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66화 (16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3. 일상 속의 비일상(1)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는 아침 시간. 햇볕이 창문으로 스며들어와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반짝였다. 기상 시간을 조금 넘겨서야 가까스로 일어난 루이카엔은 대충 옷을 챙겨입고 휘적휘적 로비로 나갔다. 어디선가 날아와 꾸룩, 하고 짧게 울음소리를 낸 에니르가 그의 어깨에 툭 앉았다.

"으억, 무거워. 좋은 아침, 에니르."

"꾸륵."

나날이 훌륭하게 살이 쪄가는 에니르의 부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준 그는 휘적휘적 로비로 나갔다.

"좋은 아침... 어라, 슌이네."

아시엘이 아니라. 루이카엔은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슌을 보며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슌은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손을 슥 들어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단장."

"매일 늦잠인 네가 왠일이야? 나보다 쪼금 더 오래 자는 녀석이 벌써 나와 있다니."

루이카엔은 농담조로 말하며 그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나라고 매일 늦게 일어나는건 아니거든요."

슌은 픽 힘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루이카엔은 그제야 그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뭐야, 어디 아파?"

"아뇨. 어제 커피를 많이 마셨더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요."

"음.. 그래? 몸 관리 잘해. 이래저래 부려먹히니까 말이야."

루이카엔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소파에 몸을 파묻어 크게 하품을 쩌억 했다. 에니르는 자지 말라는듯  그의 귀를 밉살맞게 콕콕 쪼았다. 슌은 그를 오묘한 눈으로 응시하다 문득 입을 열었다.

"참 사람 좋다니까, 당신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미안한데 월급은 못 올려줘. 돈 받고 싶으면 폐하께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보던가."

루이카엔이 클클 웃으며 대꾸하자 슌 역시 그만 웃어버렸다. 이 막나가는 기사단을 통솔하는 막나가는 단장은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기사라고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자주 떠오르는 미소는 누구에게서라도 호의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슌은 농담조로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한때 세달에 한 번씩 여자친구가 바뀌던 비결이 그건가요? 얼빵한 매력."

"야, 야. 얼빵한건 또 뭐냐? 그냥 매력이 넘치는- 커헉!"

루이카엔의 말이 끝나기도 전, 뻐억! 누군가의 손이 그의 머리를 호되게 후려쳤다. 놀란 에니르가 푸드덕 날아올랐고 그는 얻어맞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몸을 홱 돌렸다.

"야, 이 자식아! 아침부터 무슨 짓이야!"

"넌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약이라도 먹었냐?"

아니나다를까, 목에 앤을 둘둘 휘감은 케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도 이딴 자식 헛소리에 어울려 주는거 아냐. 얼빵한건 사실이지만."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슌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루이카엔이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넌 얼빵한게 뭔지도 모르냐! 사전 찾아보고 와, 멍청아!"

"사전에 그딴 거 없어, 얼간아. 단장이란게 그것도 모르냐! 그러니까 얼빵하다는 소리를 듣지."

"그러는 네놈은 힘만 더럽게 세서는, 이때까지 여자친구도 없었지? 하! 불쌍한 놈."

"툭하면 여자나 후리는 네놈보다야 훨씬 낫지, 이 난봉꾼 자식아."

다시금 말싸움이 시작되었지만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 저 지랄이야, 쯤 되는 시선으로 힐끔힐끔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몇 년째 보는 광경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정말로 보기 드문 모습은 따로 있었다.

우당탕탕! 갑자기 이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케빈과 루이카엔은 드잡이를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

우당탕, 쿵! 쿵쾅! 끝에는 으아아아아! 하는 익숙한 사람의 비명이 터져나오더니 곧 누군가가 우다다다 전속력으로 달려 계단을 내려와- 순식간에 생활관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헐."

로비에 있던 일동은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작은 뒷모습이 쌩하니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루이카엔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방, 방금 뭐가 지나갔지?"

"아시엘이었을걸. 코트도 제대로 안 입고 들고 나가는것 같던데."

뒤이어 케빈이 멍하니 말했다. 그들은 일제히 한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기상 시간으로부터 대략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누군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모두가 떠올리던 한 마디를 던졌다.

"..설마. 천하의 아시엘이 늦잠 잔 거야?"

"세계 종말의 징조인가. 내일 신의 심판이 떨어지는거 아냐?"

