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67화 (16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4. 일상 속의 비일상(2)

헐레벌떡 멀찍이서 달려와 헥헥대는 아시엘을 보며, 유트리안은 별꼴을 다 본다는듯 눈살을 찌푸렸다.

"왠일이야? 네가 지각을 다 하고."

"늦잠을, 헉, 자버려서요."

아시엘은 턱에 한 방울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며 멋쩍게 웃었다. 한참동안 숨을 고르던 그는 그제야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알아차리고는 죄송, 하고 짧게 툭 내뱉고 꼼지락 꼼지락 옷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유트리안은 언짢은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곤하면 그냥 쉬지 그래? 괜히 걸리적대지 말고."

"안 걸리적거릴 테니 걱정 마세요. 아니면-"

아시엘은 고개를 들고 씨익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설마 저 걱정하시는 거에요?"

"그럴 리가 있냐!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네 걱정을 해? 난 그냥-"

"네네. 그럴 리가 없죠. 알고 있으니까 방방 뛰지 마세요."

그가 그렇게 덧붙이자, 유트리안은 벌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그는 뾰루퉁해져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겉옷까지 제대로 걸친 아시엘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이래서 네놈이 싫어, 이 둔탱아."

따악, 유트리안은 그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아시엘이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지만 그는 모르는척 빙글 몸을 돌려 황자궁 안으로 척척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늘 수업 없어. 그냥 궁에 처박혀 있을 거야."

"아, 정말요? 그럼 뭐 하실 건데요?"

아시엘은 소매끝을 정리하며 쪼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유트리안은 그런 그가 귀찮다는듯 인상을 구겼지만 착실하게 대꾸했다.

"내가 아냐. 그냥 책이나 읽던지. 체스나 두던지. 할 줄은 알지?"

"네, 네."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히죽 웃었다. 또 이렇게 익숙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거.. 참."

지하 감옥 입구에 선 루이카엔은 곤란하다는듯 턱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래로 연결된 어두운 계단에서부터 익숙하지만 절대 좋아할수 없는 비릿한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경비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수고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루이카엔 경. 그게.. 침입자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침입자?"

그는 병사의 뒷말을 따라했다. 냄새 때문인지, 불길한 예감 때문인지 루이카엔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침입자 정도로 이렇게나 심한 피비린내가 날 수 있는 건가."

"그, 그건.."

병사들은 더더욱 창백해졌다. 이래서야 제대로 듣지도 못하겠군, 속으로 투덜거린 루이카엔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병사에게 명령했다.

"생활관으로 가서 벨킨이나 베르칸을 불러와. 둘 중 아무나 상관 없어. 폐하께 보고는 했나?"

"아니요. 아직입니다."

"그럼 내가 직접 하지. 그리고, 넌 나랑 같이 내려가서 상황 설명 좀 해줘."

그 말을 들은, 처음에 루이카엔을 부르러 갔던 병사는, 얼굴이 순식간에 헤쓱해졌지만 순순히 경례를 했다. 다른 한 병사 역시 그의 명대로 두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 생활관 쪽으로 달려갔다.

"아, 그렇지. 에피로스 경에게도 보고가 들어갔나?"

"아니요. 이 곳의 담당은 셀레니스 기사단이고.. 그래서  경께 먼저 보고드렸습니다."

"좋아."

루이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램프를 건네받아 지체 없이 지하로 내려가늡 어두운 계단을 밟았다. 명령을 받은 병사 역시 꺼림직하게 그 뒤를 따랐다.

끼이익- 끽. 낡은 나무 계단이 무거운 그의 무게에 오래된 비명을 질러댔다. 삐걱. 삐걱. 희미한 빛에 의존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비릿한 혈향이 점점 더 진해져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도사리고 있는 어둠 속에 파고드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루이카엔은 곁의 병사에게 말을 건넸다.

"살인 사건이라도 있었어?"

