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1. 세번째 파견(2)
".. 붉은 눈, 입니까."
루이카엔은 천천히 루이스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 오묘한 어조에 루이스는 단박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죽고싶냐?"
"아뇨.. 그냥. 어쩐지, 그때 괴물 놈의 눈도 붉은 색이었죠."
루이카엔은 씨익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빨간 눈은 반짝반짝하고 예쁘기만 한데요, 뭐."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11년 전의 사건 말이다. 내 생각엔 아마 그게 시작이었던것 같아."
루이스는 손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듯 그의 미간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그때 내가 궁을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11년 전이라면. 하노빌 영지의 작은 마을 하나가 초토화됐던 그 일 말씀.. 이십니까?"
루이카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때 루이카엔은 18살, 지금의 카이스와 같은 나이였다. 케빈, 아델레트, 제르닌과 함께 갓 아카데미를 졸업해 입단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갑자기 터진 사고 덕분에 손이 모자랐던 터라 루이스, 케빈 그리고 다른 동료들 몇몇과 함께 하노빌 영지로 향했고- 그가 본 것은 지옥이었다.
그때, 그 광경은 잊고싶어도 잊혀지지 않았다. 공기 중에 진득하게 배여 있던 피 비린내, 마을을 뒤덮은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처참하게 찢어진 시신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혈액으로 붉게 물들어버린 지면. 연기로 시커멓게 변한 하늘.
지금이야 익숙해졌다지만 단지 18살 소년일 뿐이었던 루이카엔과 케빈은 적잖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다 케빈은 그 후에 어머니까지 사고로 잃어 한동안 방황까지 했었다.
"그때-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가 겨우 탈출해 신고해 왔을때, 그 곳으로 먼저 간 것은 루아 이클립스였지. 이미 갔을 때는 마을은 몰살되어 있었고 범인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고 놈들이 그러더군."
"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대로 덮혀버렸죠. 저흰 뒷수습 하러 갔던 거고."
루이카엔이 담담하게 말하자 루이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엘한테는 자세하게 말 안했어. 그냥 그런 일이 있었고, 그 근처에서 흑마법의 흔적을 발견했다고만 했지."
".... 그러셨습니까?"
"어. 애한테 말하긴 좀 그렇잖아. 그리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어쨌든, 난 아카데미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아. 눈에 띄게 움직일 수도 없고 접근할수 있는 정보도 한계가 있지. 오늘 온것도 위험을 감수하고 온 거니까."
루이스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라이펜의 버릇과 비슷한 습관이었고 그것은 그의 뒤를 이어 이 자리에 앉은 루이카엔에게 이어졌다. 루이카엔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요?"
"네가 지금 단장이잖아. 그 11년 전의 과거랑 관련된 것들을 뒤져봐. 물론 눈에 띄여서는 안돼."
"하지만.."
그는 살짝 눈썹을 휘었다.
"그 사건은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던 걸로 압니다만. 말 그대로 그냥 묻혀버렸잖아요."
"흑마법에 관한 자료는 이미 먼 옛날에 사라졌다고 모두들 알고 있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금서라는 제약이 걸려 있는 이유가 뭐겠어? 어떻게든 흔적은 남는 법이야."
루이스는 의자를 빙글 돌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걸 찾아. 그리고 이건 라이펜에게도 알려져선 안돼."
"예?"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루이카엔은 멍하니 되물었다. 갑자기 거기에서 폐하가 왜 나옵니까, 란 물음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루이스가 쯧 언짢게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그 놈이 그 사건을 은폐하는데 일조하고 있는것 같거든. 처음에 흑마법이라고 얘기했을때 심하게 놀란걸 봐서는 그쪽은 아닌것 같지만 그거랑 별개로 뭔가를 아는게 분명해."
"하지만 황궁에서 폐하와 대공 전하, 두 분의 눈을 피하는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습니..... 죄송합니다. 하겠습니다."
나름의 반론을 펴보려던 루이카엔은 그가 보낸 싸늘한 시선 한번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루이스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대화가 끊겼다. 잠시 할 말을 찾는듯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아버지로서 부탁하는 건데.. 아시엘, 잘 부탁한다."
잠깐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루이카엔은 뒤늦게 겨우 되물었다.
"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황궁 바깥에 있으니까.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 대신 네가 좀 지켜줘. 멍청하지만 그래도 네가 제일 믿음직한 놈이니까."
뒤이어진 루이스의 차분한 말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놀라움과 의아함, 그리고 흥미가 섞인 얼굴로 루이카엔은 툭 내뱉었다.
"역시 많이 변하셨네요."
"왜. 부럽냐?"
루이스는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다. 루이카엔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겁쟁이 어머니와 빈민가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 차가운 아버지와 자신을 경멸하는 동생.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진짜 아들처럼 아시엘을 아끼는 그를 보고 있자하니 어딘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드는 것은 루이카엔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더럽게 솔직한 녀석이로군. 그래도 녀석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 귀족놈들 식으로 말하자면 근본도 모르고 신원도 불확실하지만 그게 뭐가 문제겠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사는 녀석을 동정할 자격은 없지만 어쨌든 불쌍한 놈이니까.
