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79. 움직이다(1)
시간은 천천히 흘러,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다. 후카덴 백작은 뒷짐을 지고 서서 바쁘게 오가는 하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지금 성의 작은 홀에는 조촐한 만찬이 준비되고 있었다. 유령 소동을 성공적으로 잠재워 준 셀레니스 기사단에 대한 감사, 란 명목이었다. 덕분에 몇 년동안 쓸 일이 없어 먼지만 쌓여가던 홀을 청소하느라 오랜만에 영주성이 분주해졌다.
"하아..."
이런 걸로 과연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후카덴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립이 시작된 후, 그는 정치적으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며 백성들을 돌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런 해괴한 일이 생겨버렸고, 결국 황제에게 뒷덜미를 잡힐 각오를 하고 셀레니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건만 정작 큰 기대를 걸고있던 기사들은 어째 죄다 허술했다.
첫날에는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나간다며 의욕을 불태우더니 결국 허탕이었고, 다음날에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다 다시 야밤에 외출해서는 하나를 그쪽에 잡혀버린 채 돌아왔다. 신뢰를 까먹기에는 충분했다.
"괜찮으련지...."
백작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토했다. 그들이 부탁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조촐한 연회를 보여주기 식으로나마 열어줄 것, 그리고-
그쪽은 베스토가 지금 기사들에게 가 있으니 어떻게들 될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 다 때려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일단, 이 아이입니다만."
베스토는 자신의 등 뒤에 숨은 소년을 기사들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카이스와 케빈, 오스카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리자 소년은 어깨를 움츠렸다.
"저... 필요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요. 센이라고 합니다."
"흠..."
케빈은 턱을 쓰다듬으며 소년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마른 체격, 작은 키, 큰 눈과 밀색 금발. 조금 그을린 동그란 얼굴에는 주근깨가 다닥다닥 자리잡아 딱 그 나잇대의 소년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카이스에게 힐끗 곁눈질을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네. 얼굴만 잘 가린다면요..."
"어떻게든 될 것 같네.
카이스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오스카 역시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센은 불안하게 베스토와 세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전 뭘 하면 되나요?"
"흠, 별 것 아니야. 이름이 센이라고 했던가? 나이는?"
"14살이요."
그가 소심하게 대답하자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아이를 앉히고 자신 역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센이 겁먹지 않게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넌 오늘 저녁, 이 성에서 열릴 연회부터 내일 아침까지 '아시엘' 인 척만 해 주면 돼."
"네?"
센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시엘은 또 누구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 척 행동하라니. 하지만 그가 당황하건 말건 케빈은 미리 준비해뒀던 아시엘의 제복을 내밀었다.
"별 거 아냐. 음... 너한테는 좀 크려나. 어쨌든 이걸 입고 연회에 참석한 다음에 오늘 밤, 우리랑 같이 성을 나서. 그것만 실수 없이 해준다면 5골드를 줄게. 말은 탈 줄 알지?"
".....!"
생각보다 엄청난 액수에 센은 숨을 들이켰다. 그는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스카와 케빈은 씨익 웃으며 흡족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이 백작에게 부탁한 것은 두 가지. 작은 규모의 만찬을 최대한 '요란하게' 준비하기, 그리고 옆 영지에서 아시엘과 비슷한 체격의 소년을 고용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경비는 셀레니스 기사단의 활동비로 부담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최대한 존재감 없이 움직였지만 지금은 셀레니스 기사단이 영지에 왔다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게 목표였다. 자고로 존재하지만 잠잠한 적보다 나 여기에 있소, 하고 시끄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적에게 더 방심하기 쉬운 법이었다.
사람이 하나 모자라는 문제는 대역을 세우자는 카이스의 의견으로 해결했다. 그 결과가 센이었다. 베스토가 직접 옆 영지로 가서 성벽에 난 개구멍을 이용해 은밀하게 데려온 것이었다.
"애초에 그 튀는 외모를 닮은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이니까... 얼굴은 어떻게 가리지? 행동이야 뭐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굳이 연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부상당했다고 하고 붕대를 감는 게 어떨까요. 눈은..."
케빈의 말에 대꾸하며 카이스는 의자에 앉은 채 굳어버린 소년을 빤히 응시했다. 센은 찔끔하면서도 그를 마주보았다. 독특한 붉은색 머리칼이 그의 하얀 얼굴과 대조를 이루었다. 잘 생겼다, 센은 상황도 잊고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뒤의 오스카와 케빈 역시 꽤 호남형이었다. 카이스처럼 잘생겼다 싶을 정도로 미남은 아니었지만 긴 팔다리와 백색의 제복 겉으로도 보이는 탄탄한 어깨가 남자답다는 느낌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지 카이스와 두 남자는 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센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차려입은 세 사람의 등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의 눈에는 굉장히 멋있게 보였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센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한 소년의 장래희망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하하..."
루이카엔은 속이 빈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해가 떨어진 밤, 식어버린 공기 속 새하얗게 얼어붙은 별이 하늘에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어째서일까. 모든 것들이, 심지어 자신의 머릿속마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싸늘했다.
"하아아..."
결국 공허한 웃음은 한숨으로 끝을 맺었다.루이카엔은 침체된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구름 뒤에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심결에 주먹을 꽈악 쥐었다. 손톱이 살에 파고들이 고통이 느껴질때 쯤에야 그는 움찔하며 손을 풀었다.
"하하하하... 이게 뭐래."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린 루이카엔은 휘청휘청 걸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황제 폐하의 고귀한 면상을 한 대 세게 후려치고 싶다는 충동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원래 그런 인간인 줄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사람을 이용하는. 그런 뱀 같은 사내. 언제나 얼빠진 면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쪽이 라이펜의 본질이었다. 그는 언제나 장난스럽게 남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했다. 벗어날 수 없도록,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젠장..."
그리고 루이카엔 역시 그 덫에 보기좋게 걸려들었다. 결론적으로는 루이스와 아시엘을 위해서-인것 같지만, 루이카엔은 목에 밧줄이 걸리고 말았다. 착잡한 마음에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 시선을 정원으로 돌렸다.
낮에는 언제나 떠들썩하지만 직무를 보던 귀족들이 돌아가고 하인들마저 일을 거의 다 끝낸 이 시각, 황궁은 고요했다. 구름이 어느정도 물러갔는지 살짝 고개를 내민 달빛이 나뭇잎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이 정원은 황자궁과 가까이 있는 곳이었다. 루이카엔은 이곳을 지나가다 종종 말싸움을 해 대는 아시엘과 유트리안을 볼 수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서로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핏대를 세워 가며, 잔뜩 골이 난 얼굴을 한 채 두 소년은 서로를 한껏 쏘아보았다. 비꼬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디까지나 평범한 아이들처럼 그렇게.
허공만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갑자기 움찔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불투명하던 그의 눈동자가 잠깐 예기를 발했다. 주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간간히 벌레가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려올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 속을 노려보던 루이카엔은 곧 픽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꽤 훈훈한 장면을 회상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세상은 혼자 궁상떠는 것도 못하게 하네."
아무래도 철부지 황자님을 찾아온 온 불청객이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