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0. 의외의 전개(1)
더 이상의 수색은 없었다. 오스카와 아시엘은 10시쯤 성으로 느긋하게 돌아가 케빈과 카이스에게 그날의 소득을 전했다. 그 뒤로는 노닥거림의 연속이었다. 베스토와 백작이 간간히 일 안하십니까, 하고 눈치를 줬지만 네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 이그니스 교에 대해서 조사해 본다던 루이카엔이 연락을 해 왔다.
"그쪽으론 전혀 정보가 없다고요?"
[어어. 여러 방면으로 뒤져보긴 했는데 코털만큼도 안 보여. 교단 연합 측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고. 역시 몇 놈이 짜고 치는 사기인것 같은데.]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아시엘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베스토에게서 뜯어낸 과자를 아삭아삭 씹었다.
"그나저나 진짜 종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통째로 홀렸을까요?"
[내가 아냐. 그리고 원래 사람들한텐 사이비가 더 매력적인 법이야. 고행이니 뭐니 하는 고리타분한 것들 쏙 빼고 사람들한테 좋아보이는 거, 혹할 만한 것들만 내밀면 되니까.뭐.... 믿기만 하면 구원해 준다던지.]
"그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것 같아요. 백작 이야기로는 그 놈들 목적이 돈인것 같으니까... 어떻게 하면 신도들이 제 발로 돈을 갖다바치게 할 수 있냐는 거죠."
[그건 너네가 알아봐야지. 어쨌든 수고해. 만만찮은 일이니까 상황 바뀌면 그때그때 보고 부탁해. 마음 같아선 지원 보내주고 싶지만 사방이 감시자인 모양이니까 그것도 곤란하겠지?]
"네. 어떻게든 저희끼리 해 볼게요."
[뭐하면 너도 신도 무리에 끼어보던가. 같이 낚여서 찬양하다 보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지.]
"됐거든요."
루이카엔이 농담조로 건네는 말에 아시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일 떠넘긴 사람이 그런 말 하는건 아니지 않아요? 유령 소동만 해결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게 뭐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무래도 넌 일을 몰고 다니는 스타일인가 봐. 그냥 네 팔자려니 해.]
"루이카엔 씨!"
결국 그가 바락 소리를 지르자 루이카엔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너도 바쁠 테니, 이만 끊자. 수고해. 조심하고.]
"네에."
아시엘은 불퉁하게 대답하고 귀걸이에서 손을 뗐다. 희미하게 빛나던 붉은 장식이 원래의 색깔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이 허락하기도 전 문이 벌컥 열리고 사복을 입은 일행이 들어왔다.
"연락 끝났어?"
"네, 금방요. 슬슬 나갈 시간이네요."
오스카에게 간단히 대꾸한 아시엘은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으그그- 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한쪽에 걸쳐둔 허름한 망토를 두른 그는 카이스, 케빈, 오스카를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그럼 일하러 가죠!"
거리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낮과는 판이하게 다른 침묵의 시간. 희미한 달빛만이 영지를 어렴풋이나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중, 골목길의 어느 지점에서 부스럭 하는 기척이 들리더니 푸르스름한 빛덩어리 하나가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는듯 그 자리에 서있던 그것은 곧 유유히 골목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담장 위에 훌쩍 뛰어올라가기도 하며 유령은 갈길을 재촉했다. 강에 다다라서는 잠깐 주춤했지만 곧 폴짝 뛰어 징검다리를 밟았다. 그때, 푸른색 빛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곧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는 계속해서 징검다리를 통통 건너 어둠에 잠긴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맛있는 냄새를 따라 분수대 쪽으로 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의 품에 쏙 안겼다. 그리고-
"잡았- 다."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후다다닥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번쩍 들려 안기고 말았다. 기겁한 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누군가의 억센 손에 뒷덜미를 덥썩 잡혔다.
"유령 장난 치는 못된 아저씨, 체포!"
"놔! 이게 뭐야, 놓으라고!"
남자가 마구 발버둥을 치자 정체불명의 손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남자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했지만 곧 자신의 주위로 세 사람이 바짝 붙어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아시엘 아르셰인의 특기이자 취미. 일명 '한 놈만 잡아서 족치기' 지."
처음에 그를 붙잡았던 케빈이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걸이가 채워진 고양이를 안고 있는 오스카와 딱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는 카이스. 튀면 바로 작살내버린다, 라고 말하는듯 싱글싱글 웃는 케빈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아시엘. 남자는 이 네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협조 좀 해 주시겠어요?"
".... 이런."
아시엘이 천사같은 얼굴로 밝게 -하지만 살벌하게- 말하자 남자는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네 기사는 그런 그를 붙잡아 일으키고 미리 봐둔 빈 집 하나로 납치, 아니 체포하듯 끌고 들어갔다.
우당탕탕! 사내를 의자에다 냅다 던져버린 케빈은 그 앞의 테이블에 발을 턱 얹었다.
"자. 이제 말해보실까. 이그니스의 본거지가 어디야?"
"선배, 깡패같아요."
아시엘은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오스카는 옆에서 방금 고양이의 목에서 빼낸 목걸이를 살폈다. 고양이의 뒷목 부분에 어른 손톱만한 보석 하나가 붙어있었다.
"고급 영상석이로군.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길고양이의 목걸이에 푸른 빛을 내는 영상석을 달아서 유령 행세를 시키다니."
"주인 없는 길고양이들 목에 목걸이 자국이 있고, 자유 자재로 움직이는 유령이랑 새파란 빛이라면 결국 그것밖에 없죠."
