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96화 (19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5. 보이지 않는 손(3)

지하 3층, 음습한 통로를 지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두 개의 방. 그 중 다른 한쪽보다 큰, 고풍스러운 조각으로 장식된 오동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웬만한 황족 부럽지 않게 화려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탈 샹들리에, 손으로 깎아 만든 나무 책상과 의자. 벽지는 고급스러운 적색이고 먼 동쪽 나라에서 건너온 듯한 장식품들이 적당한 자리에 진열되어 있었다. 방의 구석에 자리잡은 5명 정도는 가뿐히 누울 수 있는 침대 역시 이국에서 온 물건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손님용 테이블에는 아시엘과 에쉬리아가 마주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값비싼 찻잔에 수입해 온 홍차를 앞에 두고 그들은 20분째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주시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인 제스퍼 역시 둘 사이에 흐르는 오묘한 공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아시엘은 에쉬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랏빛이 돌지만 흑색에 가까운 긴 머리칼과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 읽어내기 힘든  눈동자. 육감적인 몸매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가슴이 푹 파이고 몸에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천박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우아한, 신비로운 마녀같은.

"특이한 눈을 가졌네요, 당신은."

먼저 말문을 튼 것은 아시엘이었다. 그는 에쉬리아의 눈을 관찰하듯 응시했다. 기본적으로는 짙은 녹색이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빛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군청색으로 보이기도 했고 그녀의 머리칼과 같은 보랏빛이 되기도 했으며 때때로는 그 모든 것이 섞여 영롱하게 반짝였다. 에쉬리아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지만 당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요. 정말 순수한 불꽃같은 붉은색이라니. 금가루를 뿌린 루비같아요. 꼬마는 정말 인간인가요? 그것보다 제스퍼에게 소년이라고 들었는데 솔직히 그것도 믿기 힘들어요. 이렇게 예쁜 얼굴이라니."

"안타깝게도 남자고, 인간 맞아요."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을 들었다.

"이곳까지는 어떻게 오게 된 거죠? 설마 정말 있지도 않은 신을 좇은 건 아닐테고."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없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헛수고니까. 당신은 신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쪽일 테니. 신 같은 것에 매달릴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보낸 것 같진 않아요."

아시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씨익 미소를 그렸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는지 에쉬리아는 느긋한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는 누구고, 이곳에 침입한 목적은 뭐죠?"

"-아시엘."

잠깐 뜸을 들이다, 아시엘은 간단하게 툭 내뱉았다. 언뜻 들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 음절에 에쉬리아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아시엘은 여유롭게 덧붙였다.

"꼬마 같은게 아니라 아시엘입니다. 나머지는 직접 알아 보시던가요."

그의 붉은 홍채가 도발적으로 반짝였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고 방 안에는 다시금 숨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탁, 탁, 탁, 탁,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가르고 건조한 공기에 기계적인 파동을 만들어 냈다. 또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에쉬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밖에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이 파견을 나와 있다고 들었어요. 유령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인 히스 씨를 체포하고 오늘 저녁 간단히 연회를 가진 후 바로 철수했다고 해요. 처음에 찾아온 사람은 넷, 나간 것도 넷. 제일 작은 금발 소년은 무언가에 의해 부상을 입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고 병사가 말하더군요. 그건 아시엘과 관련이 있나요?"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아시엘은 피하지 않고 받아냈다. 곧 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자세를 편하게 했다.

"글쎄요, 어떨까요."

"당신이 그들의 동료라면 지금 당신이 이 곳에 있는 이상 순순히 돌아갔을 리 없죠. 더군다나 히스가 붙잡혔다면 그에게서 교단에 대해 들었을 텐데도."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녀의 눈매가 곡선을 그리는 것을 무심하게 응시하던 아시엘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그에 대한 신뢰가 없네요."

"그는 믿을 만 한 자가 아니니까요."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시엘 역시 그에 동의했다. 붙잡힌 그는 약간 협박을 하자마자 쉽게 교단에 대해 털아놓았으니. 에쉬리아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런 이에게 쉽게 믿음을 줄 리 없었다.