처음 봤을땐 자기 이름 말고는 자신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었어. 조그만게 어찌나 달려들던지. 지금은 좋아 보이지만 요즘도 악몽 때문에 밤잠 설친다고 카이스한테 들었어. 본인은 아무 말도 안 하지만."
"..그랬.. 습니까?"
그러고 보니 슌이 이야기했던 것도 같았다. 루이카엔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지자 그를 물끄러미 보던 루이스는 손을 까닥까닥했다. 루이카엔은 의아하게 눈을 뜨면서도 그에게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3초 후. 빠아악! 하는 경쾌한 소리가 그의 뒤통수를 후렸다.
"크어억!"
"우거지상 하지마, 임마. 그리고 아시엘 뿐만이 아냐. 너도 마찬가지라고."
루이스의 뒷말에, 주저앉아 낑낑거리던 루이카엔이 고개를 들었다. 단호함이 어린 루이스의 갈색 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몸 조심해야 하는건 너도 마찬가지다. 네놈이나 아시엘이나 다른 놈들이나, 셀레니스엔 바보들밖에 없으니까. 몸 사릴줄 모르는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 죄, 죄송합-"
니다, 가 나오기도 전에 루이스의 손이 한번 더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빠악, 끄억! 하는 소리가 차례로 들리고 루이카엔은 머리를 감싸안고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아시엘은 물론이고, 난 네놈이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언제나 신중하게 행동해. 마탑에 있는 녀석이 대항할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고. 알겠냐?"
"아윽....."
루이카엔은 대답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늘게 신음만 흘렸다. 하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화는 낼대로 내면서 멍청한 단원들을 독려하고 걱정하며 이끄는 그 옛날의 성질 더럽고 솔직하지 못한 대장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루이스는 생활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루이카엔과의 대화를 끝낸 그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한다며 금세 밖으로 나섰다. 아시엘과 카이스, 유트리안 그리고 기사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까지 따라나왔다.
"폐하는 안 뵙고 가십니까?"
"내가 그 자식을 뭐하러. 면상 안 보는게 속 편하지."
제르닌의 말에 루이스는 손을 훠이훠이 내젓고는 아쉽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시엘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뭐.. 또 금방 볼 거지만. 또 파견 간다면서? 몸 조심해."
"네에."
그는 히히 웃는 아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 다정함 덕분에 루이카엔 외 기사들은 다시 한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해야 했지만 그는 무시했고, 아시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이스는 몸을 숙여 아시엘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 붉은색 눈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무신론자라 주신 에레스 님의 이름으로 축복은 못 해주겠지만. 어쨌든 행운을 빈다. 너희들 모두도."
덧붙여진 뒷말에 잠깐 멍하니 있던 그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 역시 그보다 더 밝고 깨끗할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저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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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뒷내용이 더 있었지만, 휴재를 하는 마당에 길게 이어놓으면 뒷편들 읽으실때 끊기는 감이 있을것 같아서 여기에서 끝맺었습니다.
한동안 쉬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간간히 외전도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ㅎㅎ
함께 해주시는 분들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8월 두번째 목요일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히 계세요! 격려와 이해 감사드립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천둥 치는 밤에는
쏴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큰 비가 퍼부었다. 대낮부터 태양이 시커먼 먹구름에 가려 늦은 저녁이라도 된 마냥 어두컴컴하더니 해가 지고 나서는 완전 암흑이었다. 간간히 천둥 번개까지 치는, 그런 최악의 날씨. 번쩍 하고 번개가 순간적으로 주변을 밝혔다가 사라졌다.
"엄청나네."
창가에 기대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던 케빈은 짧게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제르닌 역시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비라면 적어도 오늘 하루는 생활관에서 꼼짝도 못 하겠군. 나간 녀석들만 고생이겠어."
"...뭐. 정말로 큰일은 따로 있지만 말이야."
케빈은 그렇게 대꾸하며 힐끗 소파 쪽을 곁눈질했다. 제르닌의 시선 역시 같은 곳을 향했다.
"......"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귀를 꽉 틀어막은 채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고 있는 아시엘과, 그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카이스였다. 아까도 물어봤지만 케빈은 결국 한번 더 같은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야, 괜찮냐?"
"....아뇨.."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아시엘의 목소리는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귀를 그렇게 막고 있는데도 내 말이 들리냐, 케빈은 새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기는 지금 이 상황도 그 빌어먹게 좋은 청력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언젠가 아시엘이 천둥 소리에 약하다는 사실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줄은 케빈과 제르닌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아시엘의 상태는 심각했다. 원래 하얀 피부는 완전히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고 벌벌 떨리는 몸이 주체가 안 되는지 이따금 딸꾹질까지 해댔다. 그야말로 패닉.
차라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게 어떠냐고 케빈이 권했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여서 더 싫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째 이해도 되는것 같아서 그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아시엘은 로비에서 카이스의 옷깃을 꼭 붙잡고, 천둥소리가 터져나올 때마다 같이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꾹꾹 삼키고 있었다. 제르닌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눌러담았다. 천하의 아시엘 아르셰인이 천둥에 저 꼴이라니. 그렇다고 핀잔을 주기엔 그 증세가 너무 심했다. 결국 그는 한가지 대안책을 내놓았다.
