채 땅의 창에 꿰어 있었고 하나는 절단된 자신의 손 앞에 코를 박고 쓰러져 있었다.
"나중에 폐하한테 특별 수당 받아내야지."
"뭐?"
그가 작게 중얼거리자 유트리안은 황당해졌다. 이런 상황에 그런 소리가 나오냐,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아시엘의 얼굴은 방금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뜻을 가득 담고 있었다.
"죽어라!"
".....!"
다시금 쇄도해오는 칼날에 아시엘은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나무를 짚고 몸을 일으키며 뭐라 중얼거리더니(분명 욕일 거라고, 유트리안은 짐작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아퀴나 레아 루 스페라."
그의 손이 희미하게 빛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타다닷, 암살자들은 더욱 더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하지만 아시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스테아 레베란 뤼 셰프라 아세."
빛이 점점 더 밝아져 하나의 구처럼 뭉쳐졌다. 그것을 중심으로 미풍이 불어 아시엘의 머리칼을 가볍게 흔들었다. 암살자들은 검기가 서린 검을 치켜들고, 망설임 없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칼끝이 그의 목을 가르기 직전, 아시엘의 입에서 시동어가 터져나왔다.
"아쿠아 스플래쉬!"
찰나의 순간, 유트리안은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고 생각했 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영원과도 같은 1초가 지나고 아시엘의 몸에 암살자들의 칼끝이 닿았을때, 그의 손에 자리잡은 푸른 빛의 구가 폭발했다.
콰아아앙! 마치 화약이 터진 것처럼 엄청난 폭음이 황자궁을 뒤흔드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물줄기가 암살자들을 덮쳤다.
"크아아악!"
"쿨럭, 컥! 커헉!"
콰과과과과, 시원하면서도 살벌한 급류에 세 남자는 종잇장처럼 순식간에 떠밀려가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담벼락에 박았다.
아시엘은 마법을 해제했다. 물줄기가 사라지자 물이 흥건하게 고인 바닥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채 금이 쩍 쩍 간 벽에 처박힌 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젠장..!"
생각보다 타격이 크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몸뚱이가 튼튼했던 건지 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몸을 추스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유트리안은 기겁헸다.
"썩을 꼬맹이.. 우웩, 쿨럭! 죽인다!"
"안됐지만, 아직 안 끝났어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남자에게 간단히 대꾸한 아시엘은 다시 마력을 운용해, 2서클의 기초 마법을 시전했다.
"일렉트릭 쇼크."
시동어를 듣는 순간, 암살자들의 얼굴이 헤쓱해졌다.
아시엘은 싱긋 웃고는 하얀 마법진이 떠올랐다 사라진 후 전기 스파크가 파직파직 일어나는 손을 축축한 잔디에 갔다댔다. 그리고- 지지지지직! 지지직!
"끄아아아아아아아-!"
물을 타고 흘러간 전기가 번쩍번쩍대며 침입자들을 바삭바삭하게 튀기기 시작했고, 애처로울 정도로 비명을 뽑아내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서 검은 연기를 피우며 기절해버렸다.
"......."
이번에야말로 정원은 잠잠한 고요에 가라앉았다. 유트리안은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채 잔디밭 위에 뻗은 세 사람, 손목이 잘린채 기절한 한 사람, 땅에 꿰인채 굳어버린 한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듯 둘러보았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정원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시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바보같긴. 고작 다섯을 상대한다고 이 모양이 됐다고?"
"검기 사용자였어요. 그리고 평범한 사람인 저랑 괴물급인 케빈 선배를 비교하면 안 돼죠."
아시엘은 타박을 놓는 케빈에게 불만스럽게 대꾸하다 앗 따가, 하며 몸을 움찔했다. 그의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 주던 아델레트는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잘했어. 누가 보낸 건지는 알아?"
"으... 아뇨.. 근데 죄다 생포했으니 황실 경비대에서 알아내겠죠."
찢어진 어깨로부터 타고 올라오는 쓰라림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쓴웃음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보던 루이카엔이 입을 열었다.
"뭐 누가 사주했는지는 대충 알겠지만 그래도 조사해보는게 낫겠지. 그런데.. 전하는 왜 여기에 계시죠?"
".....!"
아시엘의 옆에 붙어 앉아있던 유트리안은 뜨끔한 얼굴이 되어 모른척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정도로 떨어질 루이카엔이 아니었다.
"일전에 분명히 기사들이 제일 싫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연하지! 착각하지마, 당신들이 좋아서 여기에 있는건 아니니까."
유트리안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아시엘의 옆-유트리안의 반대쪽- 에 앉아있던 카이스가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러면 왜 오신 겁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 녀석이 픽하고 쓰러진걸. 걷지도 못하겠다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데려다 놨으면 이미 용무도 끝나셨네요. 굳이 여기 계실 이유는 없을 텐데요."
"네가 참견할 이유도 없잖아. 일개 기사 주제에 건방지다고."
무뚝뚝하던 카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유트리안 역시 사납게 그를 쏘아보았다.
"방금, 그 일개 기사에게 목숨이 건져진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넌 그럼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라도 된 마냥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다시 카이스가 뭐라 입을 열려는데 아시엘의 지극히 피곤한 목소리가 그것을 막았다.
"둘다 닥쳐줄래요? 골아파 미치겠거든요."
".... 쳇."
유트리안은 혀를 차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팩 돌려버렸다. 카이스 역시 심기가 불편한 것을 숨기지 않고 끙, 하는 소리를 흘렸다. 아시엘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인상을 썼다. 마법을 너무 남발한 상태에서 익숙하지도 못한 검기를 쓰고 마지막에 4서클의 마법 중에도 특히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물 계열 마법까지 사용한 바람에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두 소년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얌전히 입을 닫았다.
마치 주인 말을 잘 듣는 강아지같은 꼴에 루이카엔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평소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다가 아시엘이 관련됐다 하면 쉽게 흥분하는 카이스도 웃기지만 단 몇주만에 저렇게나 달라진 유트리안의 모습은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틱틱대는건 똑같지만 자신을 위한 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던 그가 아시엘을 손수 부축해 생활관까지 왔다는 것은 보통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카이스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라이펜의 아시엘 처방이 잘 맞아 떨어졌다는게 증명된 셈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뭐- 그것보다 아시엘, 뭐 하나 물어도 될까?"
"네?"
아시엘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루이카엔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댔다.
"정보를 캐고 싶었다면 한 명만 생포해도 됐을 텐데, 왜 다 살려둔 거야?"
"-아."
잠시 눈을 데구룩 굴리던 아시엘은 곧 히, 하고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임을 깨달은 루이카엔은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다소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뭐, 푹 쉬어. 그리고 전하, 이 녀석 다음주에는 저희가 좀 쓰겠습니다. 파견 보내야 할것 같으니까요."
"뭐?"
유트리안의 눈썹이 휘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장을 올려다보았다.
"파견요? 꼭 제가 가야 해요?"
"어.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겼거든.. 네가 적임인거 같아서."
루이카엔은 손을 들어 장난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를 좀 써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