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78화 (17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7. 유령 잡기(1)

"하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유령 소동이라고 해서 무슨 이런걸 셀레니스에 지원 요청을 했나, 라며 어이없어 했던게 바로 며칠 전이었건만 이제 그냥 꺼림직했던 일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져 버렸다. 케빈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헤집고 루이카엔과 막 통신을 끝낸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야, 녀석이 뭐래?"

"조사해 본다고 하시네요. 하지만 이그니스 교라니, 전 들어 본적도 없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요? 3년도 안 되서 영지를 장악하고 영주를 고립시키다니."

아시엘은 귀걸이에서 손을 떼며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보고받은 루이카엔 역시 뭐야, 그게? 라며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받은 임무를 물릴 수도 없었고 철수하기도 곤란했다. 혹시라도 백작이 마음을 돌려 대공 쪽으로 간다면 이만저만 손실이 큰 것이 아니었다. 오스카는 골치가 아파져 뒷목을 주물렀다.

"일단 그 유령부터 해결해야겠네. 다른 방법이 없어."

"하지만 이미 마을 사람들은 그 신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있는데 교단에 손 대기는 조금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묵묵히 있던 카이스가 입을 열자 다시금 막막한 현실을 인식한 그들은 하아아-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작의 집무실에서 나온 뒤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자고 케빈의 방에 모였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방 안에 침묵이 흐르고, 아시엘이 내키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어찌되든 부딪혀는 봐야지. 어쩌면 영지민 전체랑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만요."

"역시 생긴 거랑 다르게 제일 남자답다니까... 솔직히 난 엄두도 안 나는데."

케빈은 투덜거리며 애꿎은 카펫을 꾹꾹 짓밟았다.

"일이 어떻게 커질지 몰라. 그 빌어먹을 교단 쪽에서 영지민들을 움직이면 우린 옴짝달싹도 못한다고. 그쪽에선 우리가 신이랑 한판 뜰려는 걸로 보일거 아냐."

"알게 뭐에요. 일단 겉으로 우린 그냥 귀신 퇴치하러 온 것 뿐이라구요.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죠, 뭐."

아시엘은 아까 베스토에게 넘겨받은 지도를 펼쳤다. 영 의욕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 사람은 그에게로 밍기적 밍기적 다가가 지도를 둘러싸고 앉았다.

영지 전체를 그려놓은 지도에는 세세한 골목길과 광장, 몇 안되는 상점까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오스카가 종이 위 한 지점에 손을 짚었다.

"그 유령 녀석이 나타나는게 이 부근이랬지?"

"네. 거기서부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펜을 집어든 아시엘은 오스카의 손이 닿았던 곳부터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이 나타났던게 이쪽 골목길에서 광장까지 이어지는 곳이에요. 이 사이에는 강이 있고. 간간히 다른 곳에도 출몰하는 모양이지만 여기가 제일 잦다고 했었죠?"

"어. 그랬지"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북쪽에 지금 그들이 있는 성이 있고, 영지의 중심에 광장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기준으로 민가들과 길이 펼쳐졌고 그 사이에는 강 하나가 있었다. 유령은 민가가 밀집한 곳의 한 지점에서부터 강을 지나 광장으로 가는 길에 가장 자주 목격된다고 했다. 아시엘이 한 표시는 그것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오스카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하긴, 기겁할 만도 하겠네. 사람 사는 곳에서부터 돌아다닌다니... 일단 해야 할 일은 그건가."

"유령 잡기죠. 원래 미끼를 물고 따라가면 낚시꾼이 나타나는 법이니까."

아시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케빈은 어이가 없어져 실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방에 처박혀 있는 게 성미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을 탁탁 털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아. 그러면 셀레니스 방식대로 가 볼까? 답이 안 나올땐 그게 짱이지."

"그렇죠."

가만히 있던 카이스도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못 말린다는듯 이마를 짚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시엘은 빙그레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절대 무적 최강의 셀레니스 방식. 상대가 뭐든지 간에 일단은 돌격하고 보는 것이었다.

일단 늦은 저녁이 되길 기다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성을 나섰다. 옷을 가져다준 베스토가 '벌써 나가십니까? 내일부터 하지 않으시고요?' 라며 황당해했지만 움직이기로 결정한 이상 늦장부릴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곧장 유령이 자주 출몰한다는 그 골목길로 향했다. 그 유령 때문인지 민가가 모여있었지만 그들 외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전적인 방법으로 가죠. 우선 그 유령 녀석부터 처리해야 하니까."

"아직 나온다는 시간까지 좀 남았지? 그럼 흩어져서 잠복하자. 루트는 나름 한정되있는 모양이니까 잘 하면 붙잡을수 있겠지."

아시엘의 말에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케빈과 카이스 역시 이의는 없었다. 아시엘은 아까 본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스카 선배가 골목길 안쪽, 케빈 선배가 오른쪽 구역, 카이가 왼쪽을 하면 되겠네요. 제가 골목길 바깥쪽에서 대기할 테니까 나중에 다같이 합류해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니까"

"오냐. 광장까진 안 간다고 그랬으니까 그렇게 포위하는 것처럼 서 있으면 놓치진 않을 거야."

케빈은 낡은 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나머지 이들 역시 눈에 띄지 않는 허름한 옷들을 여미고 무기를 점검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각자가 맡은 곳으로 흩어졌다.