"잠 오는 약이라도 줘? 먹고 잘수 있을지도 모르고."
"해봤는데 소용 없었어요.."
곧 우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때 또다시 꽈과광! 하는 폭음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히이익, 작게 소리를 지른 아시엘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케빈과 제르닌은 그런 그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어?"
마침 집무실에서 나온 루이카엔은 로비에 모여 있는 케빈, 제르닌, 카이스 그리고 아시엘을 보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날씨가 이 모양인데 너네는 거기 모여서 뭐해? "
"아아. 넌 일 다 했냐? 아까 아델레트한테 실컷 혼나고 끌려들어가더니."
"대충."
케빈의 삐딱한 물음에 대강 대꾸하며, 그는 그들에게 터벅터벅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 템포 늦게 상태가 이상한 아시엘을 발견했다.
"어라? 아시엘은 또 왜 이래? 어디 아파?"
"상태 안 좋으니까 건들지 마."
제르닌의 말에 루이카엔은 흠-하고 몸을 숙여 아시엘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달달 떨리는 손과 하얗게 질린 목이 그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낯빛을 달리하고 눈을 가라앉혔다.
"아시엘, 너 설마-"
아시엘은 몸의 긴장을 살짝 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이카엔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생리하냐?"
"......"
잠깐의 정적 후. 뻐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시엘의 부츠 앞코가 정확히 루이카엔의 배에 꽂혀들었다. 컥,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단장이 대리석 바닥에 나동그라지자 곧바로 제르닌과 케빈이 나서서 그를 콱콱 짓밟기 시작했다.
"그런! 농담이! 나오냐! 너는!"
"으어어억! 억! 크헉, 잘못했어, 컥!"
카이스는 못 볼 것을 봤다는듯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시엘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씩씩거리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루이카엔을 쏘아보았다. 그 때, 또다시 쿠콰과광! 하고 하늘이 울부짖었다.
".....익..!"
아시엘은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머릿속에서 폭탄 수백 개가 동시에 폭발하는것 같았다. 뇌가 마구 뒤흔들리는 느낌. 케빈과 제르닌이 겨우 구타를 멈추자 너덜너덜해진 루이카엔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설마 천둥 소리 때문에 그래?"
"설마가 아니라 정말입니다. 아시엘, 일어나 봐."
아시엘은 카이스의 팔을 꼭 붙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인지 그 빨간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늘 고집스럽게 주장하던 '무서운게 아니라 시끄러워서 놀라는 것 뿐' 이라는 말조차 꺼낼 정신도 없었다. 친구의 팔에 의지해 간신히 소파로 돌아간 그는 곧장 쿠션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루이카엔은 바닥에 엎드린 그대로 제르닌에게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저거 누구야? 아시엘 맞아? 제르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맞으니까 닥치고 있어. 하지만그 충고가 무색하게도 루이카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비어있는 아시엘의 오른쪽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졸지에 카이스와 루이카엔 사이에 끼게 된 아시엘은 고개를들고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뭐요. 놀리러 왔어요?"
"아니. 비어있는 한쪽 옆구리가 시릴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아시엘은 꿍얼꿍얼거리며 다시 머리를 무릎에 처박았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빈과 제르닌은말없이 그쪽으로 다가가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좌 카이스, 우 루이카엔, 남쪽으로 케빈과 제르닌을 마주하게 된 아시엘은 황당해져 눈을 깜빡거렸다.
"선배들은 왜요?"
"루이카엔 자식 패느라 힘 뺐더니 다리가 아파서."
케빈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제르닌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그런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카이스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엥? 왜 웃어?"
"아니. 신경쓰지 마. 그것보다 오늘 밤은 길겠구나."
아시엘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시선을 피해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아시엘은 부루퉁해져 무릎에 턱을 얹었다. 물론, 그 자신은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멎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너의 이야기
쏴아아아- 지저분한 골목길을 씻어내리고 싶은 모양인지 하늘에서는 비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쓰레기가 쌓인 구석진 자리에, 움푹 패인 바닥에 더러운 빗물이 시커멓게 고였다.
사람들은 이미 비를 피해 어디로든지 들어가 버린 모양이라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은 이 슬럼을 가득 채운 빗소리와 한가득 모였던 물이 내리막길을 따라 콸콸 흘러가는 소리뿐.
모포를 뒤집어쓰고 길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시엘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죽어버린 듯한 그의 붉은색 홍채에 담기는 것은 새카만 하늘과 거세게 떨어지는 빗방울 그리고 텅 빈 골목길.
아무도 없어.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흠뻑 젖은 작은 몸에 계속해서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물을 머금은 금발을 타고 내려온 빗방울 하나가 방울져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지며 바닥에 동그란 파장을 그려냈다.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는 먹구름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천둥은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추위에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아.."
탁한 한숨이 그의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 비는 언제쯤 그칠까.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난 어디로 가야 할까.
사람들의 욕설만큼 익숙한 것이 고독이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때부터 외로움이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 비를 피하려 간 곳에서 두들겨 맞고 쫒겨난 순간 그는 그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행복하기를 바래. 마법의 주문처럼 꿈이 이루어질 테니까.'
