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3. 의외의 전개(4)
아시엘이 떠난 후 첫날.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유트리안은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아시엘이 파견을 간 뒤 그를 대신할 호위병들이 곁에 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조용했다. 그는 곧 오늘 아침 눈을 뜨고 나서부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를 치미게 하는 사람도 없었고 짜증나는 꼬맹이도 없었다. 일일히 자기 말에 토를 달며 성가시게 하는 녀석도 없었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거리며 무엄하게도 그의 등을 툭툭 치는 밉살맞은 놈도 없었다. 하지만-
"쳇."
유트리안은 언짢게 혀를 찼다. 아직 이른 오전,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정원으로 나왔지만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옆에 중무장한 기사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성가시기만 했다. 저런 것보다야 말끔한 제복만 입은 그 녀석이 낫지. 아니, 관상적으로만. 어디까지나 겉보기로만.
그는 애써 고개를 털어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시엘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유트리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이랬던것 같기도 했다. 할 일 없고, 지루하고. 아시엘이 호위랍시고 붙기 전까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용하고 좋네, 뭐. 조잘조잘 잔소리하는 것도 안 들어도 되고."
아니, 진짜라니까. 뻥 아니라고. 유트리안은 변명처럼 혼자 중얼중얼거렸다. 하지만 언제나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던 그의 눈꼬리는 답지 않게 힘이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잔디밭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 갑자기 곁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유트리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분명 방금 전까진 아무도 없었을 텐데 한 7살, 8살쯤, 많이 봐줘야 10살 이하로 보이는 꼬마아이가 코앞에 서서 생긋 미소짓고 있었다. 아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유트리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생긴 생명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는 아름다웠다. 햇볕 아래에 반짝이며 허리까지 쏟아져 내리는 은발에 손을 대면 그대로 미끄러질것 같은 피부, 보석같이 영롱한 빛을 띄는 보라색 눈동자.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 역시 하얀 색이라 아이의 전신에서 백색의 빛이 흘러나온다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막 내린 첫눈처럼 순수하고 온전한.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았지만 천진난만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이 아이의 존재감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입가에 가득 머금은 미소는 생기가 넘쳤다.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사랑스러웠다.
내 주변에 이런 애가 있었던가, 유트리안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졌지만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외모라면 한 번 보고 잊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할듯 했다. 그래, 마치 그 녀석처럼-
거기까지 떠올리니 흥분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차갑게 말했다.
"누구지? 처음 보는 꼬맹인데."
"에스테반."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흘러나왔다. 유트리안은 재차 머리가 멍해지고 말았다. 깔끔하게 닦인 유리잔끼리 부딪히며 내는 소리처럼, 은으로 만든 방울이 울리는 것처럼 깨끗하고 맑은 음성이었다. 유트리안이 뭐라 말 하기도 전,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에스테반. 그게 내 이름이야."
아이, 에스테반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트리안은 그에게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유트리안은 이 세상에 에스테반과 자신, 단 둘만 남아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따뜻한 햇살이 마치 요람처럼 아이를 부드럽게 감쌌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 그 은발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에스테반의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만나서 기뻐. 정말로."
그 후로 꼬마는 수시로 유트리안의 궁을 들락거렸다. 처음 그렇게 찾아온 날 묵묵히 앉아 있기만 하는 황자의 앞에서 소년은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유트리안이 대꾸를 하든지 말든지 날씨 이야기, 옛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 등등을 늘어놓으며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 평소에 아시엘이 찾아오던 시간에 딱 맞춰 에스테반이 나타났다. 정원에 앉아 책을 읽던 유트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왔냐? 도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오는 거야?"
"내가 못 가는 곳은 없어. 난 대단한 사람이니까."
에스테반은 새하얀 토끼마냥 돌 위를 통통 뛰어 건너가다 난간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유트리안은 콧방귀를 뀌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에스테반 덕분에 적막감은 어느정도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니 이제 쫒아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귀찮은 건 여전하지만.
"하아...."
유트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책을 읽는다고 앉아는 있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가 탁, 책을 덮어버리자 꼬마가 기다렸다는듯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누구 생각해?"
"꼬맹이는 알 거 없어."
유트리안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에스테반은 싱긋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맞춰볼까?"
