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1. 의외의 전개(2)
히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전 내부도를 대강 그려 아시엘에게 넘겨주었다. 종이를 받아든 아시엘은 그것을 대강 눈으로 훑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이게 가짜라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겠죠?"
"무, 물론입죠!"
히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엘은 흡족하게 흠, 하는 소리를 내고 선배들과 카이스도 볼 수 있도록 종이를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았다.
"호오. 복층이네?"
"네... 지하 3층까지 있습니다."
돈도 많네, 하고 케빈이 툴툴거리는 것을 흘려들으며 아시엘은 다시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내부도라고 해도 세 개의 층을 샌드위치처럼 그려 놓은 것 뿐이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상은 평범한 신전인가요?"
"예...... 그 아랫층에서 매일 밤 집회를 합니다. 2층과 3층은 저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어디에 쓰이는지도 몰라요?"
아시엘은 직접 펜을 집어들었다. 히스는 식은땀을 닦으며 겨우 대꾸했다.
"2층부터는 허락받은 몇 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 주민 몇몇이 교주 명령으로 관리하는데 다른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알고 있어요.."
"3층은요?"
"아마 감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엘의 정갈한 글씨가 종이의 빈 공간에 박혔다. 알아낼 건 이게 끝인가. 그는 펜 끝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때 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가 알고 있는건 거의 다 말했다구요."
"어떻게 되긴. 감옥 가야지. 설마 말 몇마디 했다고 죄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고양이와 장난을 치던 오스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그가 뭐라 항의하려 입을 열기도 전, 아시엘이 다가가 히스의 땀에 젖은 이마 위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신전이 어디에 있어요?"
"도, 동쪽 성문 쪽... 산 꼭대기..."
그는 소년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시엘은 생긋 미소지었다.
"정보 고마워요. 좀 주무세요... 슬립!"
히스가 두말할 새도 없이 축 뻗어버리자 카이스가 다가가 어디에선가 가져온 노끈으로 그를 꽁꽁 묶어버렸다. 푹 잠든 그를 대충 구석에다 처박아 놓고 네 사람은 다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케빈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쓸모 없는 녀석이었군. 제일 중요한 내부 구조를 거의 모르다니. 솔직히 2인조 중 하나라는 걸 기대했는데."
"그러게... 그나저나 사업이란 게 뭐지? 허가는 어떻게든 받아냈다고 쳐도 고작 이 정도 영지에서 아무리 돈을 쥐어 짜봤자 이 정도 건물을 짓기는 어려웠을 텐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오스카는 골치 아프다는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 사람은 생각에 잠겨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묵묵히 있던 아시엘이 애매하게 미소지었다.
"생각해 봤자 답은 안 나올 테니 일단 가보죠. 완전 호랑이 굴이나 다름 없지만."
"역시 그 수밖에 없나. 차라리 낮에 가는건 어때?"
"아니. 오히려 지금이 나을걸. 셀레니스 기사단이 영지에 왔다는 사실은 다들 알 텐데 대낮에 낯선 4인방이 갑자기 신전을 방문해 봐. 얼마나 황당하겠어. 차라리 접근이라도 가능한 지금 가는 게 편하지."
케빈의 말에 오스카가 제지를 걸었다. 카이스가 거기에 조용히 덧붙였다.
"주근이냐 야근이냐의 차이지, 이러나 저러나 불길 속에 폭약 매고 뛰어드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
그들은 입을 일자로 딱 다물었다. 언제나 일은 싫었지만 이건 평소의 배로 하기 싫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결국 네 사람은 일제히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코까지 드르렁 드르렁 고는 히스를 빈집 창고에 가둬놓고, 그들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조심 이동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동쪽 성벽의 야트막한 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스카가 작게 투덜거렸다.
"아닌 밤중에 등산하게 생겼군."
"길은 피해서 가요."
아시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들은 어두컴컴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가 우거져서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산 속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숙련된 기사인 네 사람에게 시야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보니 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툭, 케빈은 자신이 밞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이 씨, 깜짝이야!"
"쉿!"
카이스가 급하게 입술을 손가락에 갖다대자 그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스카는 끌끌 혀를 찼다.
"나 참.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이야."
"조용히... 제 말이요. 파견 나오면 왜 항상 밤에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시엘은 가느다란 나무 하나에 의지해 한 걸음 또 올라섰다.
네 사람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벌레 울음소리, 간간히 느껴지는 산짐승들의 기척 외엔 아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러다 엉뚱하게 산에서 조난당하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아시엘은 눈 앞의 어둠이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올라가자 다행히도 먼발치에 희미한 빛이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세를 낮춰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가 조금 옅어지고 빈 공터가 있는 곳에 이 작은 산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신전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그들은 조용히 동태를 살폈다. 입구에 세워진 큰 횃불에 어둠 속에서도 붉은색 대리석이 선명하게 비쳤다. 저거 엄청 고급이잖아, 아시엘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예배 시간이라 그런지,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두 남자가 보초처럼 서 있었다. 나름 무기도 허리춤에 차고 있었지만 그런 것치곤 상당히 허술해 보였다. 케빈은 일행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어쩔래? 때려 눕히고 들어가?"
"안 돼. 아직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데 괜히 소란만 일으키면 망한다고."
오스카의 말에 그들은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입구는 저 한 곳밖에 없는듯 했다. 그렇다면 저 두 사람이 문 앞을 떠나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잠깐 머리를 굴리던 아시엘이 카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혹시 아까 그 영상석, 가져왔어?"