이 말을 해 준건 누구였더라. 빗줄기 속에서, 아시엘은 몽롱한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짙은 안개에 가린 것처럼 흐릿한 기억. '옛날' 이라고 불리는 시점의 일을 떠올리면 언제나 한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 것처럼 까마득한 어둠에 휩싸이고는 했다. 하지만 간간히 불쑥 튀어나오는 낯선 기억들은 이따끔 그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고는 했다.
'행복하기를 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될 테니까.'
아마 지금보다 더 작았을 자신을 품에 안고 그렇게 속삭이던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아시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녀는 행복해 졌을까.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알까- 하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때 아시엘은 이 골목길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건 '아시엘' 이라는 이름과 '지금 배가 고프다' 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들려오는 이 목소리. 따뜻한 감각은 도대체 누구의 것인지.
아시엘은 몸을 웅크렸다. 골목길의 쓰레기와 같이 이 비에 씻겨 내려갈수 있다면. 아주 옛날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따뜻한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지금도 그것처럼 모든걸 잊을 수 있다면.
세상은 불공평하다, 라고 불평할 의지조차 남지 않은 자신을 버릴 수만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으면.
아이의 새빨간 눈동자가 다시 먹구름을 향했다. 비를 막기 위한 모포는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비척비척 마른 몸을 일으켰다. 툭, 쓰고 있던 모포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이제 신경쓰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이는 살짝 눈을 감았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부단장님과의 외출
오랜만의 나들이에, 평상복 차림의 아델레트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하늘빛 곱슬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리며 햇살을 반사시켰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따라나선 아시엘은 새삼 자신의 부단장이 미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언제나 허벅지까지 오는 짧은 치마와 제복을 입고 단원들을 구박하는 여장부 이미지가 강해, 사복 차림으로 생활관 밖에서 보는 아델레트는 꽤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작정 끌고 나와서 미안해. 너도 쉬고 싶었을 텐데."
"네? 아, 아니에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는걸요."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아시엘은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헤헤 웃었다. 아델레트는 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럼 가 볼까? 쇼핑 같이 해주는 대신에 맛있는 것 정도는 사 줄게."
"네에."
아시엘은 헤실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외출의 목적은 생활관에 필요한 각종 물건들을 사는 것이었다. 다른 단원들은 일에 치여 한가하게 쇼핑을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없으니, 이렇게 번갈아가며 비번인 사람이 돈을 거둬 장을 봐 오고는 했다. 오늘은 아델레트가 휴일이었고, 자신의 것을 사는 김에 다른 기사들의 부탁도 들어주는 셈 외출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밖으로 나운 두 사람은 곧장 시내로 향했다. 익숙한 거리였지만 아시엘은 평소처럼 즐거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상점들을 구경했다. 그런 그를 힐끗 곁눈질한 아델레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애는 애구나.'
종잡을 수 없긴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오랜만의 외출, 언제나 혼자 다니는 것을 즐겼지만 이런 느낌이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처박혀서 책만 읽는 아시엘을 무작정 끌고 나오긴 했지만 싫은걸 억지로 데려왔나,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하는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거기, 아가씨들! 예쁜 장신구가 많아요. 구경이나 하고 가세요!"
"......?"
누군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을 걸음을 멈추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머니' 라는 말이 잘 어울릴 듯한 한 상인이 푸근한 미소를 짓고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아델레트는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가 볼까?"
"아.. 네!"
앞서서 진열대로 다가간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가지런히 늘어선 장신구들을 살폈다. 뒤따라 간 아시엘 역시 진열대 위를 보고는 와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예쁘네요. 수제인가?"
"그러게."
아델레트 역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값비싸거나 고급스러운건 아니었지만 보석 대신 반짝이는 큐빅으로 장식된 핀이나 목걸이 따위가 맑은 하늘에 맞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장난기가 든 그녀는 마음에 드는 붉은색 머리핀을 집어들고 아시엘의 앞머리에 꽂았다.
"쨘. 잘 어울리는데?"
"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던 아시엘은 상점 여주인이 내미는 손거울을 들여다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항의했다.
"이게 뭐에요!"
"왜? 괜찮은데."
아델레트는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핀을 빼줬다. 그리고는 아시엘이 뭐라고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것을 무시하고 곧 다른 것을 골라 그의 화사한 금발에 고정시켰다.
"이것도 괜찮은데."
"...하아아..."
아시엘은 포기한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어울린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여자인 아델레트가 살짝 패배감을 느낄 만큼이라면 말 다한 셈이었다. 그때 아시엘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 주인이 방긋 웃으며 다른 물건을 집어들었다.
"참 아름다우신 영애님들이네. 혹시 자매인가요? 크게 닮은 얼굴은 아닌데.. 이건 어떠세요! 언니 분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풋! 아, 감사....큭.. 감사합니다..."
아델레트가 부들부들 어깨를 떨기 시작하자, 아시엘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여주인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델레트가 처음에 아시엘이 달았던 머리핀을 집어고 내밀자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죠? 제 예쁜 동생한테 오랜만에 선물이나 해야 겠어요."
"아... 2실버만 줘요, 아가씨!"