어린애답게 천진난만하게 미소짓는 에스테반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시엘과도 조금 닮은 듯한 화사함과 신비함이 소년- 구분 안 가는 외모인건 마찬가지 였지만 일단 유트리안은 이름으로 판단했다- 의 주변에 흘렀다.
그와 아시엘의 차이점이라면, 에스테반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외모 쪽에서는 에스테반 쪽이 더 매혹적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사이, 에스테반이 킥킥 소리를 내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 작은 기사님 생각하는거, 맞지?"
".....!"
유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했다. 그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지만 에스테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황자님은 그 기사님을 많이 좋아하나 봐?"
"그딴 놈 좋아하긴 누가! 애초에 남자한텐 관심 없거든."
"좋다, 는게 굳이 남자와 여자 사이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지. 친한 친구로서, 아니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끌린다거나."
어린애의 입에서 나올 만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에스테반은 키득키득 장난꾸러기처럼 입을 가리고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있잖아, 황자님. 황자님은 그를 믿어?"
"무슨 헛소리야. 그리고 네가 어떻게 아시엘을 아는 거지?"
얼굴을 와락 구기고 유트리안이 하는 말에 에스테반은 글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황자님.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런 게 아냐. 황자님이 그를 생각보다 많이 신뢰하고 있다는 거지. 물론 이해는 해. 밝은 성격에 그 나이대의 인간들 치고 능력도 좋아. 하지만 말이야."
소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는 얼굴로 뜸을 들이다, 툭 내뱉았다.
"그가 황자님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은 있어?"
".....!"
아픈 곳을 찔린듯 유트리안은 흠칫했다. 그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풀었다. 그는 에스테반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꺼져, 꼬마. 너한테 그딴 말 들을 이유는 없어."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꺼지라고 했어."
유트리안이 다시 한 번 으르렁거렸지만 에스테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황자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간 그는 입꼬리를 올린채 유트리안과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당신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지만, 그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
가까이 다가온 그 보랏빛 눈동자가 일순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같아, 유트리안은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미간을 구기고 아이를 확 뿌리쳤다.
"잘난 척 떠들지 마, 꼬마.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건 사실인 걸. 황자님은 지금 그가 하는 고민이 뭔지, 그가 버거워하고 있는게 뭔지 들은 적이 있어? 그런 거야. 작은 기사님이 황자님과 함께 있는 건 단순한 임무 때문이니까. 황자님한테 일일히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거지.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지키는 것 뿐이야. 그에게 딱히 다른 의미는 없을걸? 정말로 자신조차 위험한 상황이 된다고 해도 그가 황자님 곁에 머물러 줄까? 황자님은... 확신할 수 있어?"
유트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 꽉 쥐어진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진동했다.
"꺼져.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정말로 스스로의 능력을 벗어난 상황에 부딪힌다면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몰린다면 그는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의지할까? 아닐걸. 그는 고집쟁이니까! 당신은 그를 믿지만, 그는 당신을 믿지 못하니까!"
"꺼져!"
결국 그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지르자, 에스테반은 그제야 말을 멈췄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유트리안을 구경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스테반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화났어?"
"너, 정체가 뭐야?"
"나?"
유트리안이 사납게 묻는 말에 에스테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은빛의 머리칼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곧 아이의 사랑스러운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난 악마야."
"무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유트리안이 다시 눈을 찌푸렸지만 다음 순간,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게, 갑자기 누군가가 목을 콱 옥죄는 듯 호흡이 가빠졌다.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에스테반은 킥킥 웃음소리를 냈다.
"농담 같은거 안 해. 난 인간이 아니거든."
마치 새하얀 고양이처럼, 사뿐 사뿐 다가간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유트리안의 턱을 살짝 잡고 들어올렸다. 유트리안은 에스테반을 뿌리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여나왔다. 혀도 굳어버려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아주 가까이 보이는 에스테반의 아름다운 얼굴 뒤로 푸르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발 밑에 있던 잔디의 지면도 누런 흙이 드러난 황무지로 변했다. 어디에선가 흘러온 미지근하고 끈적한, 검붉은 액체가 그의 발을 천천히 적셨다. 에스테반은 덜덜 떨리기 시작한 유트리안의 손을 살짝 잡아 당겼다.
