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94화 (19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3. 보이지 않는 손(1)

"고개를 들어라."

제스퍼의 명령에 사람들은 일제히 자세를 바로 했다. 그 틈에 섞인 아시엘은 고개를 들고 다시 단상으로 시선을 주었다. 꺼림직하게 그를 곁눈질한 제스퍼는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오늘 흉흉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우리의 히스 신도가 영주와 셀레니스 기사단의 손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이다."

설마 그가 직접 이야기를 꺼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아시엘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켕기는 곳이 있을 게 분명한데 이런 언동이라면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는 뜻이거나 그 이상으로 뻔뻔하다는 말이았다.

"히스 신도가 유령 소동을 조작한 범인이라고 하며 그들은 그를 깊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할 심산인 모양이더군. 그리고 오늘 밤, 그들에게 감사한다며 백작이 만찬회를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그니스 님을 따르는 자들 중 악인은 없다."

네놈이 악인이잖아. 웃기지도 않는 소리에 아시엘은 코웃음을 쳤지만 곁의 세이라와 다른 신도들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바깥에 있는 셋도 꽤 고달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께서 행한 일을 감히 한낱 인간의 속임수로 치부하고, 우리들의 신도를 모독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어리석은 이단들은 모두 거부했다."

화르륵. 화로의 불이 크게 일렁였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지하에서 불을 피우는데도 공기가 탁해진다는 감각은 없었다. 아시엘은 무심한 눈으로 턱을 괴고 열띤 연설을 토해내는 제스퍼를 바라보았다.

"유령 소동은 이그니스 님이 내리신 벌. 신께서는 당신을 부정하고 핍박하는 영주에게 분노하셨다. 우리는 그를 회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그니스 님은 말씀하셨다. 형제간에 사랑하고 사람 간에 신뢰하며 가족과 이웃의 구분 없이 아끼라 하셨다. 이그니스 님을 믿는 자, 삶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사후 영생을 얻는다. 모든 것은 그 분의 뜻, 삶과 죽음도 그분의 뜻이니..."

두서 없는 연설이 아시엘은 점점 지겨워졌다. 아카데미 이사장님도 저것보단 훨씬 낫겠다. 긴장을 풀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세이라를 힐끗 곁눈질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거리며 제스퍼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시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모든 영지민들이 모인다고 했는데 세이라보다 어린 아이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어린애들조차 부모의 품에 코를 박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역시 애들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아시엘은 상황도 잊고 킥킥 웃었다. 순수해서 속기도 잘 속는 게 어린아이들 이지만 그래도 역시 때타지 않은 마음들은 신에게 의존하기보다 밖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할 테니까.

아시엘은 크게 하품을 하고 다시 시선을 단상 쪽으로 돌렸다.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 뜻모를 말을 쏟아내는 제스퍼.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저런 류의 인간이 주물러서 마음대로 하기엔 편하지. 제스퍼는 제멋대로에다 자신이 잘났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래서 잘만 꼬드긴다면 최고의 인형이 될 수 있는 타입이었다. 아시엘은 저런 멍청이조차 쓸만하게 만들어놓은 에쉬리아라는 여자가 새삼 궁금해졌다.

'세이라는 우리가 유령을 퇴치하러 왔다고 했을 때 아무런 거부감도 보이지 않았었지.'

지금 제스퍼가 해 대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대충, 유령은 신이 분노해서 나타난 것이고 그것을 고작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영주는 엄청난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세이라는 유령 소동을 해결하려 왔다는 네 사람에게 어떠한 적의도 나타내지 않았다.

"으음..."

그것도 역시 어려서, 라는 이야기인가. 아시엘은 힘겹게 결론을 내렸다. 판단력이 흐려진 지금 그녀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건 그저 그렇구나, 하고 쉽게 받아들여 버리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시엘이 신음소리를 내자 세이라가 인상을 쓰고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으헉!"

"오빠, 설교 중이잖아요!"

그녀는 예상 외의 공격에 움찔하는 그의 귀에다가 대고 나무랐다. 네. 네, 작은 소리로 부루퉁하게 대꾸한 아시엘은 등받이에 몸을 턱 기댔다. 어느새 영양가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교주의 연설이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는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 어리석은 영주는 곧 이 영지를 망치게 될 것이니! 우리는 신의 아래에 뭉쳐야 한다. 악인들에게 신의 힘을 보여줄 때가 곧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아시엘은 미간을 꿈틀했다. 순간적으로 제스퍼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곧 그의 목소리가 다시 홀 안에 울려퍼졌다.

"이방인들을 경계해라. 그들은 타락한 바깥 세상에서 온 자들이니 곁에 둔다면 함께 타락해 후에 파멸하게 된다."