아시엘이 아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델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을 꺼내 계산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 풋, 웃으며 그것을 다시 그의 앞머리에 꽂았다.
"예쁘네. 아주 잘 어울려. 그럼 다시 장 보러 가볼까?"
아시엘은 평소대로 남자한테는 예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구요, 하고 항의를 하려다 곧 자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주머니를 알아차리고는 포기했다. 대신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부단장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귀여웠는지 아델레트는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골 내지 마. 난 자매가 없으니까 이런 것도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친구라고 있는 것도 시커먼 남자들 뿐이고."
"치... 그래도 뭐, 선물이라니 나쁘진 않네요. 잘 간직 할게요."
아시엘은 표정을 풀고는 핀을 빼서 자신의 옷깃에 꽂았다. 이러니 사고를 쳐도 미워할 수가 없지, 아델레트는 가볍게 미소짓고는 길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슬슬 물건이나 사러 가볼까? 이러다 해 져도 못 돌아가겠어."
"그래요. 뭐가 필요하댔더라-"
아시엘은 주머니를 뒤져 메모지를 꺼냈다. 그것에는 그 특유의 정갈한 글씨로 선배들이 부른 물건들 목록이 죽 적혀 있었다. 루이카엔의 업무용 만연필과 에니르의 사료, 슌이 부탁한 군것질거리와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사다달라고 한 양말, 셔츠, 단도 등등. 아시엘의 사탕 한 통도 빠지지 않았다. 아시엘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것들, 웬만하면 다 지급되지 않아요? 특히 이 양말이나 펜 같은 생필품은요."
"아시엘, 재미있는걸 가르쳐 줄까?"
그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부단장을 바라보았다. 아델레트는 조금 씁쓸하게, 어찌 보면 허탈하게 덧붙였다.
"황궁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셀레니스로 들어가는 예산 먼저 삭감된다는거."
"......."
"덕분에 요즘 지급되는 생필품 양이 줄었어."
그래... 이 제국이 그렇지 뭐. 아시엘은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얘기해봤자 속만 뒤집어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두 사람은 그냥 포기하고 쇼핑이나 즐기기로 했다.
잡화점에 들러 옷가지를 사고, 길 여기저기에 놓인 가게들 전부를 기웃거리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사다보니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아시엘의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가방을 가득 채우고도 짐이 남아, 거의 마지막에는 각자 꾸러미 하나씩을 양 손에 안고 입에는 길거리에서 산 꼬치 구이를 우물우물거리며 해질녘의 시내를 걷게 되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갈까? 지금 돌아가봤자 녀석들 먼저 저녁 먹었을 테니까."
"당연히 선배가 사 주시는 거죠?"
아시엘이 농담처럼 내뱉는 말에 아델레트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녀는 곧장 아시엘을 어느 번잡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확 모였지만 아델레트는 무시하고 안쪽, 가장 구석으로 아시엘을 끌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자마자 아시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넌 역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게 낫겠어."
"네? 왜요?"
아시엘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무자각도 죄란다, 하고 덧붙여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만약 아름다움이 정말로 죄라면 아시엘은 이미 사형에 3대 멸족형을 받았어도 할 말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시엘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놀리는 거에요?"
"아니. 진심인데... 그것보다, 뭐 먹을래?"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그의 말에 아델레트는 자신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잠시 고민하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였다) 맥주 하나와 음료수, 그리고 2인분의 식사를 부탁했다. 아시엘은 쑥쓰러운듯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벗어나는 청년을 보며 짧게 내뱉았다.
"숫총각인가?"
"...쿨럭, 쿨럭! 뭐라고?"
물을 마시던 아델레트는 순간 그대로 뿜을 뻔했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 그녀에게 아시엘은 똘망똘망하게 설명했다.
"아까 선배한테 주문 받을때, 저 사람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쿵쾅 뛰던데요?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지금은 다른 종업원한테 달려가서 막 떠들고 있어요."
"뭐라고?"
"음... 대충 요약하자면."
아시엘은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우와아아! 우와아아! 우와! 저 파란머리 여자, 완전 섹시해! 완전 예뻐! 여신이야! -정도."
"뭐야 그게."
아델레트가 웃음을 터뜨리자, 아시엘은 빙그레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가 입꼬리를 들어올린채 표정을 굳혔다. 아시엘은 흥- 하는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셀레니스 기사단 안에서도, 선배 곁에만 가면 이렇게 심장이 크게 뛰는 사람이 있죠. 선배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애써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아델레트는 목이 타는 기분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누가 저 녀석보고 귀엽다고 했어! 하고 외치고 싶은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시엘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 소리 죽여 웃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선배를 봤으면 아마 자신을 가지라는 말을 했을 거에요."
"아는 사람이라니?"
"미래를 볼 줄 알거든요."
아델레트가 의아하게 묻는 말에 그는 히죽 개구쟁이처럼 입꼬리를 휘었다. 나뭇잎 여관의 예언자, 렌- 안 본지도 꽤 됐는데 어떻게 지낼까. 지금 상황과는 관계 없지만 아시엘은 조금 궁금해졌다. 아델레트는 그를 조금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그의 적안이 흥미롭게 반짝였다. 그때 마침 아까 그 종업원과는 다른 종업원이 요리를 두 손에 한가득 들고와 둘 사이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어졌다.
