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4. 보이지 않는 손(2)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른 제스퍼는 계단을 내려가 아랫층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곧 익숙한 호화로운 문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는 다소 거칠게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망할 꼬맹이."
어차피 제 손아귀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짜증이 치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스퍼는 겨우 손에 잡힌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한 듯, 예리한 듯 고혹적인.
"심기가 불편해 보이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제스퍼는 홱 몸을 돌렸다. 손에서 열쇠가 떨어져 땡그랑, 소리를 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경악한 표정의 그를 힐끗 쳐다보고 졸지에 바닥을 뒹구는 처량한 신세가 된 열쇠를 곁눈질한 그녀는 다시 제스퍼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야, 못 볼걸 본 사람처럼."
"너, 너, 너 언제 돌아왔어? 오래 걸린다면서!"
제스퍼가 더듬더듬 외치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긴 머리를 쓸어올렸다. 제스퍼는 일순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얼굴을 맞대고 지낸지 꽤 오래 되었지만 그 외모만큼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유리 도자기같은 하얀 피부에 앵두처럼 새빨간 입술. 엉덩이까지 흘러내리는 보랏빛 머리칼과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에 선명한 빛의 눈동자, 볼륨감 있는 몸매. 남자라면, 아니 같은 여자라도 시선을 빼앗기는 게 당연할 만했다.
하지만 곧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엉뚱한 노릇이였지만 그녀의 숨넘어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서 방금까지 말싸움을 벌이던 소년이 떠오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운, 하얀 얼굴의 소년. 제스퍼는 쯧 혀를 차고 떨어진 열쇠를 주웠다.
"내가 자릴 비운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영지가 꽤나 시끄럽던데."
"쳇. 성가신 일이 생겼어."
다시 열쇠구멍에 열쇠를 쑤셔넣고 문을 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그녀- 에쉬리아는 새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성가신 일이라... 그건 윗층이 소란스러운 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뭐?"
제스퍼가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그녀는 살짝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쿵, 쿵. 묘한 울림이 전해져 내려왔다. 이 위는 지하 2층, 몇몇을 제외하고 평범한 영지민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제스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 썩을 꼬맹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부교주가 휑하니 모습을 감춰버린 직후, 집회장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차마 누군가가 나서 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회장을 감쌌다. 꾸벅꾸벅 졸던 어린애들도 깨어나 의아하게 눈을 꿈뻑거렸다. 물론 이 상황을 만들어 낸 당사자는 혼자 태연자약하게 앉아 사람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솔직히 반쯤 도박이었지만 일단 한 번 떠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더욱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런 헛소리를 그 이상 들어주기 힘들었다는 것이 갑자기 나선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결과는, 이렇게. 아시엘은 턱을 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사제님!"
"어?"
순간 아시엘은 고개를 들긴 했지만 그가 지칭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고요를 깨뜨린 그는 물론이고 홀 내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아시엘은 엥, 하고 바보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얼빠진 얼굴의 그를 너무나도 곧은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며 남자는 열의에 차 외쳤다.
"사제님! 신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말씀? 누구 말씀? 신의 말씀? 아시엘은 일순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하지만 그런 그의 상태와는 관계 없이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그에게 존경스럽다는 눈빛을 마구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부디 저희에게 설교를!"
"이그니스 님의 말씀을 설파해 주십시오!"
"모자란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헐. 아시엘은 경악해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에 그는 곁의 세이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역시 오빠는 이그니스 님의 참된 사제였어요! 부교주 님 말씀도 좋지만 오빠도 저희한테 신의 말씀을 가르쳐 주세요!"
"아냐. 난-"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한 후의 대참사였다. 아시엘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찬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고 집요하게 그를 따라붙었다.
"사제님, 그러지 마시고!"
"부디 부탁드립니다!"
"어제는 기적을 보여 주셨지 않습니까!"
"아.... 그건.... 조금 곤란한데."
아시엘은 애매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덥썩. 그의 옷깃을 강하게 붙잡는 손 하나로 탈출 시도는 허무하게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저, 좀 놔주시..."
"말씀을 주십시오! 저희같은 어린양은 설교에 목말라 있습니다!"