누구누구랑 놀지 마, 하는 애 엄마도 아니고. 아시엘은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금의 발언은 명백히 그를 겨냥한 말이었다. 이 사람들은 절대로 말에 홀린 게 아냐. 아시엘은 이제 확신했다. 저런 녀석의 혀놀림 정도로 영주민들 대부분을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 이그니스 님을 받드는 사람들 중 악인은 없잖아요?"

제정신인 사람의 한 마디. 아시엘이 툭 던진 말로 좌중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제스퍼 역시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해 말도 잊고 멍하니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추스린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무, 무슨 소리냐!"

"이그니스 님을 받드는 이들 중 악인은 없다. 아까 부교주 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외지인이라도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악하지 않아요. 저 역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이고."

그가 차분하게 대꾸하자 세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의 신도들 역시 동요했는지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경악하는 제스퍼를 향해 미소지었다. 내가 뭘? 이라고 묻는 듯한 순진무구한 얼굴이었지만 아마 동료들이 봤다면 몸서리를 쳤을 터였다. 제스퍼는 가능하다면 당장에 뛰어가서 그 얄미운 낯짝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방금의 외부인을 배척하라는 말씀은 외부에서 온 신도조차 받아들이지 않으시겠다는 것 같아서요. 이그니스 교를 믿는 자는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온 자는 모두 악이다.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

제스퍼는 이를 악물었다. 하긴, 정말 그렇네, 이런 말들이 그의 귀에 흘러들었다. 꽉 쥔 그의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고 신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오, 빠?"

"쉿. 가만히 있어, 세이라. 곧 폭발할 것 같으니까."

세이라가 더듬더듬 부르는 목소리에 아시엘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뭐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듯 했지만 세이라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콰아앙! 제스퍼가 지팡이로 사납게 바닥을 때렸다.

"조용! 성전 안이다, 이 무슨 무례냐! 신께서 노하신다!"

그 한 마디에 홀은 쥐 죽은듯 조용해졌다. 제스퍼는 분노를 품은 얼굴로 아시엘을 무시무시하게 쏘아보았다.

"애송이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서 끼어드는 것이냐! 봐라, 어리석은 이들아! 외부에서 온 자가 방금 성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전 신전을 더럽힌 불경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그니스 님을 따르는 자라도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거네요. 저 역시 그를 따르는 미천한 자 중 한 사람이니까."

"네가 말로만 그리하는지 진정으로 신을 따르는지, 아땋게 아느냐!"

바보같은 자였다.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고 단상 위에서 씩씩대는 그를 응시했고 격분한 제스퍼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숨막히는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사람들은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시엘과 제스퍼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거라, 아시엘은 짐작했다. 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거네요. 히스 님 역시 진정으로 신을 따랐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 역시 악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유령 사건을 조작한 범인일 가능성을 놓아서는 안 되죠. 물론 저도 히스 님을 믿고 있지만, 단순히 가능성의 이야기에요."

"말하지 않았느냐! 유령은 신이 분노해서 내린 벌이다! 그리고 잘난 듯이 떠들고 있는 넌, 너 역시 의심받아 마땅할 존재가 아니냐!"

잠깐 제스퍼를 향해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아시엘에게로 모였다. 잠깐 무심한듯 주변을 훑어본 그는 곧 항복이라는 신호로 가볍게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렇죠. 제가 경솔했네요. 죄송합니다."

전날에 보여준, 불을 소환하는 그 '기적'의 효과가 어느 정도나 통할지. 아시엘의 시야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부교주와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이 들어왔다. 만약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면 말을 꺼내기도 전 그 자리에서 쫒겨났을 판이었지만 지금의 아시엘은 신의 힘을 다스리는 사제였다. 신에 대한 신앙이 절대적인 지금 신도들의 그에 대한 신뢰 역시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아시엘이 붙잡힌 처지였지만 자신의 논리를 유지하려면 제스퍼는 그를 함부로 내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은 다시 제스퍼를 주시하고 있었다. 제스퍼는 이를 우득 갈아붙였다. 셀레니스의 똘마니인가 했더니 들리는 정보로는 파견된 네 명의 기사 모두가 만찬에 참석했다고 했다. 평범한 옆마을의 꼬맹이라고 치부하기엔 마법을 쓰는 능력이나 외모가 지나치게 범상치 못했다. 설마 대역을 썼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그로서는 아시엘이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장애물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쯧! 오늘 설교는 이만 마친다."

꽝! 다시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찍은 그는 옷자락을 거머쥐고 몸을 팩 돌려 홀을 빠져나가버렸다. 뒤따라 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는 무시했다. 멍청한 인간들. 꼬맹이 주제에  아무리 날뛰어도 어차피 이 곳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제스퍼는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만약 셀레니스의 사주를 받은 아이라고 해도 이 영지를 교단의 손에서 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붙잡고만 있는다면 그 역시 조만간 충실한 그의 하인이 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비식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계획의 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어차피 오래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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