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0. 움직이다(2)
인기척 없는 궁,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이들은 천천히 이동해 황자궁의 코앞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경비병 세 명을 죽이고 그 시신을 조경용 수풀 속에 숨겨두었다.
황성의 경비는 삼엄했지만 베테랑 암살자인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호위로 붙어 있다는 기사가 없는 이 시기가 황자를 없애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들은 대공 측에 선 암살 길드에서 가장 최고의 실력을 가져 개개인이 웬만한 기사 다섯 사람은 거뜬히 상대할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실패란 있을 리 없었다.
"이 너머인가."
"그렇다."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물음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우두머리는 뒤에 숨어있던 나머지 셋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손을 들어 답하고 저마다 품 속에 갈무리 해둔 암기를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척 없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타나기 전까지.
"거기 아저씨들, 멈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그들은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분명 방금까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진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남자가 암살자들의 진행 방향 정면에 버티고 서 있었다.
"밤마실이라도 가?"
이죽이는 듯한 그의 어조에 암살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암기의 끝자락이 달빛에 미미하게 반사되어 차가운 빛을 냈다. 남자, 루이카엔은 픽 입꼬리를 올리고 검을 뽑았다. 스르릉- 싸늘한 쇳소리가 밤공기에 스며들었고 그의 도신 역시 월광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저런 꼬마랑 장난치는건 재미 없잖아. 대신 나랑 노는 건 어때, 형씨들? 밤놀이라면 나도 꽤 좋아하거든."
달그락. 술잔에서 얼음들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자신의 침소 테라스에 앉아 무심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라이펜은 손에 든 글라스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색의 투명한 위스키가 달빛을 받아 금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꼭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잔의 움직임에 따라 그것은 조금씩 색을 바꾸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루비가 되었다가 차가운 피를 닮은 잔인한 적색이 되기도 했다. 라이펜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반응이 꽤 재밌었어, 루이카엔 꼬마."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동공은 루이카엔으로서도 차마 숨기지 못한듯 했다. 라이펜은 잔을 빙들빙글 돌리다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금발, 반짝이는 적안과 해맑은 미소를 가졌던 여인.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성격은 누구보다도 소박했던-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던 그녀. 그런 일을 이야기해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생생하게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 알고 있는 것 마냥 잘난 체 했지만, 제일 모르고 있는건 나야. 라이펜은 실소했다. 아마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형, 슈베이만일 터였다. 그녀는 그의 소유인것 같았으니. 아니, 그녀를 소유하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했다.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한 여자니까. 마치 그 녀석처럼-
"죄인은 누굴까."
라이펜은 흥얼거렸다. 취기가 오른 그의 금색 눈동자는 저 하늘의 싸늘한 달과도 닮아 있었다.
자신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여자. 그녀는 결국 제국을 두 개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요정처럼 나타났던 여자는 불행의 시작이 되어 불꽃으로 화했다. 그 두 사람이 가진 죄의 무게는 이 분쟁의 끝에서 제국을 손에 거머쥔 남자에게로 향할 터였다. 그리고 라이펜은 생각했다. 이미 더러워진 손에 두 사람 몫 정도를 더 얹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그렇지? 누군가에게 말을 건 라이펜은 잔을 비웠다.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루이카엔도 초대할걸 그랬나. 생전 처음 구경한, 그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마치 환청처럼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생긴 황제폐하는 여기서 뭘 하고 계시나? 땡땡이 쳐요?"
황제가 되고 채 몇 달이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골치 아픈 생각에 빠져, 궁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어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처박혀 있었는데 느닷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래하는 것처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어떻게 여기에 있냐고 라이펜이 채 물을 새도 없이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화사한 금발, 인간에게서는 처음 보는 붉은 눈동자. 허공에서 뿅, 나타난 요정같은 자태였다.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저도 좀 끼워주면 안 될까요? 사실 저도 도망 나왔거든요."
호기심이 든 라이펜은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그녀는 정말로 기쁜 것처럼 활짝 웃더니 자신을 셰린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아이처럼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날씨가 좋네요, 황제님 정말 잘 생겼다, 등등.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다 그녀는 왔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으앗! 벌써 시간이! 이런 말을 외치며 발딱 일어나서는 정원 바깥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라이펜이 쫒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런 식의 만남이 세 번. 항상 갑작스레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졌다. 수소문을 통해 그녀가 슈베이만과 접점이 있을 거라는 어렴풋한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 라이펜은 그 밖의 사실은 전혀 캐내지 못했다. 그저 슈베이만의 종이나 노리개 쯤 되려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비정기적으로 라이펜을 찾아와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그녀를 만난 마지막 날 딱 하루,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이었다.
"저 이제 못 올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멋지지 않아요?"
신난듯 툭 내뱉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제 2궁- 대공전에서 하인 하나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그녀가 이야기했던 그 사랑하는 사람일 터였다. 그 뒤로 라이펜은 영영 셰린을 볼 수 없었다.
몇 년 후. 하노빌 백작의 영지가 초토화되는 사건이 터졌다. 구석진 마을에 자리잡아 외지인들은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가 신고를 해 오기 전까지는. 루아 이클립스가 그곳으로 출동했고 라이펜은 치료원에 틀어박힌 생존자를 만나러 혼자 은밀하게 움직였다. 루아 이클립스가 지나치게 빠른 움직임을 보인 게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금발에 붉은 눈의 여자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고 생존자는 간신히 말했다. 괴상한 마법을 쓰며 마을을 박살냈다고. 라이펜은 직감으로 그 여자가 그녀임을 알아차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생존자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고 루아 이클립스는 현장에 남아 있던 범인을 성으로 압송해 왔다.