"예... 그런데. 아니, 자세한 것은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병사는 앞서 계단을 내려가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나무문을 열었다. 끽, 하는 음침한 소리가 한번 더 짧게 울리고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짙은 냄새가 기분 나쁜 습기와 함께 훅 끼쳐왔다. 그리고 다음에 터져나온 것은, 죄수들의 비명소리였다.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살려줘! 아니, 죽여도 좋아! 나가게만 해 줘!"

"제발! 다 불테니까! 여기 있기는 싫어, 아니 싫습니다! 제발요!"

루이카엔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혈향은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병사는 그를 따라잡으려 애쓰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죄인들도 다 저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

루이카엔은 걷는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철창에 갇힌 범죄자들의 아우성, 진한 피 냄새. 깊은 지하 특유의 축축함. 지옥의 일부분을 옮겨놓은 듯한 곳의 가장 깊숙히 위치한 철창 앞에서-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주변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끼낀 회색의 벽돌과 차가운 바닥, 쇠로 된 철창과 회칠이 된 벽면까지. 감방 안에는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붉은색. 그는 왜 병사들이 그렇게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이게.."

"욱.. 보,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어제 황자님을 습격한 자객들을 결박해서 이 곳에 가두어 놓았는데.."

병사는 구역질이 치솟아 결국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루이카엔은 싸늘하게 식은 회색 눈동자로 안을 찬찬히 살폈다.

다섯 암살자는 말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피로 물든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누군가의 오른손 뿐.

"어제 누군가 들어온 자도 없었어?"

"네.. 앞에서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끅,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겨우겨우 병사가 답하는 것을 들으며, 루이카엔은 무릎을 꿇고 철창 밖의 바닥까지 튄 혈흔에 손을 대고 쓸었다.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소리는?"

"그게.. 이상한 것이, 어제 밤에 보초를 서던 녀석들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발견한 것도 조식을 넣어 주기 위해 들어왔을 때였고.. 다른 죄수들은 패닉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의 비명은 좁은 감옥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몸을 일으키고 붉은 감방을 노려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좋지 않아, 이건.

".. 굉장하군."

".....! 벨킨."

갑작스레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체구의 한 남자-벨킨이 인상을 쓰고 서 팔짱을 낀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 피들은 다 뭐야?"

"어제 아시엘이 생포한 암살자들."

벨킨은 킁킁 주변의 냄새를 맡으며 눈으로는 끔찍한 현장을 살폈다. 루이카엔 역시 날카롭게 감옥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보지도 못했다, 비명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고 한 병사들의 말이 맞다고 치면 남은 증인은 옆의 감방에 수감된 죄수들밖에 없었다. 루이카엔은 걸음을 옮겨 다른 쇠창살 앞에 섰다.

"어이. 고개 들어봐."

"......!"

벌벌 떨던 죄수들 중 한명이 시체처럼 푸르딩딩해진 얼굴을 들었다. 수도의 뒷골목에서 마약을 판매하고 약을 이용해 어린 소녀를 강간하다 제르닌에게 잡혀온 남자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그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지만 루이카엔은 하나도 알아들을수 없었다. 결국 답답해진 그는 검으로 쇠창살을 카앙! 하고 세게 때렸다.

"히이익!"

"똑바로 말해.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어."

얼음보다 싸늘하고 칼날보다 예리한 루이카엔의 회색 눈동자가 번뜩이자 그는 단박에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렸다.

"저, 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 못했습니다! 그냥.. 밤중에 자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연기가 피어나서.."

"연기?"

"예, 예! 밤인데도 그것만은 잘 보였습니다요. 그 뒤로 갑자기 옆 감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우욱!"

죄인은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에 질세라 그 옆의 감방에 있던 한 남자가 창살에 매달려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악마! 악마라고! 우리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지만! 그 엄청난 비명소리, 살이 산 채로 뜯기고, 뼈가 갈리는 소리! 악마가 나타난 거라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아무도 나가지도 않았어! 인간이 한 짓일 수가 없잖아!"

"......."

루이카엔은 그를 힐끗 곁눈질하고 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서늘한 눈빛에 그가 흠칫 뒤로 물러서자, 루이카엔은 외려 한 발짝 다갔다. 그의 입에서 지독하게 차가운, 그래서 아까 케빈과 싸워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한 말. 사실이겠지?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았고 심지어 소리조차 못 들었다는거."