아시엘이 떼어내려 애썼지만 손의 주인은 더욱 더 세게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아, 망했네. 아시엘은 허망하게 웃었다. 그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내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신앙에 불타는 뜨거운 공기는 전혀 식지 않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살면서 이렇게까지 선망에 찬 눈빛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예, 제가 사제입니다! 하면서 설교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죄송합니다! 화장실이 급해서!"
스스로도 영문 모를 말을 외치며 그는 파박,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하지만 신도들은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아아!"
"저희에게 한 말씀이라도 주시고 가셔야지요! 사제님!"
"쫒아라!"
사람들은 우르르 일어나 그의 뒤를 쫒았고 바야흐로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뻗어오는 손을 피하고, 껴안으려는 팔을 떼내고 아시엘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쿠웅! 그가 무심결에 걷어찬 객석 하나가 넘어져 뒹굴었고 또 거기에 발이 걸린 사람들이 그대로 미끄러지며 뒤엉켜 넘어졌다.
우당탕탕, 쾅! 예사롭지 않은 소음에 무심코 뒤를 돌아본 아시엘은 기겁하고 말았다. 얌전히 앉아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사람들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했다.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광기 어린 눈으로, 얽히고 설켜 바닥을 뒹굴면서도 그에게 집념의 손을 뻗고 있었다. 히이익, 질겁한 아시엘은 지체하지 않고 문 쪽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신도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잡아! 붙잡아!"
"왜 이러시는 거에요!"
아시엘은 무거운 문을 밀치고 복도를 달렸다. 그리고 약 3초 후. 콰앙! 문이 다시 한번 거칠게 열어젖혀지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홀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게 뭐야, 왜 이러는 거야! 전혀 계산하지 못했던 상황에 아시엘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물음표를 계속 그렸다. 말 몇마디 했다고 어떻게 이런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는 건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했던 거라곤 단지 말꼬리 잡기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붙잡히면 망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최대한 빨리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길 소원하며 죽기살기로 뛰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복도는 계속되었고 이 신전의 구조도 제대로 모르니 길을 찾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분명 빠르게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추격자들의 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름 기사를 자처하는 주제에 일반인들 상대로 마법을 퍼부을 수는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사제님! 기다리십시오!"
"어째서 도망치십니까!"
거칠게 욕을 뱉어낸 아시엘은 뒤에서 들려오는 아우성과도 같은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잡히면 망한다, 임무고 뭐고 인생부터 망한다! 어차피 사기꾼 집단에 속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철썩같이 믿는 사기꾼 집단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사기꾼이란 것이 발각된다면 당장 꽁꽁 묶여서 거꾸로 매달릴 터였다.
그 순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에게 있어 한줄기 빛이었다. 아시엘은 난간을 짚고 점프해 순식간에 반쯤 내려간 지점에 착지한 후 다시 달렸다. 출입 금지라고 했으니까 설마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그런 생각에 아시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사제님! 놓치지 않습니다!"
"하하..."
어이가 없다 못해 감탄스러울 정도의 집념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그는 다시 튀어나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시 좁은 2층 복도에서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사제님!"
"작작 해요, 진짜!"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들에게 아시엘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하필면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힘이 빠진 그의 발이 꼬이고 말았다. 아. 몸이 기우뚱하며 앞으로 확 쏠렸고 아시엘은 그대로 철푸덕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잡았다, 사제님!"
"으아아, 오지 마요!"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우르르 달려들자 아시엘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이제 설교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광신도 무리에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 누군가가 넘어진 소년과 열정에 불타오르는 신도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란인가요?"
낭랑하고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 그녀의 음성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가 뜨거운 공기를 식혀버렸다. 폭주하던 신도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우뚝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넘어진 그대로, 아시엘은 의아하게 갑자기 나타난 묘령의 여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살짝 미소지어 주고 대중들에게 말했다.
"그는 아직 소년이에요. 너무 곤란하게 하지는 맙시다. 자, 어서 돌아가요. 여기는 당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잖아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어조에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천천히 홀로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그녀는 아직도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아시엘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당신이네요, 제 교단에 끼어든 말썽꾸러기가. 설마 이렇게 작은 꼬마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 당신인가요? 이 교단의 주인이."
아시엘의 물음에 그녀, 에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어때요, 함께 차라도 들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