또 다른 이가 중얼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문이 콰앙! 열리는 소리에 그들은 흠칫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시엘이 뛰쳐나갔던 그 기세 그대로 후다다닥 돌아와 세 사람- 슌, 케빈, 루이카엔 앞에 우뚝 멈춰섰다.

"헉.. 헉, 헉. 죄송해요, 늦잠, 자버려서. 헉.."

"아...어어."

그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나 단정하던 금발은 잔뜩 흐트러져있고 어깨가 가쁘게 오르락 내리락 했다. 제대로 입지도 못한 코트는 한쪽 팔에 끼운 채였고 하얀 셔츠는 맨 위의 단추 두어 개가 풀려 목이 훤히 드러났다.

세상에나-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그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고개를 팩 돌려 앉아있는 슌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쩐지 다급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선, 선배. 혹시 어젯밤에.. 헉, 제 책상 치우셨.. 정리하셨어요?"

"응? 아, 아아.. 어. 그렇게 피곤했어? 책상에서 바로 자 버리기나 하고."

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때문에 저렇게나 당황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아시엘은 땀이 살짝 배여난 이마를 닦지도 않고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는 답이 뭔지 대충 짐작한 슌은 짐짓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뭐 없어지기라도 했어?"

"아니에요. 그냥, 깨끗해져 있길래."

아시엘이 헤실 입꼬리를 올리고 볼을 긁적였다. 케빈은 어이가 없어져 그에게 시계를 가리켜 보였다.

"다 좋은데, 안 나가도 돼? 황자님 기다리시겠다."

"아...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팩 몸을 돌려 후다닥 뛰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침부터 난리법썩이로군."

루이카엔은 웃음을 터뜨리다 문득 가벼워진 어깨를 알아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케빈 역시 자신의 목을 가볍게 감고 있던 시원한 비늘의 감촉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두 사람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듯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동시에 기겁하고 무시무시한 비명을 터뜨렸다.

"우아아아아악!"

얼마 떨어지 않은 곳에서 독수리 에니르와 뱀 앤의 격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앤은 긴 몸통으로 에니르의 다리를 휘감고 목을 세워 위협적으로 쉭쉭 소리를 냈다. 에니르 역시 지지 않고 푸닥푸닥 날갯짓을 하며 끼에엑,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앤! 저 썩을 비둘기가!"

"망할 지렁이가 우리 에니르한테 무슨 짓이야아아악!"

두 사람은 당장에 그 둘을 떼어놓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인들의 싸움으로 번져 티격태격에서 투닥투닥(평범한 사람들이 본다면 매우 위협적인) 이 되버리고 말았다. 슌은 이마를 턱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못 말려."

"포기해요. 그것보다 거기 있다가 말려들지 말고 이리 와는게 어때요? 좋은거 있어요."

멀찍이 책꽂이 쪽에 앉아있던 베르칸이 수상한 표지의 책 한권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을 한 벨킨이 마법서 한 권을 펴 놓고 관심 없는 척 하며 베르칸의 손에 들린 책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전에 그렇게 당했는데도 남은 게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늑대의 감각을 무시하지 말아요."

슌이 황당하게 묻자 베르칸은 자랑스럽게 씨익 미소지었다. 아침부터 그런 게 보고 싶나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슌은 참았다. 물으나 마나 돌아올 답은 "당연하죠!" 란 밝디 밝은 한 마디일 테니까. 그

그때 화형당한 책들 중엔 베르칸의 것이 압도적인 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으니(루이카엔이 그 뒤를 따랐다). 여러모로 늑대의 본성을 따르고 있는 그였다.

"고맙지만 사양하렵니다. 제건 그때 모조리 다 타버렸거든요. 이 기회에 수도승 흉내라도 내 봐야죠."

"에에? 슌 씨, 본성에 솔직해지라구요!"

베르칸은 동그란 얼굴로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슌은 하하 웃을 뿐이었다.

이런  언제나와 같은 일상일 뿐이니. 언제부터 이게 일상이 되었더라- 그는 생각했다.

그때, 마침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카엔은 케빈을 어떻게든 떼어내고 답했다.

"들어와."

"예."

곧장 문이 열리고 한 경비대원이 급하게 들어왔다.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붙인 그는 땀이 뒤범벅된 얼굴로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루이카엔 경. 송구하지만 지금 지하 감옥으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감옥에? 왜?"

루이카엔은 살짝 인상을 썼다. 지금 감옥으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전에 붙잡아 처넣은 범죄자들과 마약상인, 그리고 어제 아시엘이 때려잡은 암살자들.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문제가 조금 생긴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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