"예, 예예! 물론이지요! 아침에 오니까 이 꼴이 되어 있었습니다!"

"네 목숨을 걸고 보장할수 있어?"

"네, 네?"

무시무시한 압박감과 살기에 그는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울상을 지었다. 결국 보다못한 벨킨이 끼어들었다.

"그만해, 단장.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는 않으니까."

"뭐?"

루이카엔은 곧바로 반응해 몸을 빙글 돌렸다. 간신히 그의 시선에서 벗어난 병사가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만 벨킨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피 냄새에 가려서 못 알아차렸는데, 이 감옥에서만 이방인의 냄새가 난다. 아까 입구랑 이 통로에서는 맡지 못했어."

"뭐? 그 말은-"

"웨어울프의 후각을 무시하지마. 베르칸 형도 보통 인간에 비해서는 예민하지만 내 감각은 울프 쪽에 가까우니까. 확실해."

그가 단정적으로 말하자 루이카엔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널 의심하는게 아냐.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아니지- 일어났으니 가능하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우리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그런게 존재했다면 너나 내가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어. 그리고 이건 5서클의 마법사로서 하는 이야기인데."

벨킨은 표정을 굳히고 천천히 덧붙였다.

"미미하게나마 마력의 흔적이 느껴져. 아주 기분 나쁜 마력이."

"마력.. 이라고?"

"어. 미량이지만. 아마 시간이 흘러서 흩어진 거겠지.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해두자면, 이건 그리 낯설지 않아."

루이카엔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다시금 심장이 빨리 뛰려는 것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는 차분하게 물었다.

"어디서 접해봤다는 거야?"

"단장, 당신도 알 거야.. 그때, 제 5경비대에 파견 갔던 녀석들이 가지고 돌아온 수상쩍은 그 구슬 말이야. 그 뒤에 파티장에서 아시엘이 게르만이라고 하는 상인한테서 또 하나 빼돌려 왔고."

"......."

"그 뒤에 갑자기 나타난 변종 괴물에게서 또 몇 개가 나왔지. 그리고 게르만이라는 작자는 거대 변종 몬스터가 나타난 메르티스 백작령에서 시커먼 시체로 찾아냈다면서. 그것도 아시엘이었지."

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루이카엔의 얼굴이 차차 얼어붙어갔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구슬. 몇 개는 네가 가지고 있지?"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몇 주 전에 도로 가져갔어."

"누가?"

"아시엘이."

루이카엔은 이마를 턱 짚었다. 벨킨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주변을 한번더 탐색하듯 킁킁, 살폈다. 함께 온 병사는 영문을 몰라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눈 앞에는 인간의 피, 붉은색으로 물든 처참한 감방이 있었다.

하지만 루이카엔의 의식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식은 머리속을 헤집었다. 구슬의 존재를 처음 알아차린 사람이 아시엘이라고, 그때 함께 갔던 제르닌이 말해 주었다.

분명 파티장에서 두 번째 것을 발견했을 때도, 몬스터들에게서 몇 개를 한꺼번에 얻었을 때도 아시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벨킨이 몇 개를 가져간다고 했을 때 역시 반대하지 않았다.

"아시엘이 뭐라고 하면서 받아갔는데?"

"몰라- 연구할 게 있대나. 솔직히 난 처박아놓고 잊어버리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냥 내줬지."

루이카엔은 그제야 메르티스 백작령의 죽어버린 숲을 생각해 냈다. 이상한 마력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진해진다는 아시엘의 말 역시. 그리고- 가운데쯤이라고 추정되는 지점에서 길이 막혀 나무 위에 올라갔던 그가 아무것도 없다며 그냥 내려왔던 것도.

"어쩔거야? 단장."

"...... 글쎄."

루이카엔은 픽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벨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주먹을 살짝 말아쥐었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아시엘은, 그 속을 제대로 내보이지 않는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 일에 얽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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