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76화 (17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5. 유령이 나오는 영지(3)

아시엘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살짝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이 가장  먼저 시야에 잡혔다. 잠깐 멍하니 있던 그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이스와 케빈은 깊게 잠들어 있었고, 불침을 선다던 오스카 역시 모닥불 옆에 드러누워 코를 고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세이라는-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세이라, 안 잤어?"

"아, 아시엘 오빠."

세이라는 베시시 웃었다. 얼굴에 졸음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예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시엘은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잠이 안 와?"

"네. 아무래도 낯설어서 그런가 봐요."

쑥쓰럽게 그녀가 대꾸하며 자리를 비켜주자 아시엘은 씩 웃고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자리가 불편했어? 하긴 이런 길바닥이니까 여자애한테는 조금 힘들만도 하네."

"헤헤.. 죄송해요. 괜히 민폐만 끼치게 되서요."

"아냐, 신경쓰지 마. 원래 사람이란게 같이 살아가는 거잖아."

아시엘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모닥불에 나뭇가지 하나를 던져넣었다. 타닥, 탁, 마른 장작이 타며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붉은색 불길이 크게 일렁이며 소년 소녀의 얼굴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잠깐 고요를 즐기듯 눈을 감고 있던 아시엘은 읏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나도 다시 자기는 힘들것 같으니까, 오스카 선배부터 해결해 볼까."

".....!"

세이라는 눈을 반짝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 시간여동안 혼자 어둠 속에서 깨어 있던 그녀는 아시엘이 다시 자러 간다고 할까봐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아시엘은 작게 킥킥 웃고는 쿨쿨 잠든 오스카에게 플라이 마법을 시전해 케빈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때까지 그가 드러누워 있던 자리에 턱 주저앉았다.

"거기보다 이쪽이 따뜻해."

"아, 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세이라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쑥쓰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시엘 오빠는 수도, 헤크란에서 왔죠? 셀레니스 기사단이면 황제님을 모시겠네요?"

"그렇지. 꽤 고달프긴 하지만."

아시엘은 쓰게 웃었다. 음험한 황제에 고집쟁이 황자.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인간들이었다. 세이라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황궁에서 사는 거에요? 어때요?"

"글쎄... 어떻다고 해야 할까.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선배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고."

"사이가 좋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 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친밀감 표현이니까."

세이라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미로움이 가득 차있는 그녀의 얼굴이 재미있어 아시엘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세이라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볼이 아주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오빠는 되게 예쁜 사람이네요. 혹시 가족은 어때요? 여동생이나 어머니도 오빠만큼 예쁠것 같아요."

"하하.. 남자한테 예쁘단 건 칭찬이 아닌데. 그리고 난 가족이 없어."

"가족이 없어요? 그럼 불행하지 않아요? 가족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고 했는데.."

"전혀. 그건 보편적인 행복이지."

아시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가족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해. 나한테는 누구보다 소중한 아버지,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랑 기사단의 선배들도 있으니까. 이젠 그들이 내 가족이야.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그리고 아저씨는 나한테 가족을 선물해 주신 분이고."

아시엘이 힘주어 하는 말에 세이라는 놀란듯 눈을 깜빡이다 곧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는 재밌는 사람이에요. 내일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말씀 드려야지! 그리고 이그니스 님의 은총을 빌어 줄게요."

"그거 고맙네."

아시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이라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듯 다시 히히 소리내서 웃었다.

꺼진 모닥불 자리에서 흰 연기가 오르는 것을 멍하니 응시하던 아시엘은 고개를 들어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아침 하늘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느긋하게 구름 한 점이 동동 바람을 따라 떠갔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묵직한 왼쪽 어깨를 보았다. 세이라가 자신에게 기대어 푹 자고 있었다. 늦게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세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곧 아시엘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쿨쿨 잠들어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아시엘은 멍하니 밤하늘을 구경하며 날이 밝도록 모닥불을 지켰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세이라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여전히 뻗어서 자고 있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상-! 일하러 갈 시간이에요. 다들 일어나요!"

"으어어?"

세 사람은 비몽사몽 간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팅팅 부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미 밝아진 하늘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팔짱을 낀채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뭐야... 나 안 깨웠어? 왜 벌써 아침이야?"

케빈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는 말에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요. 밥이나 먹고 얼른 출발해요. 세이라도 일어나!"

"엄마도 아니고."