"여기가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지옥. 당신을 믿지 못하는 소년의 사로잡힌 기억이지."
유트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황금색의 눈동자는 새하얀 소년의 뒤로 보이는 광경에 그대로 꽂힌 채 얼어붙어 버렸다. 무너진 건물을 태우는 불길과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검은 연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쓰레기처럼 여기 저기에 널려 있는 시신들과 조각난 몸뚱이- 모든 것이 생명을 잃은 후의 소름끼치는 침묵.
묵직한 공포가, 숨막히는 두려움이 유트리안을 스멀스멀 감쌌다. 그가 살고, 있는, 곳. 에스테반이 말 할 '그' 라면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게... 뭐야."
가까이에 있는 여성의 시신은 뭔가에 물어뜯긴듯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옆의 남자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난도질이 되었고 탁해진 눈동자를 하늘을 향하고 누운 소년은 입과 코, 귀에서 피를 쏟아냈다.
"뭐냐고, 이게. 뭐야... 대답해!"
"너무 화내지 마. 재미있지 않아?"
유트리안이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지르자 에스테반은 킬킬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유트리안은 그가 두려워졌다. 주먹만 한 보랏빛 눈동자가 하늘과 같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안심해. 이건 단순히 훔쳐보기에 불과하니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너....!"
에스테반은 손을 들어올려 따악, 하고 튕겼다. 그러자 마자 유트리안의 세상에서 소년이 사라지고 시야가 암흑에 잠겼다. 어, 황자는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그것으로 끝. 그의 의식이 새카만 나락 속으로 가라앉았다.
"전하, 전하! 여기에서 주무시면 감기 걸리십니다."
"응...."
성가신 목소리가 유트리안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잠깐 짜증을 내며 눈살을 찌푸린 그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환한 햇살이 눈으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자신을 내려다 보는 호위병의 얼굴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이 녀석 누구야. 몽롱한 정신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유트리안은 그가 아시엘 대신으로 있게 된 호위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유트리안은 끙, 소리를 내며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머리야. 내가 언제 잠들었지?"
"이른 아침부터 나와 계시더니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안으로 들어가 쉬시는 게.. 지금은 오전 10시입니다."
"시끄러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
그가 날카롭게 말하자 호위병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유트리안은 병사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머리가 묵직했다.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한 병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별거 아니다. 나쁜 꿈이라도 꾼 모양이지.."
아시엘 아르셰인, 그 녀석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유트리안의 머릿속에서 순백의 소년은 어느새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가 본 지옥 역시. 남은 것은 뜻 모를 불안감과 미미한 불신 뿐. 바닥을 향한 그의 금안이 예민한 고양이의 것처럼 날이 세워졌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달콤 쌉쌀한
"그런 의미로, 쇼핑 잘 부탁해!"
루이카엔은 상큼하게 웃으며,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줄 모르는 아델레트와 제르닌에게 쇼핑 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한참 동안이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버버거리던 두 사람은 곧 동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의미라니, 하나도 모르겠거든!"
"무슨 헛소리야, 네놈은! 아침부터 이상한 거라도 주워먹었냐!"
"아니. 완전 제정신인데."
정색하며 대꾸한 루이카엔은 억지로 종이를 아델레트에게 넘겨주고 팔짱을 척 꼈다.
"어쩔 수 없어. 오늘 남는 손이 너네들 뿐인걸. 혼자 가면 외롭잖아. 그러니까 둘이 다녀와! 아델도 일 없고 제르닌도 비번이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차라리 내가 혼자 갈게. 아델레트 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안-돼!"
제르닌이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말했지만 단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번에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심호흡을 하던 아델레트가 나섰다.
"일찍 일 끝난 녀석들 있지 않아? 그래, 아시엘이라던가 카이스라던가."
"아시엘은 황자님한테. 카이는 아직 복귀 전이야. 그리고 왜 맨날 그 녀석들 부려먹을 생각밖에 안 하는 거냐고. 걔네가 제일 자주 심부름 나가잖아."
"그 태반은 네가 시키는 거잖아!"
두 사람이 한꺼번에 고함을 빽 치자 루이카엔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제르닌과 아델레트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눈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는 곧 귀에서 손을 떼고 히죽 웃었다.
