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4. 유령이 나오는 영지(2)
"으.... 으으..!"
품 안의 것을 꽉 껴안고, 소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포악하기로 유명한 황야의 몬스터, 오크 무리였다.
"크르륵... 크륵.."
손에 거대한 도끼를 든 오크가 그녀에게로 성큼 성큼 다가왔다. 소녀는 겁에 질려 움찔 뒷걸음질쳤다.커다란 눈망울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소녀는 이를 앙물고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돼지를 닮은 얼굴에 뚫린 입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쿠웅. 오크 무리의 선두가 다시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크르어억!"
오크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소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더욱 꽈악 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꾸에에엑!"
가장 앞에 서있던 오크의 머리가 촤아악, 녹색 피를 뿌리며 갈라졌다. 잠시 그 상태로 경직된듯 서있던 오크의 몸뚱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털썩, 쓰러졌다.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선두를 잃어 동요한 오크들과 소녀 사이에, 키가 큰 남자 하나가 뛰어들었다.
"이런 돼지놈들이!"
호기롭게 외친 그는 곧바로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주황빛 선명한 검기가 그의 검에 맺혀 빛을 발했다. 남자가 거침없이 몬스터들의 몸을 찢어내는 사이, 바깥쪽에서 소년의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파이어 버스트!"
콰아아앙! 갑자기 화염이 치솟으며 지면이 폭발하더니 수 마리의 오크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소년은 얇은 세검을 휘둘러 폭발의 여파로 땅에 처박힌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몬스터들의 머리를 가볍게 쳐냈다. 그리고는 소녀의 앞에서 오크를 별 힘들이지 않고 처리 중인 남자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케빈 선배, 먼저 튀어나가면 어떻게 해요?"
"네놈한테만은 그 소리 듣고 싶지 않았는데."
남자- 케빈은 우스갯소리처럼 툭 내뱉고는 또 두 마리의 오크를 한번에 서걱, 베어냈다. 소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금발의 소년은 다시 한번 손을 뻗고 시동어를 외쳤다.
"이그니스 렌 데이란 아만 셀린. 파이어 스피어! "
그의 손 끝에 붉은색 마법진이 빛나며 생성됐다가 사그라들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의 창 네 개가 그의 곁에 자리잡았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화염의 창들이 오크들에게 쇄도해 머리통에, 가슴에, 몸통에 그리고 하나는 지면에 푹 박혔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꾸에에에엑!"
"버스트."
콰과과광! 창이 박혔던 지점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폭발이 일어나며 오크들의 비명소리를 뒤덮는 폭음이 터져나왔다. 그 충격으로 돌풍이 불며 소년과 남자의 제복 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곧 불길이 치솟으며 이미 죽어 나자빠진 몬스터들의 시신을 태웠다.
"오오- 멋진데, 아시엘? 효과 죽이잖아."
"새로 개발해 봤어요.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지만."
소년- 아시엘은 히죽 웃고 손을 거뒀다. 그러는 사이 케빈이 빠르게 움직이며 남은 몬스터들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꽤애액! 마지막 오크가 그의 검에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 아시엘은 몸을 빙글 돌려 주저앉은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괜찮아요? 이런 데서 혼자 있으면 위험해요."
"......."
그렇게 묻는 붉은색 눈동자가 너무나도 반짝거리고 아름다워서- 소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케빈이 검에 덕지덕지 묻은 오물을 털어내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는 어디 다친데 없어?"
"....네."
소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아시엘에게 닿아 있었다. 소녀의 멍한 표정을 알아차린 아시엘은 왠지 모르게 꺼림직해졌다. 그때서야 그는 불현듯 렌의 충고를 떠올렸다.
불을 조심하세요. 불 계열 마법도 자제하는게 좋겠어요.
어쨌든 무사히 소녀를 구해낸 두 사람은 그녀를 데리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혼자 이런 황야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소녀 역시 순순히 수긍하고 그들을 따랐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세이라라고 해요."
그녀- 세이라는 모닥불에 둘러앉은 기사들 사이에 끼어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러는 중에도 세이라의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는 아시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아시엘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느라 고개를 어색하게 돌리고 있었다.
세이라는 그리 특이할것 없는, 12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적당히 그슬린 까무잡잡한 피부와 붉은기 도는 갈색 머리가 화톳불과 달빛에 은은하게 비쳤다. 둘의 오묘한 대립을 재미있다는듯 지켜보던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세이라 양은 왜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었어? 여긴 마을과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잖아. 혹시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
"아뇨! 그냥 약초 캐러 나왔을 뿐이에요. 밤에만 피는 약초가 있으니까요."
세이라는 말끝을 흐리며 미소지었다. 아직 놀란 가슴이 다 진정하지 못해 조금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아이다운 깨끗한 미소였다.
"그런데 여러분은 누구세요? 혹시 후카덴 백작 영지로 가시는 분들이에요?"
"아... 응. 우린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이야. 일 때문에 그쪽으로 가고 있었지."
케빈의 말에 세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그럼 황제 폐하의 기사님이세요? 저 조그만 오빠도?"
