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69화 (16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58. 일상 속의 비일상(4)

"에스테반 녀석, 너무 화끈하게 저질러 줬어."

대공전, 제 2궁의 어느 호사스러운 방. 아울은 나른한 검은 고양이처럼 소파에 들어져 손 위에 다소곳이 앉은 까마귀를 쓰다듬었다.

"하여간 적당히를 몰라, 그 녀석은. 그냥 곱게 죽여도 됐을 텐데 말이야."

"꽤 오랫동안 얌전하게 지냈잖아. 심심했나 보지."

녹스는 여유롭게 책을 한 페이지 넘기며 대꾸했다. 그 말에 대충 수긍한건지 아울은 흥-하는 소리를 내고 몸을 일으켰다. 검고 긴 그의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건 그렇고.. 그 금발 꼬맹이, 생각보다 꽤 하는 모양인데? 보냈던 놈들이 허섭스레기였긴 했지만."

"...... 에스테반이 산 채로 끌고 온 한 놈. 그 놈의 기억을 읽어 봤다. 동료들이 산 채로 찢기는걸 눈 앞에서 본 데다 본인도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다소 뜬금없었지만, 아울은 녹스의 말에 흥미를 보이고 상체를 일으켰다.

"호?"

아울이 검은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표하자 그는 외알안경을 살짝 치켜올렸다.

"네 짐작이 맞았던것 같군."

"내 짐작? .. 아아."

아울의 얼굴에 아찔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만족스럽게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까마귀의 부리를 간지럽혔다.

"실패는 아니었나 보네. 엉뚱하게 확인하게 됐지만."

"하지만 속단은 이르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

녹스는 무심하게 대꾸하면서 또 책 한 장을 팔락, 넘겼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가 꼬불꼬불한 글씨들을 대충 훑고 지나갔다.

"나중에 에스테반에게 말이나 해둬. 과한 장난은 삼가하라고."

"말 한다고 들을 녀석이냐?"

아울은 큭큭 소리를 냈다. 까마귀 역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새빨간 눈을 빛내며 그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뭐.. 일단 전해두긴 할게. 슈베이만은 이 건에 대해서 무슨말 없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더군. 에스테반이 마무리를 했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다. 그 마무리가 다른 사고 수준이 되 버렸지만."

녹스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넘기자 그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손 끝의 까마귀가 고개를 두어번 내젓더니 스륵, 하고 검은 연기로 화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슌에게서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냄새만 맡은것 같아. 어쨌든 재미있게 됐어.."

"재미?"

"이쪽이나 저쪽이나 말이야."

아울은 키득키득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그런 그가 눈에 거슬리는지 녹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책에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인간이란건 우리 상상보다 훨씬 멍청하고, 아둔하지만 끈질기니까."

터덜터덜 생활관으로 돌아온 루이카엔의 귀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평소보다 한층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였다.

".....?"

의아해진 그는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동료들을 발견한 루이카엔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아, 단장! 저기, 저기좀 봐."

그가 호들갑 떨며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루이카엔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만들어진 원 안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목도를 한 손으로 든 카이스와 한 눈에 보기에도 잔뜩 지친 채 어설프게 가검을 쥐고 있는 유트리안 황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뭐가 그렇개 재밌는지 아시엘이 깔깔거리며 배까지 움켜잡고 웃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아까 황자궁에서 내기를 걸고 한 체스 게임에서 아시엘이 이겼대. 그래서 이 모양이지."

언제 다가왔는지, 케빈이 팔짱을 끼고 후배들을 바라보며 루이카엔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뒤이어진 그의 말은 이랬다. 유트리안과 아시엘은 '소원 들어주기' 로 피 튀기는 체스판을 벌였고, 결과는 아시엘의 승리. 그리고 아시엘이 말한 소원이 바로 이것이었다. 셀레니스 기사단에서 검술 수련하기.

"그래놓고 정작 본인이 하기는 귀찮았는지 상처 쑤신다고 카이스한테 떠넘겨버리고 저 모양이 된 거지."

"...참 답다고 해야 하나."

루이카엔은 아연하게 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때, 참다못한 유트리안이 목검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에이씨, 안해! 안 한다고! 넌 좀 그만 웃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냐?"

"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아니, 폼이 너무, 어정쩡한데, 하하하하!"