"아하.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서로가 그렇게나 싫다는 거구나? 아카데미도 같이 나와서 같은 기사단에 나란히 입단했는데도. 아델은 제르닌을, 제르닌은 아델을 엄청나게 싫어했구나. 미안, 미안. 십년쯤 넘도록 친구로 지냈는데 같이 쇼핑도 안 가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
"그런 말 안 했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제르닌이 기겁하며 반박하고 아델레트 역시 발을 쾅 구르며 쏘아붙였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루이카엔이 그들에게 장보기 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잖아? 자, 출발! 혹시나 나눠져서 따로 다닌다는 생각은 하지 마. 지난번에 아시엘이랑 아델이랑 둘이서 나갔다가 생겼던 문제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두 사람은 뺀질뺀질하게 웃는 단장에게 진득한 살의를 느꼈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려든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결국 제르닌은 이를 갈아붙이면서 종이를 그의 손에서 낚아챘다.
친한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던 그가 어색해지기 시작한 건 도대체 언제부터 였을까. 항상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는 두렵다. 이런 모순 속에 빠져든 건. 익숙하던 얼굴이 마주보기 힘들어진 이유는 뭘까. 인생에 변화가 찾아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키지 않게 사복으로 갈아입고, 두 사람은 생활관을 나서 나란히 걸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던 그들은 곧 동시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카엔 이 자식, 가만두지 않겠어."
"....응."
아델레트가 살벌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제르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화는 그것으로 끝.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땅에 깔린 돌 타일의 갯수라도 세려는지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방향의 바닥을 내려다 보며 걸음만 옮겼다. 물론 자신의 생각에 너무 빠져 상대방이 스스로와 똑같은 상태라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루이카엔에게 말려드는 게 아니었어, 이건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 차라리 그 까탈스러운 황자님 시중을 들거나 짜증나는 황제 폐하 앞에서 그 끝없는 헛소리를 듣는 게 나을 듯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델레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 소리에 제르닌이 살짝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델레트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툭 걷어차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델레트. 정말로 내가 싫은 거야?"
"뭐?"
아델레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말을 꺼낸 그는 언제나처럼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아델레트는 머리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그의 명치에 박았다.
"크헉!"
"누가 그렇대, 이 멍청아!"
허리를 푹 숙이고 고통스럽게 바들바들 떠는 제르닌에게, 그녀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몸을 팩 돌린 아델레트는 제르닌을 내버려 두고 앞으로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엄살 피우지 말고 빨리 와!"
"어윽... 잠...."
제르닌이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그것은 그녀 뒤의 허공을 움켜잡았을 뿐. 결국 그는 억지로 몸을 추스르고 낑낑거리며 아델레트의 뒤를 따라야 했다.
친근한 주먹질 덕분인지 어색하던 공기는 어느 정도 사라졌다. 거리에 다다르자 제르닌은 주머니에 구겨 넣어뒀던 리스트를 꺼내 아델레트에게 건네주었다. 언제나처럼 종이엔 장 봐야 하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디 보자... 빨리 해치우고 들어가자."
"뭐 사야 되는데?"
제르닌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다 같이 먹을 과자, 사탕, 초콜릿같은 간식거리와 각자 이름이 붙어 있는 물품들. 아델레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쓸데없는 게 너무 많아. 돌아가서 한 소리 해줘야지."
"... 일단은 가자."
두 사람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근처의 제과점이었다. 새로 연 곳이라 조금은 기대하며 들어갔더니 역시나 각양 각색의 과자들이 진열대와 찬장까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또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이번에야 말로 왕창 사가자. 자, 받아."
아델레트는 제르닌이 대답하기도 전 그의 팔에 커다란 과자 봉지 하나를 턱 올려놓았다. 예상치 못한 무게에 그가 비틀거리고 있을 때 또 그 위에 포장된 쿠키와 초콜릿이 한가득 쌓였다. 무, 무거워. 제르닌은 소리 없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아시엘이 따로 사다달라고 한 게 있었지."
"아시엘이?"
"응... 아무래도 그 녀석 원동력은 당분인가 봐. 밥은 적게 먹으면서 단 건 엄청나게 먹어대거든."