킥킥 아시엘이 웃음소리를 내자 처음보다 훨씬 초췌해진 남자가 그에게 퀭한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알았지?"
"음.... 글쎄요. 고양이들을 보는 순간 감이 왔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이 추측에 불과했어요. 당신을 보아하니 딱 정답인것 같지만."
아시엘이 동료들에게 내놓은 의견은 이랬다. 무슨 목적을 가진 사람이 고양이들을 길들인 거라면? 변덕쟁이의 대명사인 고양이님들은 훈련시키기가 힘들지만 '이 길을 따라가서 광장으로 가면 밥이 있다'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게 그의 말이었다. 오전에 고양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골목길과 광장을 오가는 녀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단 저녁이 되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면 골목길 안쪽에 있는 당신이 길들인 고양이에게 영상석이 달린 목걸이를 채워 재생시킨다. 그리고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녀석을 앞질러서 광장으로 가 있는 거죠. 고양이가 좋아하는 개다래나 고기 같은걸 준비해 두고. 그럼 마음껏 산책을 하던 고양이는 맛있는 냄새와 자신의 기억을 따라서 광장으로 갈 테고, 그쯤 되면 영상석에 저장된 영상이 끝나서 자동적으로 빛은 사라지게 되요. 그리고 당신은 찾아온 고양이들 중 영상석을 단 녀석에게서 목걸이를 회수하고 잽싸게 증거 인멸 후 사라지는 거지.
그런데 어제는 문제가 좀 생겼어요. 우리가 고양이를 쫒는 바람에 녀석이 전속력으로 내달린 거죠. 뭐.. 녀석은 장난쯤으로 생각했겠지만. 영상석은 제때 꺼졌지만 고양이는 평소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우리가 따라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신의 허둥지둥 자리를 뜨느라 흔적을 남기고 말았죠. 캣허브라고 했던가? 분수대에서 그거 몇 조각을 찾아냈어요.
주민들이 말한 '아기 우는 기괴한 소리' 는 결국 고양이 울음소리였던 셈이고. 잘못 들으면 아주 섬뜩할 때가 있잖아요? 그리고 기사들을 따돌릴 정도로 빠르고 기척도 없는 동물은 고양이밖에 없죠."
"......."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시엘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이 동네에 찾아와서 처음으로 이그니스 교를 퍼뜨렸다는 둘 중 하나에요? 아니면 단순한 주민? 고용자? 순순히 말하는게 좋을 걸요. 안그럼 케빈 선배가 매우 혼내준대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주 예쁜 얼굴이었지만 남자는 어째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꼭 독수리를 눈앞에 둔 병아리가 된 기분. 등에는 식은땀까지 주륵 흘렀다. 진짜 깡패같은게 누군데, 하고 오스카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남자는 정보를 술술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그 사기꾼 2인조에게 고용되었을 뿐이고, 이 마을에 몰래 숨어 살면서 고양이로 유령 소동을 벌였다고 했다. 교단에서는 사제 히스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여자랑은 단순한 계약 관계고.. 고향에서 알던 사이였는데 처음에 함께 돈을 벌지 않겠냐면서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그냥 자길 따라만 오면 된다더군요. 그래서 이 마을에 온 겁니다. 사기라는 걸 눈치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집에 병든 노모가 있-"
"집에 병든 노모가 있는데 이런 구석탱이 까지 와서 사기를 쳐요?"
"......"
"옆에서 간호도 안하고?"
"......"
"헛소리 말고 계속해요."
아시엘이 손짓하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과 오스카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저 자리에 앉은게 히스가 아니라 우리였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쨌든... 난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그냥 그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비밀을 지키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 지금 마을 사람들은 어디에 있죠?"
성에서 나오면서 네 사람은 민가를 한 번 둘러보았다. 대충 예상대로 집들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묘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었다.
"밤 10시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신전에 모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4시까지 집회를 합니다. 그때 헌금을 하고 교주인 그 여자가 연설을 한 뒤엔 모두 자유로운 모임을 가지죠. 그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그 여자가 어떻게 사람들을 홀렸는지는 모른다, 이거죠?"
"원래 말주변이 좋은 여자입니다... 교단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여러 사업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모두 성공한것 처럼 보였습니다."
"사업?"
케빈이 눈썹을 휘자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어 사람들한테 약초를 모아오라고 시켜서 그걸 비싸게 판다거나...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호오. 꽤 머리가 돌아가는 여자인가 보네."
"네.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굉장히 똑똑한 여자에요. 저와 그 두 사람 외에 교단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덕분에 세력은 점점 커지고 수입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일동은 혀를 내둘렀다. 물론 덩치가 커진 만큼 나름의 운영 시스템도 있겠지만 그 말대로라면 진실을 아는 자는 단 셋 뿐. 하지만 히스는 제대로 정보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중간 관리를 하는 사람들도 모조리 속고 있다는 말이었다. 케빈이 다시 물었다.
"그 집회란 건 모두 다 참석하는 건가?"
"예. 신전을 짓고 나선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꽤 규모가 거대해서 사람들 모두를 수용하고도 빈 방이 남고 감옥도 있습니다. 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가둬두는 곳입니다만 아직까지 갇힌 사람은 없습니다."
"흐음......"
네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띄웠다. 생각보다 일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불법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벌인 사업이라면 그쪽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건드려선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서기도 애매했고 무엇보다 그런 건 성미에 안 찼다. 아시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히스에게 종이와 펜을 척 내밀었다.
"그려요."
"뭐, 뭐를요?"
"신전 내부 구조."
역시나 그 답게 명쾌한 해답이었다. 카이스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케빈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스카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는 걸로 찬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