그 어마어마한 양에, 아델레트는 약간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저- 저희가 주문한 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요."
"서서서서 서비스입니다! 부디 느긋하게 쉬다 가시길! 그리고 괜찮다면 두 분 연락처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시뻘개진 얼굴로 숨도 쉬지 않고 따다다다 토해내는 그를, 아시엘은 황당한 표정으로 아델레트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짐짓 곤란하게 손을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전 이미 남자친구가 있어요. 제 '남동생' 은 저와 함께 살고 있고요."
"아.... 네. 아니, 잠깐, 남동생... 이라고 하셨습니까?"
급격하게 실망하던 종업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델레트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는 아주 절망하며 되돌아갔다. 아시엘은 음료수를 홀짝이며 종업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나, 참. 남자가 아니면 뭐라고 생각한 거야?"
"자자, 너무 신경쓰지 마. 시비나 안 걸리면 다행이지. 밥이나 먹어."
아델레트가 웃음을 삼키며 달래는 말에 아시엘은 툴툴거리면서도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빵을 거칠게 찢어 우물우물 씹어댔다. 아델레트 역시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인지 꽤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양의 요리들도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엘이 '배 터질것 같다' 선언을 하며 두 손을 들었다. 아델레트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그렇게밖에 안 먹으니까 키가 안 크는 거야. 팔다리도 그렇게 얇아서야 힘이 제대로 나오겠어? 뭐, 물론 그만큼 스피드랑 순간 대처 능력이 받쳐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하하하.. "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잠시 잊고 있던 무시무시한 부단장의 포스가 언뜻 내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곧 잔소리를 멈추고 픽 입꼬리를 올린 아델레트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금방 올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네에."
그녀는 대충 옷을 가다듬고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졸지에 혼자 남게된 아시엘은 멍하니 앉아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을 구경했다.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가 껄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뭐라 불만스럽게 주절거리다 마찬가지로 낄낄 소리를 냈다.
그는 시끄러운건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소란 속에 파묻히는건 꽤 즐겼다. 이대로 생활관으로 돌아가 부탁받은 물건들을 전해주고 방으로 올라가면 아마 꽤 늦은 밤이 될 터였다. 오늘은 뭘 읽어볼까, 태평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옆에 불쑥 다가섰다.
"....?"
벌써 오신 건가, 아시엘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왠 낯선 남자 두 사람이 그닥 유쾌하지 못한 미소를 띄우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아시엘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저기, 무슨 일이신가요?"
"아가씨, 혼자 왔어?"
그의 질문은 싹 무시하고, 험상궂은 남자 쪽이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델레트와 함께 있었는데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런 질문을 해 온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치들은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아시엘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아뇨. 그리고 전 아가씨가 아닌데요."
"우리와 함께 나가지 않겠어, 꼬마 아가씨? 네 일행보다 훨씬 재미있게 놀게 해줄게."
이번엔 험상궂은 남자 옆에 서 있던 야비한 인상의 남자였다. 아가씨 아니라고 이 개자식아, 란 말을 겨우 삼킨 아시엘은 사양의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곧 일행이 돌아올 테니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리고 전 아가씨가 아니라니까요."
"에헤이- 농담은. 남자애 차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정도로 우리같은 사람 눈은 못 속이지. 일행같은건 그냥 버리라고. 몇 살이야, 귀여운 아가씨?"
여기서 때려눕히면 또 감봉이려나. 뻔뻔하게도 맞은편, 아델레트가 앉아 있던 의자에 걸터앉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능글맞게 웃은 면상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두 남자가 이쪽에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다시 한번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아니요, 사양합니다. 그리고 무슨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 아가씨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만 가주시겠어요?"
"아직도 그런 거짓말을 할 셈이야? 몇 살이냐니까. 대화 좀 해 보자는데 왜이렇게 불만이 많아?"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지만 아시엘 역시 녹록치 않은 몸이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하지만 날카롭게 대꾸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제가 그쪽이랑 대화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당돌한 아가씨로군. 뭐, 남자건 여자건 그쪽은 확인해 보면 되는 일 아니겠어? 억지로 끌어내기 전에 일어나는게 좋을걸. 네 일행한테까지 피해 끼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험상궂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시엘은 흥, 하는 오묘한 소리를 내고는 놀리듯 빙글거렸다. 그도 슬슬 열이 오르는 중이었던 것이다.
"싫다면 어쩔 건데?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끌고 나가기라도 하게요? 경비대는 폼으로 있는줄 아냐, 이 개자식아?"
"뭐....?"
"하긴, 이런 데서 싫다는 여자한테 억지로 매달리지 않으면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보게 생겼네, 둘 다. 한심하네요, 나이 처먹고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보죠?"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가 몸을 벌떡 일으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우당탕!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년이 지금 장난하나! 까불다 맞으면 아픈 것도 모르나 보지?"
"-그건."
붙잡힌 와중에도, 아시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남자의 면상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그는 시선을 묘하게 비껴가 우락부락한 사내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예쁘게 웃었다.