제르닌이 의아하게 묻는 말에 대꾸해며 아델레트는 선반 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늘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그녀의 날씬한 몸을 감싸고 움직임에 따라 살랑 살랑 흔들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하얀 얼굴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내가 무슨 생각을, 제르닌을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뺨에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델은 동료일 뿐이다, 거기다가 그녀는-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제 3자의 목소리가 그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서오십쇼! 뭐 찾으시는 거라도? 어이구, 많이도 고르셨네!"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남자- 아마도 제과점의 주인일 그는 제르닌의 팔에 쌓인 과자의 산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머쓱하게 아델레트를 슬쩍 보는 사이, 주인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푸짐하게 띄웠다.
"집에 자제분이 과자를 좋아하시나 보죠? 공주님? 왕자님? 어느 쪽이든 엄마 아빠를 닮았다면 굉장히 미인이 될 테죠!"
"네?"
순간 아델레트와 제르닌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상태로 대략 10초. 멍청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그들의 이상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주인은 벙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두 분 다 이런 곳에 오시는 게 이상할 정도로 미인이시니까 말이죠. 귀족분들은 이런 작은 가게에는 직접 드나들지 않으시니. 남편분은 아름다운 아내분을 둬서 좋으시겠네. 더 사실 거유?"
"아... 아니.."
무엇에 대한 부정인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제르닌이 얼떨결에 대꾸했다. 그러자 주인은 역시, 하며 그의 손에서 과자더미를 빼앗아 들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들고 가긴 어려울 테니까 나중에 애 시켜서 배달해 드릴게."
아직까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는 멍하니 돈을 꺼내 지불하고, 셀레니스 기사단 앞으로 배달해 달라고 웅얼웅얼 말했다. 마지막 말에 주인이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혼이 빠져나간 그들에게는 제대로 닿지 못했다.
결국 아시엘이 부탁한 것은 찾아보지도 못한 두 사람은 제과점을 나와버렸다. 겨우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불편해졌다.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한 아델레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애, 애라니, 터무니 없는 소릴..."
"그러게. 부부처럼 보인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제르닌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아니라고 웃어 넘기면 됐을 텐데. 어째선지 그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하아아..."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 모양인데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동상동몽, 같은 자리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감정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로 그들은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걸음을 억지로 뗐다.
변화를 처음으로 깨달은 건, 아마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리고 그 풋내나는 감정이 서서이 익어서 단내가 풍기기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곪아 문드러질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될 때까지 감추고 있는 건, 단순히 어린애 치기같은 것도 있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상대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에게 감춰진 진정한 속내는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제르닌은 집에서 정한 약혼자가 있었다. 원래 평민 상인의 아들인 그는 10대 시절 아버지가 정해온 가난한 남작가의 딸과 혼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형식상이긴 했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여러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고,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제르닌 역시 그에게 연정이라고 하는 감정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약했다. 결국 소녀는 제대로 된 인생을 맞이하기도 전 병에 덜컥 걸려 몇 달만에 죽어버렸다.
아델레트는 저학년 때부터 루이카엔을 동경했다. 무엇이든지 잘 하고 다정한 데다 문제가 일어나면 언제나 스스로 앞장서는 그가 빛나 보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것을 잠깐 사랑이라 착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루이카엔은 소중한 친구였고,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마치 허공에 뜬 뭉게구름 같았기에- 짧은 연심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다른 곳을 보던 소년 소녀는 등을 맞댄 채, 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 어른이 되었다.
두 사람은 어쨌든 다시 쇼핑을 속행했다. 이것 저것 물건을 사며 얼어붙었던 공기는 다소 풀렸지만 여전히 제르닌과 아델레트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 처리에 깔끔한 두 사람 답게 장보기는 철저하게 해결해 나갔다.
끼니는 대충 길거리에서 파는 간식류로 때우고 둘은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그리고 슬슬 해가 떨어져 갈 때쯤, 둘은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거리의 한 귀퉁이에 나섰다.
"슬슬 들어가자. 하루 종일 걸렸네."
아델레트는 짐꾼 모양새가 되어버린 제르닌을 돌아보았다. 짐을 가득 안은 채 제르닌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황성으로 돌아가려 발을 돌렸을 때, 토독. 차가운 물방울이 그의 이마에 두어 방울 떨어졌다.
"어?"