말은 그렇게 쉽게 했지만-  푹 눌러쓴 망토 끝을 만지작거리며 오스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지점에서 몸을 숨기고 앉아 대기한지 1시간여가 지나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이라고는 발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유령이 진짜 죽은 사람의 혼백일 리는 없으니 무슨 장치라도 발견되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럴 낌새는 조금도, 아주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하필면 날씨도 좋지 않았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 덕분에 사위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집 안에 틀어박혔는지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낮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활기찼는데도. 확실히 '희' 만 가진 사람들은 아름답지 못했다. 분노와 슬픔을 알아야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알 수 있는 법. 억지로 만들어진 기쁨은 전혀 빛나지 않았다.

어쨌든 기분 나쁜 동네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전에는 분명 진정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영지였을 터였다. 고작 3년 만에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바꿀 수 있는게 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혼자 외따로이 남겨져 있을 아시엘과 카이스에 대한 걱정이 슬슬 들기 시작했을 때- 부스럭.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오스카는 곧장 몸을 벌떡 일으키고 주변을 살폈다. 골목길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잠깐 근처에서 얼쩡이다 사라진 기척을, 그는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 그를 놀리듯 2미터쯤 떨어진 곳에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

정체불명의 새파란 빛이 갑자기 오스카의 머리보다 높은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가 딱딱하게 굳어져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사이, 그것은 오스카의 반대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앗, 젠장!"

오스카는 당장에 그것을 쫓았다. 나름 전속력을 다했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마치 도깨비불 처럼 어둠 속에서 홀로 일렁이는 빛의 무리- 오스카는 혀를 찼다. 그 푸르스름한 빛 속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방향을 틀자 오스카는 크게 외쳤다.

"야, 케빈! 그쪽으로 간다!"

"오케이!"

먼 곳에서 케빈의 답이 들려왔다. 오스카는 빛을 따라 계속해서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를 지키던 케빈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황해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저거!"

"낸들 아냐! 카이스! 이쪽이야, 케빈이 있는 쪽으로 와!"

오스카는 사납게 쏘아붙이며 다른 곳에 대기중인 케빈에게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질렀다. 그때, 갑자기 유령이 아까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훌쩍 위로 뛰어오르더니 담장 너머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야, 쫒아! 카이스, 네 쪽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카이스의 답이 돌아오고, 두 사람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저게 뭐야, 소리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케빈과 오스카는 똑같이 당황하고 있었다. 저게 만약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었다. 담장을 한번에 훌쩍 넘어버리다니,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장치를 한 거라고 치기에는 목표물의 움직임이 너무 자유분방했다.

시선을 교환하고, 그들은 방향을 틀어 유령이 향했던 쪽으로 달렸다. 한적한 골목길은 두 사내의 발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푸른색 빛은 다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놓친 건가, 하고 케빈이 허탈하게 멈춰 섰을때 근처에서 카이스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입니다! 지금 아시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 잘했어!"

오스카와 케빈은 곧장 몸을 돌려 골목의 끝, 아시엘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골목 두 개가 합쳐지는 지점에서 유령과 그 뒤를 쫒는 카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 서!"

케빈이 소리질렀지만 그런다고 멈출 리가 없었다. 세 사람은 말도 잊고 빛을 따라 있는 힘껏 달렸다. 맞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세게 때리고 머리칼을 헝크러트렸지만 무시했다.

"젠장! 뭐가 저렇게 빨라?"

시야를 가리는 후드를 벗어버리며 케빈이 이를 악물었다. 저건 살아있는 건가, 아니면 광범위한 환영 마법이라도 되는 건가. 오스카 역시 거칠게 혀를 찼다. 그때, 놈이 급하게 방향을 틀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령이 향한 곳은 바로, 아시엘이 대기하고 있는 골목의 바깥쪽이었다.

이미 밖에서 상황을 다 듣고 있던 아시엘은 푸르스름한 빛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곧바로 그 뒤를 쫒았다. 덕분에 그것과 거리를 좁힌 아시엘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빨리 달렸다.

"귀신 주제에 더럽게 빠르네!"

그는 가속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순간에도 유령의 그림자는 광장 쪽으로 가는 길로 유유히 멀어지고 있었다. 아시엘은 주문을 영창하고 시동어를 외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으로 내딛은 발이 앞으로 쑥 빠졌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 그의 몸은 앞으로 확 고꾸라졌고, 바야흐로 풍덩! 하는 물소리가 어둔 밤거리에 크게 울려퍼졌다. 뒤에서 그를 따르던 세 사람은 기겁했다.

"으악, 아시엘!"

"저 바보가!"

누가 먼저랄것 없이 그들은 곧장 강 쪽으로 뛰어갔다. 그랬다. 그들이 유령이 추격전을 벌이던 곳은 민가가 드물어지고 마을과 광장 사이에 끼인 구간- 즉 강과도 가까운 장소였다. 다행히 그리 깊은 곳은 아니었는지, 쫄딱 젖은 채로 아시엘은 얕은 물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강이 있다는걸 깜빡했어요..."

묘하게 고요해진 주변에 아시엘이 애써 웃으며 말하는 애처로운 목소리와 그의 몸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똑똑 떨어지는 미미한 소음만이 감돌았다. 푸른 색의 유령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아아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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