"내가 할 말인데."
어째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분에, 두 남자는 몸을 흠칫했다. 그리고 그때, 아시엘의 멱살을 꽉 쥐고 있는 사내의 어깨에 툭- 하고 손 하나가 얹혔다.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것과 비슷한 타이밍이었다.
"그 족발 치워라."
"......"
두 남자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겨우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물결치는 하늘빛의 머리칼과 싸늘하게 식은 비취색 눈동자. 그리고, 가차없이 날아드는 주먹이었다.
빠아악! 정확하게 안면에 작렬한 그녀의 주먹에, 그는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날아갔다. 우당탕, 쿵! 그의 육중한 몸에 테이블 하나가 박살났다.
"컥...."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던 그는, 등을 콱 밟는 친절하지 못한 발 덕분에 다시 쿠헉, 하고 쓰러졌다. 아델레트는 자신의 발 아래에 놓인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대? 죽고 싶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끄허억!"
퍼억, 그녀의 구두가 남자의 명치에 박혔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일방적인 구타였다. 으억, 헉, 크억, 끄억, 끄아악, 잘못, 악, 미안해, 아악! 처절하게 울려퍼지는 그의 비명소리에 잠깐 정신을 놓고 있던 다른 남자가 재빨리 몸을 빙글 돌려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시엘이었다.
"어허, 어딜 가시려고."
"이 꼬맹이가...! 당장 꺼-"
져, 라는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 직전에 아시엘의 작은 발이 그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끄억!"
그리고 신음을 흘리며 아파하는 그의 머리에, 근처에 뒹굴던 나무의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빠아악! 잠깐 비틀거리던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품을 문 채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아시엘은 의자를 똑바로 내려놓고 의식을 잃은 남자를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듯 아델레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기절하지 않은 (아델레트가 노렸음이 틀림없다) 남자는 원래의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빨이 깨져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고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전신을 골고루 두들겨 맞은듯 너덜너덜해진 그의 모습에,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약간 동정하고 말았지만 차마 아델레트를 말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매일같이 그녀에게 얻어맞고도 줄기차게 개기는 루이카엔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결국 그 소동은, 두 남자의 몰골을 보고 기겁한 식당 주인의 신고로 경비대가 출동하고 아시엘과 아델레트가 셀레니스 기사단의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야 종결되었다. 하마터면 폭행죄로 나란히 체포될 뻔 하는 신선한 경험을 한 아시엘은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재차 다짐했다.
'절대로 아델 부단장한테는 덤비지 말아야지,'
단장과 카이스, 케빈과 어울려 식당 하나를 절단낸 적도 있었지만 사내를 두들겨 패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특히 마지막에 남자의 제 2의 생명인 주요 부위를 걷어차 기절시킨 아델레트는 정말이지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그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굳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에요. 하하하.."
별이 총총 박힌 늦은 저녁, 두 사람은 그렇게 짧은 하루를 마쳤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카이스 소년의 청춘에 대한 고찰
카이스는 평소에도 어떤 문제에 대해 크게 고민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떤 트러블이 생긴다 해도 '아, 그렇구나' 식으로 덤덤히 넘겨버리고 한창의 소년들이 보통 들뜨기 마련인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누가 누구랑 사귄다더라' 정도의 소문을 듣게 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버리는 담백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렇게만 보면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적용됐다. 잘생긴 외모와 과묵함에서 묻어나는 가볍지 않은 태도, 뛰어난 검 실력에 반해 아카데미의 여학생이 종종 "좋아한다" 며 고백을 해와도 카이스는 덤덤하게 넘겨버렸다. 직접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받아주지도 않았다. 덕분에 속이 터지는 것은 고백을 한 장본인과 주변 사람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아시엘은 일하러 나가고 오랜만의 비번이라 하릴없이 로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는 그에게, 오스카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야, 카이스. 네가 몇 살이랬지?"
"... 열 여덟입니다."
카이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건방진 태도였지만 오스카는 신경쓰지 않고 흠- 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풋사랑 정도는 해 봤겠네. 요즘 루카인 아카데미에도 여자애들 많다면서? 그렇지, 슌?"
"아무래도 한창 나이니까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아버지 곁에 붙어 있었다면 슬슬 혼인을 준비할 나이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유유자적 놀던 슌이 한마디 거들자, 아델레트가 없는 틈을 타 농땡이를 치던 루이카엔이 끼어들었다.
"맞아. 외모도 꽤 훌륭한 편이니까 고백 정도는 받아봤지 않겠어? 카이스도 남자인 이상 아시엘만 쫒아다니진 않았을거 아냐."
카이스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은 명쾌하게 나왔다.
"아뇨. 없습니다."
".... 뭐? 정말?"
케빈이 황당하게 되묻자 그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 하자마자 아시엘과 친구로 다녔으니까요. 연애 경험이라고 할 만한건 없습니다."
"헐. 그럼 혼자 좋아하던 여자애도 없었어? 짝사랑이라거나. 신경 쓰이는 애라던가."
곧바로 오스카가 따지듯 말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을 더듬는듯 카이스는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런게 어떤 느낌입니까?"
