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77화 (17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6. 유령이 나오는 영지(4)

세이라와 작별하고, 그들은 말없이 길을 따라가 마을을 빠져나왔다. 다른 마을도 몇몇 나왔지만 거치지 않고 네 사람은 계속 침묵하고 말을 몰았다. 먼 곳에  후카덴 백작의 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케빈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렇지?"

오스카도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선배들의 생각에 아시엘 역시 동의했다. 세이라가 있던 곳은 말을 타고도 마을에서 반나절 넘게 걸리는 황야, 그것도 몬스터들이 상습적으로 출몰하는 위험 지대였다. 정상적으로는 아이가 그런 곳에 혼자 간다고 한다면 때려서라도 말려야 하는 것이 어른이었다.

하지만 성벽을 지키던 병사는 그들과 함께 있는 세이라를 보자마자 '벌써 끝났어?' 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빨리 왔구나' 가 다였다.  결국, 세이라가 그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도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었고, 어쩌면 약초를 캐 달라며 직접 부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죠? 그렇다고 세이라를 미워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언뜻 보기엔 문제가 전혀 없었지만."

카이스까지 덧붙이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 네 사람은 마침 누군가가 나타나는 바람에 대화를 멈춰야만 했다.

"실례지만 셀레니스 기사단 여러분, 맞으십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 앞에 나섰다. 말끔한 하인의 옷을 입은, 50쯤 된 중년의 남자였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고 말을 세웠다(아시엘은 카이스가 고삐를 잡고 세워주었다).

"그렇다만. 그쪽은?"

"저는 베스토라 합니다. 후카덴 백작께서 보내셨습니다. 기사님들을 성까지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케빈이 묻자 그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괜찮으시다면 말은 근처에 맡겨두고,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시지요. 나중에 아랫것에게 명해 성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

일행은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베스토는 여전히 미소지은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케빈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말에서 내렸다. 아시엘과 카이스,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는건 문제가 없지만. 어째서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스카의 물음에 베스토는 조용하게 답했다. 일행은 더더욱 의아해져 눈을 깜빡였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근처 민가에 말을 맡긴 그들은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희 영지는,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잘 지낸다고 자부할수 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땅이 좋아 건강하고 튼튼한 농작물이 많이 수확됩니다. 사람들 역시 순하고, 서로 시기하지 않으며 싸우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신 후카덴 백작님 덕분에 이곳은 정치적 분쟁도 닿지 않는 곳이지요."

"보통 중립이라면 회유하기 위해서 더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나요? 대공 측이나, 저희나요."

아시엘의 말에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그런 곳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있어. 중립파 귀족 중에서도 어느 편을 들까, 눈치를 보고 있는 자들은 언제 누구의 쪽으로 돌아설지 모르기 때문에 양쪽 다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지만 후카덴 백작 같은 경우는 좀 달라. 분쟁에 끼어드는 것 자체를 꺼려하니까 경계할 필요가 없지. 물론 언제든지 저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대공 전하나 우리 황제 폐하나 섯불리 움직이지는 못해."

"왜요?"

"괜히 나섰다가 미움을 사면 큰일이니까. 무리하게 싸움에 끌어들이려고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만약에 대공 전하가 이쪽을 회유하려고 문제를 일으키면 백작은 화가 나서 우리 편으로 올지도 모르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흐음- 소리를 내며 아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셀레니스에 지원을 요청하신 이유는요? 중립이라면 보통 황제 폐하의 측근인 저희를 불러들이는 것도 꽤 모험 아니에요?"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겁니다, 기사님."

미소를 머금고 있던 베스토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작게 말했다.

"유령 소동 때문이라고 하긴 했지만..... 혹시 오시면서 마을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 일단은."

케빈이 애매하게 답했다. 네 사람은 모두 세이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친절하던 그녀의 어머니와,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 역시.

"이미 눈치 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사람들이 조금 이상합니다."

베스토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혹시나 누군가가 들을세라 두려워하는것 같았다. 그 위화감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사린 기사들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베스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것은 일단 성으로 가서 설명드리지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일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언제나 일을 몰고 오는 법. 어째 대형 사고의 냄새가 나는것 같았다.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오지 말걸!' 단 하나였다.

정말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기며, 그들이 본 것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가들이었다. 거의 다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 흔한 가게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마을이었다. 아이들의 입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고 어른들도 다같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영주님이 좋으신 분인가봐요. 하나같이 평안해 보여요."

"네. 영주님은 언제나 영지민을 생각하시는, 요즘 보기 드문 귀족분이십니다. 다른 곳들보다 세금도 훨씬 가볍고, 타 귀족이나 관리들의 수탈도 없지요."

베스토가 자랑스럽게 말했고 카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눈에 불에 타서 뼈만 시커멓게 남은 집 한채가 들어왔다.

".... 저기는?"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이번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대체 뭐길래, 하고 묻고 싶었지만 베스토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카이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깔깔거리는 꼬맹이들이 우다다다 뛰어 그들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눈물도 없고 영지민들은 그저 행복하게만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한 오스카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여긴 지상낙원이라도 되는 거야? 지나치게 활기찬데. 모두 다 웃고만 있어."

"혼나는 아이들도 없고, 슬퍼하는 노인도 없지요. 이곳이 이렇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랍니다. 자, 어서 가시죠."