"교만은 제가 공들여서 만든 믿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에요. 역시 급하다고 아무렇게 끌어다 쓴 말은 오래 가지 못하네요. 여왕의 위치까지 들켜 버리다니."

"여왕의 위치를 들켰다 해도 별로 상관 없는 것 아닌가요? 전 지금 잡아먹힌 말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리고 공들여서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람의 마음의 틈을 쥐고 흔들어 이용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제 그들에게 신은 삶의 전부에요. 아시엘도 그들에게 딱 잘라 신은 없다, 라고 말 할 수 없겠죠. 어린애인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아시엘은 대꾸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읽어내기 힘든 그의 붉은 눈동자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에쉬리아의 눈동자가 공중에서 얽혔다. 그녀는 먼저 시선을 거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영지는 거대한 체스 판. 교단은 제 말이에요. 저는 흑의 여왕, 차례차례 백을 먹어치워서 이제 상대는 백성도, 신의도 심지어는 아내도 잃은 왕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 와중에 당신은  이 체크메이트인 판에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든 돌이에요. 아마 영주가 불러들인 거겠지만."

"......."

"솔직히 아까는 조금 황당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잠시나마 여왕의 행세를 했죠. 어리석은 병사(폰 Pawn)들이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마터면 비어 있던 왕의 자리를 빼앗길 뻔 했어요. 당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그거 유감이네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아시엘이 답했다. 에쉬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제가 돌아왔고.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문제는 없어요. 그러니까 포기하는 게 어때요?"

"이런 건 제자리라고 하지 않아요. 저라면 몰라도, 자유로운 사람은 체스 말 따위가 아니니까."

아시엘은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밀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손도 대지 않은 내용물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전 비유하자면 나이트(Knight) 에요. 제 킹(King)은  세세한 지시를 내리진 않아요. 알아서 전진해, 방해되는 것은 치우고  적의 목을 가져와라.  이것 뿐이죠."

"호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명령이 떨어졌으니, 저 역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죽든 적이 죽든 둘 중 하나가 끝날 때까지 달릴 수밖에."

"그거 유감이네요."

에쉬리아가 아시엘의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그녀는 그의 찻잔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제스퍼가 기겁하건 말건 그대로 잔을 뒤집어 차를 카펫 위에 그대로 쏟아버렸다. 후두둑. 곧 달콤한 향이 방에 가득 퍼졌고 깨끗하던 바닥에 검은 얼룩이 졌다.

"이건 간단한 시험이었을 뿐이에요. 앞으로 당신에게 제공될 음식에는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할 테니 안심해도 좋아요."

"당신 입장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절 죽이는 게 낫지 않아요? 귀찮은 짐도 덜고. 당신을 따르는 신도들도 여왕인 당신이 있는데 저같은 게 죽는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요."

아시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는 에쉬리아는 텅 비어버린 잔을 다시 테이블에 돌려놓고 싱긋 웃었다.

"그야 그렇지만, 게임은 공평한 게 재미있잖아요? 잠깐의 유희 정도는 즐겁게 해야죠. 그리고-"

그녀는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갑작스레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미미한 온기가 느껴지고 에쉬리아의 옅은 향수 냄새 역시 맡아졌다. 아시엘은 상황도 잊고 고개를 갸웃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때 그녀의 입술이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에쉬리아는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가볍게 콕 찔렀다.

"전 예쁜 아이와 미소년을 좋아하거든요."

난데없는 말에 잠깐 벙쪄있던 아시엘은 곧 얼굴을 와락 구기고 그녀의 손을 쳐냈다. 후후, 웃음소리를 낸 에쉬리아는 순순히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아시엘은 언짢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가 닿았던 곳을 쓱 문질렀다.

"저도 하나만 물을게요. 믿지도 않는 인간을 불러 유령 소동을 일으킨 이유는 뭐죠?"

"글쎄요."

에쉬리아는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뒤로 길게 늘어진 검은 드레스 자락이 카펫을 쓰다듬었다. 긴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 가볍게 흔들렸다. 새빨간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그런 에쉬리아의 모습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농담처럼 마지막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직접 알아보는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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