헐. 후배의 맹한 대답에, 세 사람은 아연해지고 말았다.
보통 사람들은 카이스가 아주 영민하고 날카로우며 예민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포용할 수 있을 만큼의 배포가 있어 과묵하게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해내는, 그런 소년이라 흔히들 착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일의 해결 방식에서 아시엘이 스마트하다면 카이스는 우직한 편이었다. 자신의 일은 완전히 수행하지만 가끔 허를 찔리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과묵함과 차가운 인상에 가려져 있었을 뿐, 실상 그는 굉장히 둔했다. 전투에서는 예리한 감각을 발휘해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만 일상에서는 둔탱이란 말을 들어도 반론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지내며 그것을 서서히 깨닫고는 있었지만 세 선배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마를 턱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단장님, 단장님, 쟤를 어쩌면 좋을까요.."
"아이고, 후배님..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아..."
오스카와 루이카엔이 서로를 붙들고 곡소리를 내고 슌이 미간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을, 카이스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차가운 인상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카이스의 검은 눈동자는 무구했다.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차분하게 있던 슌이 어렵게나마 '연애 감정' 을 풀어서 설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계속 눈에 들어오고 곁에 있고 싶고. 신경 쓰이고.. 뭐 그런거 있잖아?"
"계속 눈에 들어오고, 곁에 있고 싶고 신경 쓰이는 것... 입니까?"
카이스가 진지하게 말을 따라하자 그들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잠깐 생각하던 카이스는 곧 한 마디를 툭 내뱉았다.
"그런 거라면....... 아시엘?"
"......."
순간 세 사람은 몸을 휘청했다. 이번에 선수로 나선 것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루이카엔었다. 그는 답답함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음... 카이스? 우리가 말한 건 우정과는 다른 거야. 왜,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면 두근거리지? 그런 건 남자로서 당연한 거라고."
"아름다운 여성..... "
카이스는 이번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시엘 보다... 말씀이십니까?"
"아."
오스카, 슌, 루이카엔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자연스레 아시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매끈하게 제복을 입은 모습, 언젠가 명령 때문에 여장을 하고 나타났던 것과 연금술사 로웰 백작의 농간으로 진짜 여자로 변했을 때의 모습까지.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쉽게 납득했다.
그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으니. 아시엘 '만큼' 도 힘들 판에 과연 아시엘 '보다' 예쁜 사람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NO 였다.
오스카는 카이스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 정도의 미인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있었으니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루이카엔도 동감인듯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외모 깡패 같으니라고..."
"그럼 두 사람 다 아카데미 때 러브레터 받은적도 한번도 없었어? 고백이나."
"그런 건 있었죠."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슌이 다시 묻는 말에 카이스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와 루이카엔은 고개를 반짝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 아시엘의 경우엔 태반이 남자로부터 온 거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요. 저도 받긴 받았습니다만, 아시엘과 어울려 다니느라 제대로 사귀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그마저도 졸업할 때 쯤엔 없어졌으니까요."
카이스가 알 리 없었다. 치열한 러브레터 보내기 경쟁에 지친 학생들 사이에서 '저 두 사람은 그냥 관상용으로 삼고 건들지 말자' 는 합의가 오갔다는 사실을.
그들은 대충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카이스, 언제까지나 아시엘 뒤를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 기사단에 매인 몸이라 제대로 가정을 이루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연애는 해 봐야지."
"글쎄요... 전 지금이 좋습니다."
오스카가 넌지시 이야기했지만 카이스는 단호하게 느껴질 만큼 딱 잘라 대꾸했다. 루이카엔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다음 순간 그는 입을 다시 다물어야 했다. 생활관의 문이 벌컥 열린 것이었다.
"으아아- 다녀왔습니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터덜터덜 들어온 것은 바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시엘이었다. 분명히 얼마 전 강도단에게 털린 보석상에 조사차 갔을 터였는데 그런 것치고는 얼굴에 피곤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카이스는 당장에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왔어? 일찍 끝났네."
"어. 생각보다 일이 간단하게 되버렸거든.. 하하. 조사하러 갔다가 우연찮게 놈들을 딱 마주쳐 버려서."
아시엘은 선배들이 모여있는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카이스 역시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된거야? 그놈들 바로 도망쳐서 경비대도 놓쳤었다며."
"아.. 그게. 상점 주인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강도단 중에 한 녀석이 눈에 띄어서요. 아마 염탐하러 왔겠죠."
루이카엔이 재우쳐 묻는 말에 아시엘은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쳐 놓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그 때 놈들 얼굴이 알려져서 다행이었죠. 당장 그 사람부터 잡아 족쳐서 경비대랑 같이 강도단 아지트로 쳐들어갔어요. 5명 전원 체포했고, 방금 감옥에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아아.. 수고했어."
루이카엔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보고를 마친 아시엘은 이제 옆의 카이스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종일 뭐 했어? 별로, 아무것도. 그냥 앉아 있었어. 에이- 모처럼인데 외출이라도 하지.
혼자선 심심하잖아.
그런 아시엘의 시덥잖은 말에 어울려 주는 카이스의 얼굴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루이카엔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아직은 친구가 더 좋을 때지."
오스카와 케빈 역시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