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8. 불의 지배자(5)
루이카엔은 터벅터벅 인적이 드문 복도를 걸었다. 황궁 생활을 시작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그로서도 두어 번 갔을까 말까 한 곳이었다. 딱히 그에게 걸릴 만한 출입 제약은 없었지만 집무실의 책상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현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이 많다 보니 자연히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런 데 있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루이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구석진 곳의 큰 문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 앞을 지키던 두 경비병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
"오냐. 나 여기 왔다고는 아무한테도 말 하지 말아 주겠어?"
루이카엔이 씩 미소짓자 경비병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선선히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히는 기척을 끝으로 내부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넓은 공간에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수많은 서가들에는 최근 100년동안의 방대한 자료들이 연도별로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그것들을 찬찬히 살피며 그는 느긋하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자료실에 온 이유는 루이스가 부탁-인지 명령인지- 때문이었다. 11년 전 하노빌 백작령의 대참사. 평화롭던 마을이 전소되고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하나같이 끔찍한 방식으로.
신고를 받고 달려간 루아 이클립스가 곧바로 범인을 체포했다는 발표한 후 사건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자료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채로. 하다못해 원래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다. 체포된 후 죄인 후송 마차에 갇혀 성으로 끌려왔을 때 루이카엔은 먼발치에서나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과 몸은 시커멓게 탄 것처럼 흉하게 일그러져 성별을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비밀리에 처형된 후 사건은 은폐됐다. 제국민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 현장에 있던 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마을은 고립된 위치에 있어서 그 존재를 아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마을 외부에 있던 유족들에게도 제국은 큰 사고가 있었다, 라고 둘러댔을 뿐이었다.
그 모든 주도는 루아 이클립스와 대공 슈베이만이었고, 황제는 그것을 묵인했다. 그냥 넘어갈 규모의 사건이 아니었지만 황궁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음..."
두터운 카펫에 그의 발소리가 묻혔다. 루이카엔은 연도별로 나눠진 구간을 살피며 서가들 사이를 걸었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서가 위에 붙여진, 연도를 나타내는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곧 그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의 자료가 모여있는 지점에 멈춰섰다.
큰 건 기대할 수 없지만,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하다못해 그 당시의 기록이 삭제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한다면 대충 수확은 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루이카엔은 가죽끈으로 묶인 종이뭉치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때.
"뭘 찾고 있는 거지?"
".....!"
루이카엔은 움찔했다.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음성은 그도 익히 잘 아는 자의 것이었다. 채 무슨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여, 안녕."
"폐... 폐하..."
멍하니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 라이펜은 싱긋 웃으며 손을 살랑 흔들어 주었다.
"소드마스터 씩이나 되서 사람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오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기사단장 실격 아니야?"
루이카엔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만 같았다. 대꾸를 기대한 것은 아닌지 라이펜은 어깨를 으쓱하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폐하... 어떻게."
루이카엔이 간신히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그는 픽 입꼬리를 올리고 루이카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곧 툭, 서가에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라이펜의 금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움직이는 장기말의 위치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순간 등줄기가 얼어붙을 듯 오싹해졌다. 잠깐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던 라이펜은 곧 표정을 풀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루이카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라이펜이 다시 거리를 두자 루이카엔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 수가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 경비병들에게 미리 명해 뒀지. 네가 오면 지체하지 말고 보고하라고. 그러니까 밖의 녀석들은 원망하지 마."
"그 말씀은, 역시 제가 이곳에 오리란 걸 알고 계셨단 거군요."
그는 딱딱하게 물었다. 루이스가 주문한 것은 라이펜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루이카엔이 이 곳에 온 목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확신했다. 라이펜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얼마 전 루이스가 다녀갔단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 네가 내 눈을 피하려는 이유도 그렇고."
"......."
루이카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펜는 몸을 돌려 느긋한 걸음걸이로 책장 사이를 느릿느릿 빠져나갔다.