제르닌은 위를 올려다 보았다. 어두워지고 있는 저녁 하늘에 어느새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 몰려와 있었다. 아델레트 역시 같은 것을 발견하고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잔뜩 찌푸린 하늘은 쏴아아- 시원하게 소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꽤 굵은 빗줄기는 가장 먼저 상점의 지붕을 적셨고 거리에 늘어선 천막들 위에도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비에 바깥에 상을 펴 놨던 상인들은 허둥지둥 정리에 나섰고 하루를 만끽하던 사람들 역시 우왕좌왕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갔다. 차가운 비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때리자 제르닌은 짧게 혀를 찼다.
"... 아델레트."
"어? 앗!"
그는 아델레트의 머리에 자신의 겉옷을 던지듯 덮어주었다. 그리고 짐을 한 손으로 옮겨든 후,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델레트는 당황해 손을 빼려고 했지만 강한 악력 덕분에 옴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함께 뛰는 수밖에 없었다.
"야, 잠깐만!"
"......"
그녀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제르닌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델레트의 머릿속은 점점 엉킨 실타래처럼 배배 꼬여가고 있었다. 빗줄기가 그녀의 몸을 식히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르닌에게 잡힌 손목 역시 화끈거리기는 마찬가지.
부츠를 신은 자신의 발이 비가 고인 바닥을 딛는 감각도, 부산을 떠는 주변 사람들의 소란도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앞에서 달려가는 제르닌의 넓은 등과 점점 젖어가는 블루블랙의 머리칼. 손목을 붙잡은 그 투박하고 서툰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제르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난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아델레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은 뜬금없이 옛날이 떠올랐다.
그건 분명, 제르닌의 약혼녀가 죽고 아델레트가 루이카엔을 포기했던 날. 두 사람은 우연히 한밤중 아카데미의 뒷뜰에서 마주쳤다. 아마 그때도 이렇게 흐린 날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구는 소년 제르닌의 앞에서 아델레트도 조금 울었던 것 같았다.
아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제르닌에 대한 연민과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손을 뻗지 못하는 자신에게의 조소. 다시는 연인을 볼 수 없게 된 제르닌을 앞에 두고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지독하게 미웠다. 그리고 지금, 아직도 아델레트는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바보짓을 하는 중이었다. 비록 상대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건 비록 용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임무 중 둘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기본적으로 괴물 집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항상 사지에 나서 있는 그들이었다. 만약 그녀가, 혹은 그가 먼저 떠나게 된다면.
못 할 짓이었다. 약혼자를 잃었던 제르닌에게는 더더욱.
소년은 무뚝뚝했지만 자상했다. 차가운 얼굴 뒤에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하는 그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 고민 끝에는 서툰 말과 행동으로나마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순수한 마음이 있었다. 그 소년은 그대로 자라, 여전히 서툰 셀레니스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소녀는 씩씩하고 용기가 있다. 사실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어도 겉으로는 큰 소리를 치는 그런 바보같은 소녀였다. 그녀의 작은 등에는 그녀에게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주저앉으면 일어나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격려하는 소녀는, 그대로 자라 셀레니스 기사단의 기둥이 되었다.
두 사람은 흠뻑 젖은 채 어느 천막에 들어섰다. 그제야 제르닌은 자신이 아델레트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듯 쑥쓰럽게 손을 놓았다. 떨어져 나가는 온기가 조금 아쉬웠지만 아델레트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코트를 벗어 내밀었다.
"고마워."
"그냥 네가 쓰고 있어. 춥잖아."
"어차피 젖어서 별로 도움도 안 돼."
제르닌이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기어이 코트를 그에게 쥐여주고 말았다. 그는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자신의 겉옷을 받아들고 짐을 들지 않은 쪽 팔에 걸쳤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쏴아아- 비가 내리는 소리만이 침묵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고 있었다. 어느새 흥건하게 물이 고인 지면에 수많은 파장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둥근 파장에 묻히는 것을 반복했다. 거리에는 이제 인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한 꼬마가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제르닌은 물끄러미 하늘에 시선을 주었다. 이토록 퍼붓는 것을 보니,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눈길을 거두고 그는 곁에 선 아델레트를 힐끗 훔쳐보았다. 언제나 씩씩한 여자는 눈썹을 휘고 까만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리 그치지 못해, 하고 금방이라도 쏘아붙일 것 같은 기세였다.
