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79화 (179/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68. 유령 잡기(2)

결국 그들은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유령'이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린데다 차가워지는 새벽 공기에 아시엘이 재체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새벽 4시경, 넷은 다시 아시엘의 방에 집합했다.

"죄송해요, 제가 바보짓 해서 놓쳐버렸네요."

샤워를 하고 나온 아시엘은 침대에 걸터앉아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카이스가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친구의 금발을 탈탈 닦아주기 시작했다.

"네 탓이 아니잖아. 신경쓰지 마."

"카이스 말이 맞아. 어차피 그대로 쫓아가 봤자 붙잡지는 못했을걸."

오스카는 테이블 위의 지도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정확히 표식을 한 곳에서 유령이 갑자기 나타났고 그가 뒤를 쫓기 시작하자 곧장 무시무시한 속도로 도망쳤다. 케빈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유령 같은게 아니지? 그거. 그렇다고 무슨 장치를 쓴 것 같지도 않아."

"제 생각도 그래요. 우리에게서 도망친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오히려 살아있는 뭔가라고 하는게 맞는것 같아요."

카이스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던 아시엘이 눈을 감은 채로 나른하게 말했다. 케빈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늘은 무리인것 같으니까 내일 하자. 도착한지도 얼마 안 됐고 아시엘 넌 어젯밤도 거의 새다시피 했지 않냐? 불침번 서다 쿨쿨 팔자 좋게 잠든 오스카 덕분에."

"아. 알고 계셨어요?"

"그럼 모를 거라고 생각했냐."

케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는 아시엘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때렸다. 옆에서 오스카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는 저는 아침까지 잘 퍼자고 있었으면서. 애초에 아시엘,너도 일어났으면 나 깨우지 그랬어. 하다못해 교대라도  하던가."

"이미 안 듣고 있는것 같은데요."

조용히 있던 카이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는 눈짓으로 자신의 손에 머리를 폭 기대고 있는 아시엘을 가리켰다. 피곤하기도 하고 물에 빠지는 봉변까지 당한 후에 따뜻하게 씻고 나오니 꽤나 몸이 풀린 모양이었다. 거가다 머리를 살살 닦아주는 친구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는지 그는 그새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오스카는 어이가 없어져 픽 웃음을 터뜨렸다.

"빠르기도 하다, 참. 누가 어린애 아니랄까 봐."

"이럴 땐 진짜 그냥 꼬맹인데 말이야.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케빈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카이스는 아시엘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배게까지 머리에 받쳐준 그는 몸을 돌려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저희도 이만 나가죠."

"오냐. 내일 아침식사때 보자고."

케빈은 몸을 슥 일으키고 손을 흔들었다. 오스카 역시 고생한 막내의 수면을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스는 랜턴의 불을 끄고 선배들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탁, 방의 문이 살짝 닫혔다. 카이스의 방은 아시엘의 바로 옆이라 먼저 들어가게 했다.이미 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새벽, 하인들조차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 케빈과 오스카는 나란히 깜깜한 복도를 걸었다. 자신의 발소리만 들릴 뿐인 고요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케빈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가족이란 말이지. 이거 루이카엔이 알면 기뻐하겠는데."

"무슨 소리야?"

"네놈이 꿈나라에 가 있을 적 이야기."

오스카가 의아하게 묻는 말에 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사실 전날 밤 그는 소년과 소녀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살짝 잠이 깼었다. 잠결에 어렴풋이 들려온 특유의 미성은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롭지 않다고. 그것이 아마도 이때까지 거의 보여주지 않은  그의 소중한 진심일 터였다.

혼자 실실 웃는 케빈을 쏘아본 오스카는 곧 포기하고 끙, 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나저나 역시 어려서 그런가, 체력적인 한계는 감출 수가 없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둘 다 너나 나보다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말이야. 이번 일은 보통이 아닐것 같은데 괜찮을까?"

"야, 오스카. 너 아직 아시엘이랑 일 나가본적 없지?"

케빈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스카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쾌활하게 덧붙였다.

"네가 아는 아시엘이 3이라면, 실전 중 아시엘은 10이야. 괜히 루이스 경의 아들에 리틀 루이카엔이 아니라고. 거기다 카이스까지 붙어 있으니까."

"뭐?"

"두고 보면 알거야. 장담할수 있어."

케빈은 킬킬거리며 오스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침은 누구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비어버린것 같던 영주성도 태양을 따라 다시 활기를 띄었고 간밤의 침묵이 거짓말인 것처럼 여기저기에서 조잘대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열린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볕에 아시엘은 살짝 눈을 떴다. 내가 언제 잠들었더라- 몽롱한 와중에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곧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나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방 밖으로 나섰다.

아직은 조금 이른 8시. 복도는 일과를 시작하는 하인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저들 모두가 다 신자들인가 - 아시엘은 곧 얼굴을 이렇게 드러내도 괜찮은지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미 전날 도착했을 때 맨얼굴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건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방으로 돌아가 깨끗한 후드 망토 하나를 두르고 다시 나왔다.

아시엘은 멀리 가기 전 카이스의 방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잠들어 있는지 안에서는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케빈, 오스카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두 사람 방 앞에 선 그는 다시 안의 소리를 들어보고 오스카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선배, 일어나셨어요?"