"루이랑 너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진 모르겠지만 설마 진짜로 파헤치려고 할 줄이야. 하여튼 그 녀석도 못 말린다니까."
라이펜은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루이카엔의 눈에는 그가 마치 먹잇감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여유를 부리는 맹수처럼 보였다. 그 사냥감이란 건 나인가. 루이카엔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파면이라도 하시게요?"
"아니. 그럴 리가. 아깐 그냥 농담한 것 뿐이야."
측면으로 언뜻 보이는 황제의 수려한 얼굴에는 좀처럼 읽어내기 힘든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원래부터 저런 인간이었지. 루이카엔은 새삼 자각했다. 그 발톱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아서 실감하지 못했을 뿐.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던 그는 열람자를 위해 놓인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라이펜이 가까이 오라는듯 살짝 고갯짓을 했다. 루이카엔은 서두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섯 걸음쯤을 남겨두고 멈춰서자 라이펜은 푸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알고싶어?"
"네?"
뜬금없는 말에 루이카엔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라이펜은 팔을 지지대 삼아 뒤로 편안하게 기대고 장난기 어린 곡선을 입가에 드리웠다.
"내가 이제와서 사실을 은폐하려는 이유."
"....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루이카엔은 의심쩍게 눈썹을 휘었다. 잔뜩 날을 세운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라이펜은 킥킥 소리를 냈다.
"내 편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가르쳐 줄게. 그러니까 더 이상 파고들 생각은 하지 마.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너 혼자만 알고 있어 줘. 루이스나 아시엘에겐 말하지 말고."
"거절한다면요?"
"어쩔 수 없지."
지나치게 간단한 답에 루이카엔은 황당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라이펜이 한 발 먼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거야. 다 알게 된다면."
라이펜은 그 탐스러운 에메랄드빛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더듬더듬 간신히 물었다.
"어째서, 입니까?"
"루이스의 명령으로 네가 알아내려던 건, 루이스가 알아서는 절대 안 되는 사실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난 널 믿으니까. 부하로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어쩔래, 하고 묻는 것처럼 라이펜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눈 앞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아찔한 느낌에 루이카엔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입을 막기 위해 진실을 가르쳐 준다- 라이펜 다운 방법이었다. 교활하고, 잔인하고 또 확실했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루이카엔이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루이카엔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피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이펜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미소에는 약단의 씁쓸함 역시 녹아있었다. 그는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리며 익살스레 말했다.
"첫 번째로 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을 축하해. 루이카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베스트리그 감사합니다
제목은 침착했지만 저는 침착하지 못합니다 야후!!!!! 끼얏호!!!
10월 30일부터 계속 이 상태입니다. 짱짱 신나요ㅠㅠ 근데 한편으론 좀 무섭기도 합니닷 괴물같은 작가님들이 엄청 많은데 나 여기 있어도 되나??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다 틀리는 저도 괜찮은 건가요ㅠㅠ
중3 겨울때 가볍게 시작한 글이 리메이크되고 또 2년이 지나 저는 지금 3학년이고 무려 베스트리그까지 올라왔네요. 감개무량하면서 매우 황송하네요. 이 모든게 다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사랑해요!!! 를 백번 외쳐도 아깝지 않아요!!!
고3이고, 음악전공이라 실기준비도 해야해서 잠시 휴재 중이지만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감사글을 남겨봅니다(사실 얼마 전까지 엄청 툴툴거렸거든요 베스트리그 가고싶어얽 하면서ㅎㅎ).
완결될때까지 가능할까 했는데 소망을 이루게 도와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당!! 길고 모자란 글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글쓰기 팁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감상 비평해 주셔서 퀄리티를 올리는 것을 도와주신 작가님들께도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어째 수능도 잘 볼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에요!
수능 후에도 실기시험이 1월까지 있지만 그래도 전 돌아옵니다! 11월 셋째주 월요일에요! 수능 끝나자마자 글 쓸겁니다ㅠㅠ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어설픈 작가 가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