"응."
카이스가 주머니를 뒤져 건네주는 고양이 목걸이를 받은 아시엘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쪽이 좋을까요?"
"알아서 해."
손을 훠이훠이 내젓는 케빈에게 대강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는 영상석을 작동시킨 후 곧바로 멀찍이 던져버렸다. 곧 조금 떨어진 곳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을 찢고 불쑥 솟아났다. 그리고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을 지키던 남자들이 반응을 보였다.
"어? 저게 뭐야?"
"도깨비 불인가?"
두 사람은 어리둥절하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발 가라, 가. 네 기사는 초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한 남자가 영상석의 빛을 가리켰다.
"확인해 봐야 하나? 교주님이 수상한 게 있으면 뭐든지 체크하라고 하셨잖아."
"그럼, 그래야지."
나머지 한 사람 역시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이 등불을 집어들고 천천히 영상석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하자 아시엘은 일행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은 몸을 최대한 숙이고 소리 없이 입구로 향했다.
아무도 모르게, 무탈히 신전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그들은 곧장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걸려있는 횃불로 내부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모두 지하로 내려가 있는지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시엘은 청력을 개방하고 지하로 가는 계단을 찾으려 주위를 샅샅히 훑어보았다. 곧 그는 커다란 여신상 뒤에 있는 문 하나를 발견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여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상당히 화려한 것이었다.
"저긴가 봐요."
"그렇지?"
아시엘이 속삭이자 오스카가 맞장구쳤다. 오스카는 케빈에게 시선을 던진 다음, 아시엘과 카이스를 뒤에 남겨두고 그와 함께 신상 뒤로 이동해 몸을 숨겼다. 사람이 없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한 그들은 바로 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밀었다.
끼이익- 경칩에서 작은 소리가 났지만 그래도 문은 별 저항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케빈의 손짓에 따라 아시엘과 카이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오스카가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진짜 호랑이 입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거니까."
두 소년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고, 저마다 검자루를 쥐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쿵! 가장 뒤에 따라가던 아시엘이 문을 닫자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외부의 빛은 완전히 차단되었지만 곳곳에 걸린 등불 덕분에 계단은 꽤 밝았다. 아시엘은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최대한 집중했다. 사람들의 중얼거림과 뜻을 알 수 없는 말들.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 중인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이 끝을 보이고, 네 기사는 활짝 열린 입구 하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입구 뒤에 짧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지하 1층의 집회장이 있었다. 아시엘은 가장 먼저 집회장 쪽으로 천천히 나아가 문 대신 늘어뜨려진 발을 걷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홀이었다. 아카데미 강당과 비슷한 구조로 앞에는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고 그 맞은편의 객석에 엄청난 수의 신도들이 모여 앉아 경건하게 기도를 드라고 있었다. 제단 앞에는 화려한 붉은색 로브를 두른 뚱뚱한 남자가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를 들고 무어라 지껄여대는 중이었다. 입구는 그 둘의 사이에 있었다.
아시엘은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봐도 더 이상 진행하는 건 무리인듯 싶었다. 한 발작이라도 나섰다가는 곧바로 저들의 시선에 훤히 노출될 게 뻔했다.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온 케빈이 그의 어깨에 지탱해 앞으로 고개를 뺐다.
"이런... 이건 어렵겠는데."
"선배, 무거우니까 비켜줘요..."
아시엘이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당연히 그는 무시했다. 뒤이어 합류한 카이스도 케빈의 뒤에 바짝 붙어서 밖을 내다봤다.
"그렇군요. 이제 어쩌죠?"
"카이, 너라도 떨어져... 무거우니까."
졸지에 케빈과 카이스 두 사람 분의 무게를 감당하게 된 아시엘이 죽는 소리를 냈지만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스카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마찬가지로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일행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 터억-
"아...!"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오스카는 자신의 몸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바닥에 깔린 타일이 아주 약간 벌어진 곳에 발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이 깨끗하게 백짓장 상태가 되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균형을 잃고 갈 곳이 없어진 그의 손이 있는 힘껏 카이스의 등을 밀고 있었다. 기겁한 카이스는 손 쓸 새도 없이 케빈 위로 넘어졌고, 갑작스레 가해진 힘에 케빈은 순간 앞으로 몸이 확 쏠려 결과적으로 선두에 서 있던 아시엘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당탕탕! 기도만이 들려오던 고요한 홀 안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공통된 외마디였다. 혼자 홀 한가운데에 떠밀린 아시엘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돌덩이가 된 것은 안의 삼인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시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수백의 당황한 눈동자들이 모조리 그에게 박혀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앞에서 집회를 관장하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역시 입을 쩍 벌리고 아시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망했네. 그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곧 예상한 외침이 군중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성소에 들어왔다!"
"아...!"
아시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행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무언가가 목구멍 안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세 사람은 그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잽싸게 튀어버린 모양이었다.
"침입자를 잡아라아아아아!"
성난 신도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제단 앞의 남자도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를 잡으라 악을 써댔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아시엘은 참으로 오랜만에 순수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물론 가망이 없다면 먼저 도망치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그랬지만. 아시엘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이, 배신자들...!"
이를 악문 살벌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고함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곧 사람들이 일제히 아시엘에게 우르르 쏟아져왔고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