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6. 보이지 않는 손(4)
"그, 그냥 보내도 되는 거야?"
문이 닫히고 아시엘이 방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제스퍼가 입을 열었다. 에쉬리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살살 쓰다듬으며 새로 생긴 카펫의 얼룩을 내려다 보았다.
"시도는 했어. 그는 영리하고 예민해. 함부로 건들이려 하면 금세 알아차리고 발톱을 들이댈 걸."
"그럼 어떻게 하라고..! 마법사라니까!
"그건 걱정 마."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새하얀 손가락이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내가 설마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고 생각해?"
"뭐?"
제스퍼는 멍하니 되물었다. 그제서아 쏟아진 차에서 풍기는 지나칠 정도로 달콤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향은 이미 방 전체에 퍼진듯 했다. 보통 차를 쏟는다고 해서 이렇게 냄새가 심하던가? 멍하게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움직이던 제스퍼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닫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에쉬리아는 킥킥 웃었다.
"손 안에 두기엔 너무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고양이니까."
카펫의 얼룩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마르며 점점 작아지다 곧 완전히 흔적을 감췄다.
후카덴 백작령 성벽 밖. 밤을 넘어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고요한 밤하늘을 간간히 찢는 들짐승들의 소리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새카만 칠흑 속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군락을 이룬 수풀 속에 지어진 허물어져가는 판잣집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작은 집에 몸을 숨긴 네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밖에서 덜덜 떨 뻔했네."
"내 말이. 바람이라도 막는 게 어디냐고."
케빈이 투덜투덜거리는 말에 오스카가 동조했다. 바닥에 작게 피워놓은 불을 살피던 카이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는 몸을 말고 쿨쿨 잠든 센이 작게 코를 골고 있었다.
이 판잣집의 존재를 알려 준것은 베스토였다. 옛날 사냥꾼이 쓰다 버린 이 집은 허술한 외견과는 다르게 의외로 그들이 은신처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방도 따로 없는 단순한 직사각형 구조에다 가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쓰레기들이 굴러다닐 뿐이었지만 수풀 속에 숨겨진 덕분에 바깥에서 이 집을 찾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애는 해 뜨면 내보내죠. 너무 늦었으니까."
"아시엘 보모라서 그런가 은근슬쩍 애 돌보는데 익숙하단 말이지."
카이스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케빈이 킬킬 웃었다.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 그는 선배에게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보모 같은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 녀석은 돌본다고 말할-"
갑자기 그는 말을 멈추고 황급히 품을 뒤졌다. 오스카와 케빈은 의아해져 눈만 깜빡이다 곧 카이스가 꺼내든 목걸이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 끝에 매달린 붉은 물방울 장식이 미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엘이다! 카이스는 곧바로 통신을 연결했다. 아니나다를까 곧 익숙한 소년의 미성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밖에서 선배들이랑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시엘! 괜찮아? 별 문제는 없어?"
쯧, 거칠게 혀를 차는 소리가 귀걸이 너머로 들려왔다. 순간 카이스는 얼굴을 굳혔지만 곧 이어지는 친구의 음성에 표정을 풀었다.
[어어.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철수했다는 소릴 들었는데.]
"아- 그. 이쪽 나름대로 작전을 세웠어."
카이스는 오스카와 케빈에게 힐끗 곁눈질을 하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시엘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는지 톡톡 하는 소음이 간간히 들려왔다.
[대충 예상했던 대로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훨씬 좋지만... 미안, 아무래도 너랑 선배들이 고생한 만큼의 효과는 안 나올 것 같아.]
"뭐? 무슨 소리야?"
[그 교주란 여자가 돌아왔거든... 아무래도 반쯤은 간파한 것 같아.]
카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쪽에서 후우, 하는 한숨소리가 전해져 오더니 곧 아시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이때까지 교단에서 있었던 일과 에쉬리아에 대한 정보를 간단하게 카이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카이스의 첫 소감은 간단했다.
"....뭐랄까, 참 너답다고 해야 하나..."
[지금 시비거는 거야?]
"아니. 미안."
