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0. 세번째 파견(1)
그리고 아무 일 없이 이틀이 지나, 아시엘 일행이 파견을 떠나기 전날. 루이카엔은 언제나와 같이 집무실에 틀어박혀 쌓여있는 서류들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으으.. 이런 썩을!"
결국 그는 갈색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다 펜을 팍 집어던져버렸다. 일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단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파견지에서 사고를 쳐 대니 긴장감이고 나발이고 그냥 눈앞의 종이들을 불살라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뒷후환이 두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아시엘과 함께 황실 전용 도서관이라도 뒤져보고 싶었지만 이때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단장이라는 자리가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당신까지 들쑤시면 안돼요, 라는 아시엘의 단호한 말에 루이카엔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네, 진짜-"
그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마른세수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망연하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루이카엔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집무실 문이 콰아앙! 하고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
"루이카엔, 이 자식아!"
그리고 난데없이 터져나온 고함소리에, 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루이카엔은 정말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무의식중에 갑자기 쳐들어온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루, 루이스 경..?"
"얼빠진 면상 하지 말고 발딱 못 일어나냐, 루이카엔."
그가 차마 대답하기도 전, 무시무시한 주먹이 빠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끄억!"
"엄살 피우지 마라. 내가 그렇게 가르쳤나?"
루이스가 팔짱을 척 끼고 단호하게 말하자 루이카엔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다짜고짜 때리십니까! 십 년만에 만나는 부하가 반갑지도 않으십니까!"
"반갑다마다. 그나저나 꽤 많이 컸구나, 루이카엔. 나한테 대들다니 말이야."
음산한 그 한 마디에, 루이카엔은 목줄이가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젠장, 망했다! 완전히 창백해진 그의 얼굴이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아,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것보다, 어쩐 일로.."
"내가 찾아온게 매우 유감이라는 표정이군. 아카데미에서 애들 보느라 바빠 죽는 와중에 수업까지 빼고 찾아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어제 아시엘한테서 연락 받았다."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이스는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이야기는 많은데, 네가 아카데미로 오는 것보다 내가 직접 오는게 나을것 같아서 왔다. 옛날 얼간이들 면상도 좀 보고, 새 얼간이들 구경도 할 겸."
"제 단원들은 얼간이가 아니.... 아닌게 아니라, 예, 네, 뭐. 하하하."
그의 눈썹이 치켜올라가는 것을 본 루이카엔은 급하게 얼버무리고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야기는 나중에 아시엘이 돌아오면 하고.. 일단 나가시죠. 기다리는 녀석들이 많습니다."
"아시엘은 어디 갔는데?"
"요즘 황자 전하 호위를 맡아서요. 곧 전하랑 같이 올 겁니다."
호위? 루이스는 그 회색 눈동자에 의아함을 띄웠지만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이카엔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혼자 당하는건 억울하니까.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생활관 안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집합했다.
"......"
10년만에 만난 전설같은 상관 덕분에 단원들은 완전히 창백해져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 차렷 자세로 굳어버렸다.
루이스 아르셰인, 젊은 신세대 기사들에게 그 이름은 거의 전설과도 같았다. 갓 황제가 된 라이펜과 함께 셀레니스 기사단을 창설한 제국 최강의 검사. 덤으로 바짝 긴장한채 얼어붙은 케빈과 루이카엔, 제르닌의 모습이라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까지 더해지자 기사들의 호기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호오- 낯선 면상들이 꽤 보이네."
빠릿빠릿하게 사열한 기사들 앞을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듯 살피던 루이스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케빈의 앞에 우뚝 멈춰섰다.
"구면상들도 보이고 말이야."
"... 구면상이라니, 말이 너무하잖습니까? 그것보다 어디에 가셨다가 이제야-"
빠아악! 쿠헉! 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더니 불과 3초 전만 해도 성질을 내던 케빈이 우당탕탕 멀리 나가떨어졌다.일동은 모두 사색이 되어, 단 일격으로 그를 제압한 루이스가 그의 명치를 때린 주먹을 푸는 것을 두렵게 지켜보았다.
"닥쳐, 이 말썽쟁이 자식아. 네놈들 때문에 내 수명이 깎여나갈까봐 나갔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적 없냐? 듣자하니 요즘도 개판이라며? 하긴, 루이카엔 놈이 단장을 하고 있으니 오죽하겠냐만은."
"아아악! 사고는 다 같이 치는 건데 왜 나만 때립니까!"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발악하는 케빈의 정강이에, 루이스의 발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빠악, 커억! 그는 다시 눈물을 삼키며 바닥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이다, 이 자식아. 넌 예의부터 다시 배워야 해."
"끄으윽.."
케빈은 처량하게 신음을 삼키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걸핏하면 정강이 걷어차는건 루이스 경께 배웠구나, 아시엘.. 루이카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케빈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괴물급 케빈을 간단하게 저지한 후, 그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한번 기사들을 죽 훑었다. 마치 서늘한 쇠사슬로 꽁꽁 옭아매이는 듯한 느낌에 일동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무시무시하던 아델레트의 구박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다른 하인들이나 병사들이 봤다면 기겁하며 신전으로 달려갈만한 풍경이었다. 아, 세상이 끝나려나 봅니다, 하고.
기가 푹 죽어버린 동료들을 보며 제르닌과 아델레트는 남몰래 한숨을 폭 내쉬었다. 10여년 전- 그러니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부터의 햇병아리 시절이 새삼 떠올랐다. 사고치고, 혼나고, 깨지고, 또 사고치고.. 그가 훌쩍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끝없이 반복되던 나날이었다.