아시엘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바닥을 굴러대자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 야, 넌 처음부터 잘 했어? 잘 했냐고!"

"잘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카이스가 검을 갈무리하며 한심하다는듯 말했다. 직접 몸으로 겪어보며 함께 자란 그의 증언에 순식간에 할 말을 잃어버린 황자는 이이익, 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바닥에 뒹구는 검을 냅다 걷어차버렸다.

"빌어먹을! 몰라, 못 해먹겠네, 정말!"

"아이, 안돼요. 약속은 지켜 주셔야죠. 그리고 저도 제 몸 축내기 싫거든요? 어제처럼 습격이라도 받으면 황자님 몸 정도는 스스로 챙기셔야죠."

아시엘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었다. 반박할 말을 찾아내지 못한 유트리안은 욕 비슷한 것을 살벌하게 중얼중얼대다가 결국 불만 가득한 얼굴로 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번엔 제대로 할 거라고."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만. 역시 그냥 기초부터 연습하시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카이스 역시 거뒀던 검을 다시 잡아빼며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유트리안이 고집스럽게 눈을 부라리자 곧 포기하고 대강 자세를 잡았다.

전혀 긴장감 없는 대치 상태가 잠깐 이어지고, 마침내 유트리안이 검을 번쩍 치켜들고 왁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압!"

찰나지만, 카이스의 눈에 가소롭다는 스쳐지나갔다. 그는 유트리안이 어느 정도 가까워질 때까지 여유롭게 서서 기다렸다.

"맞아라아앗!"

그리고 마침내 그가 기세 좋게 부웅 휘두른 목도를 어깨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피해버린 카이스는 곧바로 몸을 숙여 허공을 베고 있는 유트리안의 다리를 탁, 걸어버렸다.

"우와아악!"

우당탕탕, 쿵, 쾅! 으악! 요란한 소리에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이크,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황자 전하가, 그 도도하고 싸가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유트리안이 처참한 모습으로 자신의 싸구려 목도와 함께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깨끗한 옷은 이미 흙투성이였고 에메랄드빛 고운 머리칼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얼굴에는 살짝 까진 상처가 났다.

잠깐의 침묵. 카이스가 뻔뻔하게-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다- 검을 넣고, 기사들은 망연해진 눈으로 쓰러진채 꼼짝도 안 하는 유트리안을 바라보았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황자님, 고집불통에 철없기까지 하지만 제 1황자라는 이유로 오냐오냐 모셔지며 자란 유트리안이 얻어맞은 것으로도 모자라 엉망진창으로 넘어졌다! 이건 대 사건이었다. 모두가 숨죽인 그때, 어디선가 천진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하하하! 푸하하하, 하아! 하하하! 아, 웃겨! 하하!"

"야! 웃지마!"

유트리안이 쪽팔림으로 벌개진 얼굴을 발딱 들며 고함을 쳤지만 아시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그는 배꼽을 잡고 신나게 깔깔거렸다.

"그러니까 제말 들으라고 했잖아요, 하하하! 무턱대고 돌진하면 안된다니까!"

"알았으니까 닥쳐!"

"하하하하! 아- 진짜 배아파! 하하하하!"

유트리안은 포기하고 크르릉, 비슷한 신음소리와 함께 바닥에 코를 박아버렸다. 카이스는 그를 향한 한심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아시엘은 여전히 바닥을 탕탕 때려가며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그 누가 황자를 저런 식으로 취급할수 있을까. 루이카엔은 멍하니 생각했다. 저렇게 두니 아시엘이나 유트리안, 카이스는 영락없는 십대 소년들이었다. 정치나 암살, 음모와는 전혀 상관 없이 뒹굴며 놀고 싸우는 아이들이었다.

"아, 웃지 말라니까! 그리고 너, 너도 그딴 식으로 보지마!"

유트리안의 악에 받친 외침이 어느새 연무장 전체로 번진 웃음소리 사이를 비집고 폭발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웃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루이카엔 역시 결국에는 큭,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나 태평한 일상인데.'

그래도 나중에 이야기는 나눠봐야겠지. 그는 웃음을 삼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피비린내나는 살인사건과는 전혀 관계 없어보이는 광경이지만- 루이카엔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매일이라는 이름의 얇은 막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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