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85화 (18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4. 불의 지배자(1)

#얍 잠깐 공지 하나 하고 가겠습니다!

셀레니스 기사단 최근 연재분은 거의 6천, 7천자의 분량을 한 편으로 주 1회씩 업데이트 되었습니다만 역시 너무 길면 독자님들도 읽기 힘드시고 저, 저도 체력이 동나기 시작해서(...) 3천 5백자 분량으로 주 2회 연재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부터 월, 목에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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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니스 신전의 지하 2층, 어느 호화로운 방. 화려하다 못해 경박하게 보이는 사제복을 벗어던지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제스퍼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는 다름 아닌, 아까 신도들 앞에서 연설을 펼치던 부교주였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빌어먹을 꼬마..."

평소처럼 잘 진행되나 싶더니 갑자기 난입한 꼬맹이. 처음에는 멋모르고 들어온 옆마을의 어린애 쯤으로 생각했지만 막 잡으려는 순간에 세이라가 끼어든 건 예상 외였다. 거기다 갑자기 이그니스의 사제라 외쳐대더니 느닷없이 불덩어리를 소환해 냈다. 황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 불은 마법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마법이니 사기다, 라고 신도들에게 말하기엔 그 역시 켕키는 구석이 많았다. 그쪽도 아마 그런 사정을 읽고 그런 대담한 짓을 벌였을 터였다.

끽해야 열 네댓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마법사라니. 범상치 않은 외모에다 그 상황에서 되려 뻔뻔하게 나오는 태도가 어이없다 못해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셀레니스 기사단이 유령 소동 건 때문에 들어왔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이때까지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꼬마가 기사단의 끄나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사단이 교단에 대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 되니까.

그래도 아직 유리한 쪽은 그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기사단이 쳐들어 온다면 그 소년을 인질로 잡아도 되고, 영지민들 전체가 교단의 편이었다. 아무리 괴물 집단이라 해도 일반인들 상대로는 별 수가 없을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스퍼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몸을 빙글 돌려 방의 구석에 시선을 주었다. 아시엘이 잠든 사이 세이라를 시켜 가져오도록 한 금빛 레이피어가 얌전히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어차피 마법사인 이상 검은 호신용에 불과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여느 때보다 더 심한 악몽에 시달린 끝에, 아시엘은 가까스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 하아..."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아시엘은 손을 들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꽉 눌렀다. 진정해라, 진정해. 자기 암시처럼 그렇게 되뇌었지만 호흡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어 있었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려 했지만 곧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겨우 꿈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 이게 무슨 꼴이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편할 텐데. 아시엘은 자조적으로 픽 웃으며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는 어떻게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화려한 객실, 정신을 놓듯이 잠들가 직전 보이던 풍경과 같았다. 여전히 최악의 상황 안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당장 세이라가 곁에 없다는 사실 정도였다. 어린 여자애에게 이런 꼬락서니를 보여주기는 조금 곤란하니까.

아시엘은 이불을 겉어내고 바닥을 디뎠다. 분명 아무렇게나 잠에 빠져든 것 같은데 어느새 신발이 벗겨져 있고 대신 침대 옆에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망토 역시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새 옷이 개어진 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해 줬다는 것은 둘째치고 세이라가 방 안에서 부산스레 돌아다녔을 것이 뻔한데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긴장을 풀 만한 곳이 아닌데다 동료들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거기다가 가위까지 눌렸으니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슬리퍼를 신고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어째 으슬으슬 오한이 들었다. 게다가전날 여기저기 얻어맞은 곳이 다시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쯧, 혀를 찬 그는 버릇처럼 기지개를 켜고 무심코 허리춤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 곧장 얼굴을 와락 구겨버렸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레이피어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잡히는 것 없는 손이 텅 비어버린것 같이 허전했다. 혹시나 싶어서 방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어디서나 눈에 띄는 금빛의 세검은 보이지 않았다.

"이..... 썩을....."

순간 울컥 욕설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타이밍 좋게 귀끝에서 진동이 느껴진 덕분에 겨우 목 너머로 넘어갔다. 아시엘은 잠깐 이를 악물고 누구에게랄 것 없는 분노를 삼키다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손을 귀걸이에 가져가 통신을 연결했다.

[아시엘, 받았어?]

"아... 루이카엔 씨. 무슨 일이에요?"

[네 얘기 듣고 그쪽이 신경쓰여서 말이지. 좀처럼 보고도 안 해주고. 상황은 어때? 지금 어디야?]

"하하하..."

아시엘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 힘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새삼 지금의 황당한 처지가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서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 되어 그는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전 안이요."

[뭐? 무슨 신전? 설마, 그...]

"설마라고 할 게 있나요. 이그니스 신전 지하 1층의 손님 객실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어요. 꽤 호화로워서 좋네요. 뭐, 이그니스 님인지 뭔지의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한 거겠지만요. 멋지지 않아요?"

루이카엔은 할 말을 잃은듯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잠시 후 망연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다른 녀석들은?]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저 혼자 잡혔어요."

[잡혀? 야, 말 좀 똑바로 해 봐!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경위는 밖의 인간들한테 물어보세요. 카이가 통신용 귀걸이 한 쪽 가지고 있으니까."

다그치는 그에게 시큰둥하게 대꾸한 아시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혼자 남게 된 이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람들한테 포위된 상태에서 간 크게 벌인 도박에 대해 듣게 된 루이카엔은 또다시 침묵하다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웃긴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새삼 자각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쪽에서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단장의 얼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라, 아시엘은 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루이카엔이 애써 화두를 돌렸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야? 아니, 아니. 일단은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으신다면..."

아시엘은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툭 내뱉았다.

"일단은 이 녀석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볼게요."

[뭐?]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는지, 루이카엔이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아시엘은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어차피 이 모양 이 꼴 된거, 이판사판이겠다 끝장 보는게 낫지 않아요?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갑자기 버림받았지, 이상한 사이비 종교에 걸려들질 않나 눈 떠보니까 검도 없어져 있고. 저 지금 이래저래 열 받아 있어서요. 방법은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죠."

명쾌하리만치 간단하지만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루이카엔은 이 놈 꼭지가 돌아버린 거 아냐, 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내서 웅얼댔지만 아시엘은 대충 흘려버리고 다시 평소대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안에서 정보를 캐 볼 생각이에요. 그게 최선인 것 같으니까."

[어.... 몸 조심해. 녀석들이 구하러 가기 전까지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알았어요."

아시엘은 시원스레 대꾸했다. 이번에도 루이카엔이 믿을까 보냐, 하고 툴툴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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