노골적으로 심기가 불편한 듯한 목소리에 그는 치밀어오르는 말들을 우겨 넣고 단박에 사과를 건넸다. 그래도 같은 편에서 이런 말 한다고 욕을 먹을 만 한 일이지만 솔직히 마음에도 없는 신의 종 노릇을 하면서 사기꾼과 그 희생양들을 사이에 놓고 도박을 벌이다니, 제정신이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카이스는 소년의 짓궂은 행태에 실컷 속이 뒤집어졌을 제스퍼라는 사람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그래서, 그 에쉬리아란 여자가 교주란 말이야?"
[어. 생각보다 골치 아플것 같아.]
"뭐?"
[...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어쨌든 가능하면 그녀에 대해서 조사 좀 해봐. 그만큼 튀는 외모면 어디서든 눈에 띄겠지. 그리고 통신은 내가 먼저 걸 테니까 웬만하면 그때까지 기다려줘. 귀걸이가 통신용인걸 들키면 이래저래 곤란해지니까.]
"알았어. 이제부터 넌 어떻게 할 거야?"
[일단 교주가 어떻게 사람들을 홀렸는지부터 찾아볼려고.]
할 수 있는건 얼마 없겠지만, 아시엘이 쓰게 덧붙였다. 답지 않게 자신 없는 말이었다. 카이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선배들이나 너나 몸 조심해. 대역으로 쓴 애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줘. 응징은 나중에 천천히 할 테니까.]
뚝. 그것을 마지막으로 통신은 매정하게 끊겨 버렸다. 목걸이를 내려놓는 카이스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역시 화 안 풀렸구나. 어째 죽지 마, 내가 죽일 거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한참동안 묵묵하게 있자 불안해진 케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뭐래?"
".... 일단 마지막 말은 빼고. 아무래도 일이 조금 급해진것 같은데요. 그쪽에서 알아차린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평소와 다르게 말끝을 흐리자 케빈과 오스카는 의아한 빛을 띠었다. 카이스는 눈을 데굴 굴려 지저분한 바닥에서도 숙면을 취하는 센을 힐끗 보았다. 빌려 입은 아시엘의 흰 제복은 그에게는 조금 헐렁했다.
"녀석은 괜찮다고 하지만... 조금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요."
짧은 연락이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평소보다 아시엘은 훨씬 예민해져 있었다. 다소 날이 선 목소리에서는 언제나와 같은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다는 것은 아마도 항상 하는 거짓말.
"문제?"
"제 짐작일 뿐이지만요."
오스카가 묻자 카이스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에게서 이상을 감지한 순간 그 역시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우습게도 확신할 수도 없는 어줍잖은 감 때문에.
"후우-"
괜찮다, 라. 귀걸이를 놓은 아시엘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곱씹었다. 이것저것 다 제쳐놓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리 괜찮지 못했다. 다시금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그는 이마를 짚었다. 에쉬리아의 방에서 나와 다시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온 직후 이상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아픈 것도 아니고 몸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이질적인 뭔가가 흐름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에쉬리아가 카펫에 쏟아버린 차. 거기엔 기화성의 독이 들어있었다. 아마 마력을 흩어버리는 효과가 있는. 두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니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애초에 아시엘이 마시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것이었다. 하하, 젠장. 제대로 한 방 먹었네. 아시엘은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 때문에 굳은살이 박힌 새하얀 손은 평소와 같았다. 다를 것은 없었다. 문제가 있는 것은 내부였다. 마법을 익힌 후로 언제나 공기처럼 함께하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용도 해보고 간단한 마법도 시전해 보려 했지만 번번히 체내의 흐름을 막는 무언가에 막혀버렸다.
완전히 무력해졌다. 몸싸움도 꽤 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믿고 있던 검과 마법 둘 다 차단되어 버렸으니 솔직히 정신이 아찔했다. 이제 남은 것은 며칠전부터 혹사당하는 중인 머리밖에 없었다. 아시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맨몸으로 바위산에 박치기 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여기에서 멈춘다면 아시엘 아르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상황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힘이 들어간 주먹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