아아, 그것도 괜찮을지도. 제르닌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보낸 둘만의 시간,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조금 기뻤다. 자신의 감정을 아는 루이카엔이 쓸데없이 배려를 한것 뿐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의미고 뭐고 없었어도.'
자신보다 루이카엔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빛나는 남자라고, 제르닌은 생각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아델레트의 마음을 돌릴 방도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냥 곁에만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그는 수없이 스스로를 타일렀다. 눈부신 남자의 곁에는 태양같은 여자가 어울리는 법이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아델레트 드 리비안이 그의 것이 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지금, 그녀에게 쓸데없는 짐을 지워 주고 싶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가 먼저 죽게 된다면 남겨진 아델레트는 고통스러워 할게 틀림 없었다. 그녀를 두고 가야 하는 심정 역시 참담하기 그지없을 게 뻔했다. 미련 같은건 남겨두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았다. 잃어버리는 것은, 한번이면 족했다.
두 사람은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푹 젖은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고 축축해진 옷이 그들의 체온을 식히고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 둘 뿐이었으니까.
"여, 제르닌. 잘 다녀왔어?"
로비에 서 있는 제르닌을 발견한 루이카엔은 손을 슥 들어보였다.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잠잠해지고 돌아온 아델레트와 제르닌은 곧바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씻기부터 했다. 물론 돌아오는 도중의 대화는 일절 없었다.
머리에 걸쳤던 수건을 내리고 제르닌은 그에게 고개만 까닥했다. 평소와 변화가 없는 표정이 참 답다고 생각하며 루이카엔은 웃는 낯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비 왔었다며. 마중이라도 보낼까 했는데... 역시 없는 쪽아 나았지?"
"아아."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동안 아델레트와 단 둘이 있는게 가능했고- 혼란스러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루이카엔은 제르닌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그래서, 관계 진전은 조금 보여?"
"그냥, 이대로가 좋아."
담담한 그의 음성에 루이카엔은 웃는 얼굴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제르닌은 루이카엔에게 시선을 주며, 옅은 미소를 띄웠다.
"이대로가 좋아. 그냥. 그러니까 더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
".... 하아."
루이카엔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을 헤집었다. 제르닌은 드물게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바보같은 친구는 기사단의 단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남 일을 모른척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다가서는, 그런 사람.
"내가 바보란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대로가 좋다는 거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멍청이 같으니라고. 그러다가 후회할 걸."
루이카엔이 맥 빠진 목소리로 타박했지만 누구보다 오래 그들을 지켜본 만큼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더이상 등을 떠밀지는 않았다. 제르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을만큼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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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회 브라흐마 님의 질문! 아시엘의 주문에 이그니스 란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신도들을 낚기 위한 수작이냐는 질문을 주셨는데요ㅎㅎ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입니닷ㅎㅎ 오늘은 이 기회에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세계의 마법 스펠은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보이지만(...)
속성-공격or실용-형태-변형
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시엘의 주문에 이그니스 가 들어간 것은 그게 불의 속성을 나타내는 스펠이었기 때문이에요! ㅎㅎ한마디로 원래 그런 거죠. 사이비 종교 집단의 불의 신 이름이 이그니스 인 이유는 마찬가지로 그 단어 자체가 불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사용이 익숙해진 마법, 캐스팅을 외워둔 마법이나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고 연속으로 시전하는 경우에는 스펠을 외우지 않아요.
파이어 볼은 1서클의 마법이라 (마력을 퍼부어서 거대하게 만들긴 했지만) 아시엘이 굳이 주문을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신도들을 의식해서 우리의 사기꾼 주인공 아시엘이 우렁차게 외친 거죠. 이게 반쯤 말씀이 맞았다는 이유입니다ㅎㅎ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속성 스펠
물- 아퀴나
불- 이그니스
바람- 위스타
흙- 엔사
전기- 라이아
정신계(환각 등)- 에스트
입니다. 사실 작중 나온 건 엔사, 이그니스, 아퀴나 밖에 없지만요... 어쨌든 이런저런 규칙을 세워서 사용 중이랍니다ㅎㅎ
그럼, 다음 주 목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