그래도 그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럭저럭 지냈던것 같았다. 거칠긴 해도 다른 일에 무관심한 루이스가 신경 써 주는 것은 기사단원들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때, 생활관의 문이 달칵 열렸다.
"아, 그러니까! 거기서 키 얘기가 왜 나오냐니까요!"
"왜기는! 몰라서 묻냐, 이 건방진 땅꼬마가!"
-여전히 아옹다옹하느라 정신이 없는 아시엘과 유트리안, 그리고 할일 없이 친구를 따라나섰던 카이스였다. 황자와 맹렬하게 말다툼을 하던 아시엘은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로비의 중앙에 팔짱을 끼고 서있는 루이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저씨?"
헐. 그때까지 루이스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기사들은 기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루이카엔과 제르닌, 아델레트 역시 표정 관리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그들을 족치던 싸늘한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루이스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정말 부드럽게!) 입꼬리를 휘었던 것이다.
"아. 아시엘, 왔어? 기다리고 있었어."
"연락이라도 하시지! 언제 오셨어요?"
아시엘이 반갑게 함박웃음을 띄우고 토끼처럼 다다다 달려가자 루이스는 킥킥거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저, 저게 뭐야아! 기사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소리 없이 아우성을 쳤다. 전의 상황을 뚝 잘라낸다면 훈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불과 3분 전까지만 해도 냉기를 풀풀 풍기던 그 때문에 쫄아 있던 이들에게는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특히 실컷 얻어맞은 케빈은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처럼 창백해져 중얼거렸다.
"... 야.. 저 아빠미소 짓는 인간, 누구냐?"
"....몰라, 나도."
비슷한 표정의 루이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제르닌 역시 조금 질린 표정으로 루이스와 아시엘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델레트는 방금까지 하던 생각에 회의감을 느꼈다. 거친 애정 표현- 이라.
이제 루이스는 아시엘의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으며 킬킬 웃고 있었다. 저 사람이 웃으면 바로 도망가라, 를 철칙으로 삼고 젊은 시절을 보냈을 만큼 루이스는 잘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머리 끝까지 화가 났을때나 협박할때 정도에나 살벌한 미소를 띄우던 그였다. 어쩌면 그 점은 아시엘이 쏙 빼닮았는지도.
그러니까 저렇게 소리내서 자상하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야. 거기까지 떠올린 아델레트의 얼굴이 조금 하얗게 변색되었다.
".. 부단장,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아니.. 신경쓸건 없어."
휴온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저게 아들바보 라는 거구나. 베르칸이 망연히 웅얼거리는 소리에 벨킨이 묵묵히 수긍했다.
"그것보다-"
갑자기 루이스의 목소리가 조금 크게 들리자, 그들은 일제히 몸을 움찔했다. 그는 아시엘의 어깨를 감싸쥔채 고개만 돌려 루이카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분명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아시엘에게 보내던 것과는 다른 종류.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루이카엔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 왔을 때도 상처가 있더니. 오늘은 다른 곳에 또 상처가 나 있군. 무슨 일이야?"
분명 아시엘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그의 눈은 살벌한 빛을 띄고 루이카엔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기사들은 달달달 떨리는 손을 숨기지 못하는 단장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때, 아시엘이 구원의 말을 건넸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암살자들 상대하느라 좀 긁혔을 뿐이에요."
"...... 흠, 그래?"
아직까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유트리안도, 영문을 몰라 얌전히 있던 카이스도 그 짧은 한 마디에 어깨를 살짝 떨었다. 루이스는 뜻있게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루이카엔은 죽음의 화살이 방금 자신을 비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행선지도. 그는 조용히 자신의 주군이자 황제인 라이펜의 명복을 빌었다.
"그나저나 선배들은 왜 다들 나와 계세요? 케빈 선배는 왜 저러고 있고요?"
".... 루이스 경이 오셨으니까. 예의를 차려야지. 그리고 케빈은 그냥 내버려 둬."
그리고 네가 오기 전까지 잔뜩 깨지고 있었어, 란 말을 꿀꺽 삼킨 루이카엔은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시엘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스를 저렇게까지 만든 아시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완전 사람을 바꿔버린 부성을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어쨌든 다른 이들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은지 아니면 루이스에게서 돌아올 뒷후환이 두려운 건지 다들 잠자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아시엘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루이스 역시 아들에게서 손을 떼고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카이스와 유트리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카이스. 잘 지냈냐? 그리고 그쪽이 라이펜 놈의 아들이로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수님."
카이스는 무덤덤하게 인사했지만 유트리안은 적잖은 충격을 받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살면서 아버지의,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본데다 초면의 자신에게도 바로 말을 놓다니. 하지만 루이스는 알 바 아니라는듯 그의 에메랄드빛 머리를 툭, 손가락으로 쳤다.
"얼빠진 라이펜보다야 조금 낫다만, 그래도 역시 판박이로군. 나 기억 안 나지? 네가 완전 꼬맹이일 때쯤 봤었는데."
"아...."
유트리안은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결에 고개만 끄덕였다. 건방지다고 호통을 쳐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용기도 나지 않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서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 루이스는 몸을 빙글 돌렸다.
"인사는 대충 됐으니. 루이카엔, 너 잠깐 나 좀 보자."
"아, 아.. 예!"
루이카엔은 앞서서 집무실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횅하니 사라져버리고 잠깐의 침묵 후. 아직까지도 뻣뻣하게 서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아- 죽는줄 알았네."
"네? 뭐가요?"
누군가의 힘빠진 중얼거림에 아시엘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까지도 바닥을 뒹굴던 케빈은 잠시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끄윽,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궈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