"쿨럭, 쿨럭!"
조금 떨어져 앉아있던 아시엘은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카이스는 그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케빈은 끅끅거리며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오스카는 웃겨서 경련이 일어나는 입술을 겨우 뗐다.
"그럼. 그리고 저 오빠 이름은 아시엘이라고 해. 난 오스카고, 저쪽은 케빈, 카이스야."
"네! 알겠어요."
세이라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겨우 충격에서 헤어나온 아시엘은 어색하게 얼굴을 들어올렸다.
"저기, 세이라? 아무리 약초를 캔다고 해도 이 근처는 몬스터가 자주 나오는 지역인데. 거기다 여기에서 마을까지는 말을 타도 반나절은 걸릴 텐데 어떻게 혼자 나왔어? 위험하지 않았어?"
"괜찮아요! 위험하지 않아요."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얼굴에는 일종의 뿌듯함까지 보여 일행이 의아해하고 있을때 다시 세이라가 씨익 웃었다.
"저희 신 님이 지켜주실 거니까요!"
"..... 신 님?"
카이스가 되묻자 그녀는 확신에 차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신 님은 언제나 위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저언-혀 위험하지 않아요."
"아."
순간 네 사람은 아연해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신이라면 분명 교단을 말할 터였다. 주신 에레스 교나 마신 체르니온 교 같은.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신에게 의지해본 적 없는 인간들이었다. 뭐라고 대꾸해야 하나, 잠시 황망히 허공을 응시하던 아시엘이 가장 먼저 침묵을 깼다.
".... 정말 단신으로 나온 거야? 몸을 지킬 방비도 없이?"
"네! 전 싸움같은거 못하니까요. 그리고 그런거 필요 없어요. 그분이 절 지켜주고 계시니까! 오늘도 그 덕분에 오빠들을 만날수 있었잖아요."
다시 묘한 고요가 흘렀다. 세이라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얼굴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아시엘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모든 신들한테 제대로 찍혔나 봐요. 회개라도 해야 하나."
"그런가."
나머지 세 사람도 망연히 대답했다. 세이라의 얼굴이 너무나도 믿음에 가득 차 있어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지경이었다. 한참만에 정신을 수습한 케빈이 다시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아가씨, 믿는 건 좋은데 맹신은 삼가하는게 좋아. 방금도 우리가 가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하지만 와 주셨잖아요. 우리 신님은 달라요. 오빠들도 신 님의 이끌림에 저를 도와주러 온 걸 거에요."
-끝이 없었다. 아시엘이 우연찮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럼 그 녀석이 신의 사도인가? 똑같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그들은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중, 갑자기 세이라가 아시엘에게 몸을 디밀었다.
"있잖아요, 오빠. 오빠도 이그니스 님을 믿어요?"
"아니. 난 무신론자라서."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아시엘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것보다 이그니스라면 불 계열 마법의 기본 스펠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알아차린 카이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세이라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채 다시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기운차게 외쳤다.
"괜찮아요! 지금은 믿지 않겠지만 아시엘 오빠는 신의 사도가 틀림없어요. 그분의 힘인 불을 그렇게나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아니, 그건 마법인데."
아시엘이 작게 항변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도리질을 쳤다.
"나중엔 분명 저희와 뜻을 같이 하게 될 거에요! 그분이 그러셨어요. 신의 사도란 몸과 마음이 정갈하고, 고귀한 출생에 능력도 뛰어나신 분이라고."
"하하하... 마음대로 생각해."
결국 그는 포기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귀한 출생은 커녕 길바닥을 굴러다니던 몸이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것 같아, 아시엘은 다른쪽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보다 세이라, 혹시 후카덴 백작령에서 유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아, 요즘 그것때문에 시끄러워요. 골목길에서 귀신이 나와서 가끔씩은 이상한 소리까지 내면서 배회한대요. 그것도 아마 신의 벌일 거에요."
"이상한 소리?"
마지막 말은 무시하고 아시엘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세이라는 음- 하고 잠깐 생각하는듯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아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것 같기도 하대요. 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으로는 사람같은 형체가 뿌옇게 빛을 내면서 둥둥 떠다닌댔어요."
"그래? 다른건 아는거 없어?"
"네. 전부 다 직접 봤다는 사람들이 한 말이래요. 경비대도 포기하고 두 손 들었다나봐요."
유령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가 나온다는 것은 사실인듯 했다. 아시엘이 흐음, 하고 생각에 잠기자 세이라는 의아하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을 지켜보던 오스카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자자- 이제 사전 조사는 됐으니까 취침 시간이야. 밤도 늦었고. 불침번은 내가 제일 먼저 하고, 2시간씩 케빈, 카이, 아시엘 순서로 바꾸자. 이의 있는 사람?"
"없어요."
아시엘과 카이스는 도리질을 쳤다. 케빈 역시 수긍하고는 세이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가씨는.... 어쩌지. 밖에서 그냥 자도 괜찮겠어? 따로 가져온 침낭이 없는데."
"괜찮아요!"
세이라의 씩씩한 대답에 케빈은 기특하다는듯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