"아... 들어와."

안에서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시엘은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듯 오스카는 비몽사몽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시엘은 그 곁의 조금 높은 의자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선배."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오스카는 마른 세수를 하며 크게 하품을 쩍 했다.

"카이랑 케빈 선배는 아직 자는것 같아서요. 밖에 나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안 가실래요?"

"밖? 왜?"

"사람들 분위기도 살필 겸, 어젯밤에 그 난리를 친 유령 녀석의 흔적이 남아있는지도 알아볼 겸요. 아직 몇 시간 안 지났으니까 일단 나가보면 무슨 단서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혼자 가려니까 혹시라더 시비 붙을까봐 좀 그래서요."

"아아..."

오스카는 다시 하품을 크게 하고 엉망이 된 자신의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곧 몸을 벌떡 일으켜 아시엘의 머리를 꾸욱 눌러주었다.

"준비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네에."

아시엘은 쿡쿡 웃었다. 셀레니스 기사단에서 아시엘이 제일 어리고 그것 때문에 어린애 취급 받는 일은 허다했지만 저 오스카는 때때로 그를 진짜 꼬마 대하듯 하고는 했다. 아시엘은 그런 오스카가 재미있었다. 즐긴다는 시점에서 이미 애라고 할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카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하품을 하며 돌아왔다. 아시엘은 그에게 후드를 건넸다.

"여기요."

"응? 이건 왜?"

"지금 상황 상, 얼굴은 최대한 안 보이는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성 안에서도 그렇고."

그의 말에 오스카는 대충 납득하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시엘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씨익 미소지었다.

"자, 그럼 가볼까요? 조사. 아침식사는 나가서 대충 해요."

"정말 무시무시한 행동력이네."

오스카는 어이가 없어져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시엘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앞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하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성에서 나왔다. 다행히도 사용인들은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손님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별 일 없이 바깥으로 나온 후, 오스카는 한참 아래에 있는 아시엘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려고?"

"어젯밤에 갔던 골목길이요."

아시엘은 사람들을 헤치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거리는 전날 밤의 고요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찼다. 인구가 적도 여행자도 없는 영지였지만 활력만큼은 수도 헤크란 못지않았다. 바구니를 안고 종종걸음을 치는 꼬마애들과 서로의 집에 있던 물건을 바꾸는 여자들, 소와 말을 끌고 밭으로 가는 소년들. 아시엘의 또래쯤 되는 소년 하나를 무심코 눈여겨보던 오스카는 다시 시선을 옮겨 아시엘을 보았다.

외모로 보면 아시엘 쪽이 훨씬 어려보였지만 분위기는 그 반대였다. 성숙한듯 하면서도 아직 어린 티는 벗지 못해 천진하게 친구들과 조잘거리는 평범한 소년과, 어린듯 하면서도 어른스러운 아시엘. 아니 이 녀석의 경우는 딱히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오스카는 생각했다. 그래봤자 16살 어린애에 불과하지만.

"이 근처였던가."

그는 갑자기 아시엘이 발을 멈추자 덩달아 그 자리에 섰다. 어느새 그들은 광장과 민가 사이에 있는 작은 강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시엘이 물에 빠지고 그 귀신을 놓쳐버렸던 장소였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라도 알아보게?"

"아뇨. 그건 대충 예상하고는 있어요."

오스카가 건성으로 묻는 말에 대꾸하며 아시엘은 주변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맑은 강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고 북쪽은 광장, 남쪽은 민가. 강에는 마을에서 바로 광장으로 건널수 있도록 징검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역시, 아무리 유령이라도 물 위를 그냥 건너지는 못했나 보네요."

"그러게. 이런데 징검다리가 있었구나."

오스카는 다리로 다가가 돌을 툭툭 걷어찼다. 아시엘은 쭈그려 앉아 흙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골목 쪽으로 들어가봐요."

"그래."

두 사람은 민가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논밭의 안쪽에 집이 한데 모여서 만들어진 좁은 길들을 걸으며 아시엘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전날의 어둡고 음습한 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이 곳 역시 새로 찾아온 봄처럼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녀자들은 빨래를 널며 이웃과 수다를 떨었고 그 아이들은 옆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다. 고작 몇 시간 차이일 뿐인데도 그 차이는 엄청났다.

".... 진짜 너무 밝아서 되려 무서울 지경이야."

"그러게요. 어젠 인기척 하나도 안 느껴지더니."

오스카의 말에 아시엘 역시 동의했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무대 위의 인형들이 인형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즐겁게 춤추는 인형이지만 손과 발은 무대 뒤의 실에 결박되어 있는. 물론 그 실의 끝은 이그니스 교단이 쥐고 있었다. 주변을 의식한 오스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정도 위화감이면 보통 사람들은 이미 골백번은 눈치 챘을텐데 어떻게 외부인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었지?"

"보통의 포교 활동은 아니었겠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이랑 이야기는 나눠봐야 알겠죠?"

"뭐? 잠깐-"

그가 기겁하며 말리려 했지만 아시엘은 이미 근처의 집 마당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거야,

오스카가 아연해하는 것도 무시하고 아시엘은 마당에 약초를 양지바른 곳에 펼치고 있는 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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