카이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야흐로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아침식사 역시 카이스의 호화로운 요리로 배를 채운 그들은 곧장 짐을 챙기고 말들을 묶어둔 곳으로 갔다. 밤새도록 푹 쉬고 배도 채운 말들은 기분이 좋은듯 머리를 두어번 휘저으며 주인들을 반겼다. 단 한 사람, 아시엘만은 점점 굳어가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하얀 말 앞에 섰다. 그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아시엘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시엘 역시 긴장된 얼굴로 말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이 푸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털었다. 아시엘은 기분이 묘해졌다. 어째 비웃음 당한 느낌인데.

"제대로 얕보였네."

"굳이 말 안해줘도 알거든요?"

오스카가 놀리듯 하는 말에 아시엘은 울적하게 대꾸하고 백마의 등에 올랐다. 다른 이들 역시 말에 탔고 세이라는 카이스의 앞에 자리잡았다. 모두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케빈은 가장 먼저 박차를 가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뒤를 카이스가 따랐고, 오스카 역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몰았다. 아시엘은 잠깐 심호흡을 하고, 말의 배를 걷어찼다.

"가자!"

처음에는 역시 삐끗했지만, 그래도 일행은 나름대로 순조롭게 벌판을 달렸다. 어느 정도 속도에 익숙해지자, 묵묵히 있던 세이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시엘 오빠는 말 엄청 못 타네요!"

"콜록!"

난데없이 돌직구를 맞은 아시엘은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가 한참동안 대꾸도 못하고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것을 안쓰럽게 보던 오스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못하는거 한두 개쯤은 있어야지. 마법 연습하다 승마를 못하게 됐다고 쳐, 그냥."

"시끄러워요, 선배!"

아시엘이 빽 고함을 치자 카이스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뒤이어 세이라와 오스카도 낄낄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완전히 참담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웃음기를 겨우 삼킨 케빈이 그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괜찮아. 승마가 약점인 마검사 기사라니, 넌 기사서의 새로운 획을 그은 거라고."

".....이익..!"

곧이어 아시엘이 뭐라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악악거렸지만 일행은 재밌다는듯 빙글빙글거리기만 했다. 물론 이것도 그가 말 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시엘의 말은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넷 다 나중에 봐요, 진짜아아악!"

그것이 아시엘이 남긴 마지막 마디였다. 그것을 끝으로 그의 말이 신나게 앞으로 두두두 뛰쳐나갔고 소년의 끝을 맻지 못한 비명소리가 찢어지게 울려퍼졌다.

그들이 하루 종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제복 덕분에 어렵잖게 성문을 통과한 그들은 곧장 큰길가로 나서서 말을 천천히 몰았다. 다행히 아시엘의 말도 지쳤는지 고분고분히 그들을 따라 걸어주었다.

수도와 가까운 영지라 꽤 관리가 잘 된듯했다. 외곽의 마을이지만 길은 평평하게 잘 다져져 있었고 민가 역시 낡았지만 깔끔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지나가는 아이들 역시 모두 깔깔 즐겁게 웃으며 앞치락 뒤치락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시엘이 언제나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카이스의 앞에 앉아 있던 세이라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엄마!"

"세이라?"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 앞에서 볕 드는 곳에 빨래를 널던 한 여성이 놀란듯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일행은 시선을 교환하고 말을 세웠고, 세이라는 당장에 뛰어내려 제 어머니에게 우다다다 달려가 폭 안겼다.

"세이라, 어떻게 된 거야?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저 오빠들이 데려다 줬어! 셀레니스 기사단이래! 굉장하지?"

세이라가 조잘조잘거리자 여성은 고개를 들어 네 사람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저희 아이가 민폐라도 끼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 아닙니다. 그저, 조금 곤란해 보여서."

오스카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묘한 위화감을 느낀 아시엘은 살짝 눈썹을 휘었고 같은 것을 눈치챈 케빈과 카이스 역시 얼굴을 조금 굳혔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세이라의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은 채 밝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겠어요? 지금 집에 바깥사람이 나가고 없어서 대접할게 그것밖에 없네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희도 이만 가야 할것 같아서요."

케빈이 허둥지둥 손을 내젓자 그녀는 진정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이라는 오빠들 가는 거야? 하고 울상이 되었다.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야."

아시엘의 말에 그녀는 활짝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금 렌의 말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몰라요-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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