그들은 쉬지 않고 걸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고, 꽤 수려한 외견에 아시엘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케빈이 픽 웃으며 그의 이마를 톡, 때렸다.

"넌 뭐가 그렇게 흥미롭냐? 황성에서 지내는 주제에 이런 촌딱 성에 감탄하면 어쩌자는 거야."

"뭐 어때요."

아시엘이 볼멘소리로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베스토와 이야기를 마친 병사가 성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투박한 나무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정원 역시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수수한 분수대에서 깨끗한 물이 퐁퐁 솟아올랐고 나무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일행은 주변을 구경하며 빠르게 정원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하시겠지만 일단 영주님을 뵙고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우리 체력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가기나 해."

케빈이 손을 내젓자 베스토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 하녀들이 지나가면서 일행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들 밖의 영지민들과 마찬가지였다. 기이할 정도로 활기차고 밝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있으려니 기분이 점점 묘해졌다. 아시엘은 살짝 청력을 돋워 성 내의 사용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사적으로 하는 잡담들에도 푸념이나 투덜거림 같은 것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때, 귀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가 그의 귀에 잡혔다.

'집회?'

아시엘은 인상을 쓰고 더 자세히 들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턱 얹는 느낌에 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 놀랐어? 미안."

"카이...."

머쓱하게 카이스가 뒷머리를 긁적이자 아시엘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이스는 고갯짓으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자고. 세 번이나 말했어."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다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고개를 털어낸 아시엘은 카이스와 함께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스카와 먼저 들어가 있던 케빈이 고개를 돌리며 핀잔을 주었다.

"왜 이제 들어오는 거야. 무슨 문제 있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시엘은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이듯 대꾸하고 눈앞의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뱃살과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 꽤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은 조금 창백했고 이마엔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백작인가- 아시엘은 직감했다. 그는 베스토가 집무실의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부족하나마 이 지방을 다스리고 있는 헤일 드 후카덴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스카,이쪽은 케빈 그리고 아시엘,카이스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단순한 귀신 소동이 아니라는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백작은 손수건으로 축축한 이마를 닦아냈다.

"후우... 죄송합니다. 제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마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주제에 염치 없이 지원을 요청한 것은 생각보다 상황이, 후우,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건데?"

케빈의 재촉에 그는 다시 한숨을 짧게 내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한 3년쯤 전이었던가, 저희 영지에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습니다.이 지방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이방인들이었지요. 일은 그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조용히 지내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어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며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종 종교인가 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들어오더니 신전을 하나 세웠습니다. 불의 신, 이그니스를 모시는 신전을요."

네 사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세이라를 떠올리고 있었다. 혼자 황야에 나서면서도 전혀 위기 의식이 없었던 소녀와 그 부모를.

"그러더니 영지민들이 하나 둘 그 신전에 나가기 시작하더군요.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점점 늘더니 개중에는 원래 믿던 신조차 버리고 이그니스 교단에 합류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채 석 달이 안 되어 우리 영지에 있던 다른 신전들은 망해 버리고 사람들은 모두 이그니스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저희 마누라 까지도요.

무슨 수를 쓴 건지 신앙은 점점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해갔습니다. 제가 문제를 깨달은 것도 이 때였지요. 처음에 포교를 하던 남녀가 성에 찾아와 헌금이란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습니다만 나중에 들으니 그때  저와 함께 있던 안사람이 몰래 그들을 불러들여 돈을 내주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원래 안사람은 검소함을 생활의 미덕으로 삼고 지내는 사람이었습니다만 후에 그 일로 다그치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그니스 님이 쓰실 돈이니 괜찮다, 라고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

전 이그니스 교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불의 신을 모신다, 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읋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의 하인들까지도 그 교단의 독실한 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해하고 자랑스러워 했지만 교단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 그들은 교단을 믿지 않는 자는 이단으로 간주해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영주인 제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근처의 어느 민가에 크게 불이 났지요. 그 때 집 안에는 일가족이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구하려 하지 않았어요. 진정으로 죄가 없다면 이그니스 님이 그들을 살려줄 거라고. 결국 집 안에 있던 어린아이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불과 이 주일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

네 사람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동안 허공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작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부모는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죽음에 큰 슬픔을 표하지는 않았죠. 안타까워 했지만 평소에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내린 벌이라 여길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아이는 신전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더군요. 겨우 8살 남짓한 꼬마애가 그런 종교 생활에 흥미를 가질 리가 없지요."

".... 왜 이제야 지원 요청을 한거야."

케빈이 아연하게 중얼거리자 후카덴 백작은 쓰게 웃었다.

"그 문제로 기사들을 불러들였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폭동이 일어날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 근처 골목길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것을 듣고 그 핑계로 여러분을 모신 겁니다."

"그럼 그 유령 건은 어떻게 된 거에요?"

잠자코 있던 아시엘이 입을 열었다.백작은 땀을 다시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입니다. 인적이 드문 길에 유령이 나타나 배회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실제로 봤다는 사람들도 여럿 있고 이상한 소리를 들은 자들도 있다 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이그니스 교의 소행 같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서 신이 노하셨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 그럼 결국 우리 임무는."

유령을 잡는 척 하면서 그 사이비 이교도 집단을 낚아채는것.

오스카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야. 네 사람은 일제히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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