호송마차에 실려 있던 그의 모습은 전신 화상을 입은 것처럼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반짝이던 눈동자는 빛을 잃고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몸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이 녹아버렸다.
158명을 혼자 살해하고 마을을 파괴한 그녀에게는 화형이 선고되었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혼자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라이펜도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도. 그리고 십 수년 후- 그녀와 똑 닮은 소년이 가장 친한 친우의 아들로서 셀레니스 기사단에 발을 들였다. 셰린과 똑같이 읽어내기 힘든 미소를 짓는 그 아이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처음 본 순간, 그는 아시엘이 셰린의 혈육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본인은 사건 전후의 기억이 말끔히 사라진 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하필 그녀의 아이가 루이스에게 주워지고 그 결과 이 난장판의 가운데에 서게 되었다니. 우연이라면 기이했고 운명이라면 기구한 일이었다.
그 어미가 슈베이만의 손아귀 안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라이펜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1년 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공은 휘하의 기사들을 시켜 마치 수거하듯 범인을 잡아들였다.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조차 라이펜은 파악하지 못했다. 단 하나 알고 있는 것은 슈베이만이 아시엘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것. 하지만 대공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회유하려 하거나 하다못해 죽이려고 시도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전의 암살자 소동은 하노빌 백작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었으니 대공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형님.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라이펜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취기가 오른 머릿속에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종소리처럼 울려퍼졌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된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로 저와 함께 가실 거에요?"
응. 그러려고 했어, 유리아. 라이펜은 그녀에게 대답했다. 곁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는 아릿하게 저려왔다. 마치 밤하늘같이 검푸른 생머리를 가진 소녀는 질투에 눈이 먼 검에 죽어버린 뒤에도 종종 그를 찾아들곤 했다. 라이펜은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죄 많은 여자지만, 너무나 사랑했고 지금은 증오하는 여자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사실 황제 따위엔 관심이 없었거든. 다 버리고, 빌어먹을 황제 자리는 슈베이만에게 넘겨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와 함께. 하지만- 슈베이만 역시 그녀에게 구애를 해 왔다. 주제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 맹세하며 밤하늘을 닮은 소녀에게 사랑한다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위해 세상을 가지겠다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남자를 택했다.
선택의 밤이 지나고 며칠 후. 황제가 차를 마시다 급사하는 사건이 터졌다. 슈베이만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밝히겠다며 검을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라이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황태자 자리를 받은 상태였고 범인이 누구인지도 빤히 알고 있었지만 그는 황제가 될 생각도, 결코 좋은 아버지도 황제도 아니었던 남자를 위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와 함께 지긋지긋한 황성을 떠날 계획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슈베이만의 검은 여자가 속한 가문에게 겨누어졌고, 반역자 집안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일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안이한 판단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최고의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라이펜은 스스로 황제를 자처했다. 한 여자 때문에 모든 책임을 모른척 버려뒀던 그는 자신의 목에 황금빛 족쇄를 채우고 쇠사슬을 달았다. 정신차리고 보니 피 묻은 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고, 끝없이 늘어진 사슬이 슈베이만과 그를 함께 얽어맸다. 애초의 목적조차 잃어버리고, 그렇게.
"하하... 하."
라이펜은 공허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 때문이라고, 이제는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를 탓할 수도 있게 되었다. 조용한 대립 속 에서 죽어간 이들은 다 네 탓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비난도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이젠 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녀의 존재는 가슴 깊이 박혀버렸다.
의무적으로 황후를 맞고. 적당히 대해주고 유트리안이 태어났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몸이 약했던 황후가 죽고 아들만이 남았을 때도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장인인 파슬렌 공작도, 황후도 라이펜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피차 마찬가지라 서로 원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인 공존 쯤으로 황후와 황제의 관계가 굳어져 갔다. 그리고 후일, 몸이 약했던 그녀는 일찍 죽어버리고 그녀의 소생인 유트리안이 남았다.
적어도 아들인 유트리안은 진심으로 아낀다고 라이펜은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아들의 관계 사이에도 유리아의 망령은 유리 조각처럼 파고들어 있었다. 끝끝내 라이펜은 그녀를 떨쳐낼 수 없었다. 제국을 갈라놓은 그녀는 자신의 손길에 닿은 것들을 천천히 썩게 했다.
너를 증오해. 하지만 사랑해, 유리아. 이건 아마 네가 내린 저주겠지.
라이펜은 혼자 중얼거리며 킬킬거렸다. 형제는 반목하고 제국은 망가져 간다. 이 연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하얗고 붉은 사냥개들 뿐이었다. 오물 속에 목까지 파묻힌 자들을 수호하며 진흙탕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짖어대는 사냥개들이.
"그래, 사냥개일 뿐이다."
친구의 아들이자 이용 가치가 많은 장기말. 황제 라이펜에게 아시엘의 존재는 그런 의미였다. 인간적으로서는 그저 놀려먹기 좋고, 착해 보이지만 의외로 성깔 있는 꼬마, 그 정도면 족했다. 그에게 그 이상의 다른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무의미했다. 마치 셰린처럼.
무너지지만 마라. 라이펜은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위스키가 색깔을 바꿨다. 금빛 반짝이는 적색에서 흡혈귀의 음료같은 색이 되었다가 다시 금빛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