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198화 (19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6. 보이지 않는 손(5)

해가 뜨고 셀레니스 기사단 생활관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아델레트는 언제나처럼 기상시간에 맞춰 일어나 간단하게 준비한 후 로비로 나왔다. 죽어도 늦잠을 자고 죽겠다는 기사들의 모토에 맞게 생활관은 고요하기만 했다. 평소라면 아시엘이 소파에 앉아 졸고 있거나 어울리지 않게 기상이 이른 케빈이 뱀과 장난을 치고 있을 터였지만 오늘은 둘 다 파견 상태니 인기척이 있을 리 없었다. - 없는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

아델레트는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소파에 걸터앉은 누군가의 인영을 발견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늦잠이라면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단장이었다.

"루이카엔? 왠일이야? 이렇게 일찍."

"뭐야.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루이카엔은 돌아보지도 않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은것 같아 아델레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니까. 말 돌리지 마."

"왜 무슨 일이 있다고 단정하는건데."

웃음기를 섞어 대꾸하는 그를, 아델레트는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뒤통수 뿐이었다. 그녀는 척척 걸음을 옮겨 그의 맞은편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젯밤엔 어디 갔던 거야?"

"잠깐 폐하 만나러. 뭐... 잠깐이 아니게 되버렸지만."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회색빛 눈 아래가 어째 쾡해보여 아델레트는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뭐야, 못잤어?"

"어. 밤늦게 들어왔는데 아침에 폐하를 뵈러 가야할 것 같아서 그냥 안 잤어."

"하룻밤 샜다고 얼굴 꼴이 말이 아닌걸 보니 너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아델레트가 놀림조로 말하자 루이카엔은 큭큭 웃었다. 평소와 같았지만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을 감지한 아델레트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자 가르쳐주지 않을 게 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결국 그녀는 답답함에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 뭔진 모르겠지만 애들 나오기 전에 얼른 씻어. 냄새 나니까. 밤에 누구 상대로 피바람을 냈어?"

"아. 그냥, 좀."

멋쩍게 뒷통수를 긁적인 루이카엔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대로 씻으러 갈 생각인듯 했다. 아델레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다친 곳도 없어 보였고 하얀 셔츠와 그의 옆에 걸쳐진 제복 겉옷 역시 깨끗했지만 미미하게 풍겨오는 혈향은 숨겨지지 않았다. 얼마나 난리를 쳤으면, 그녀는 혀를 쯧 찼다. 버릇처럼 괜찮다는 말을 하는 입술은 언제까지 거짓말을 해 댈지.

그때, 갑자기 생활관 문이 콰앙! 열어젖혀졌다. 아델레트와 루이카엔은 움찔하고  몸을 돌렸다.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병사가 숨을 몰아쉬며 문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헉, 헉, 화, 황자궁 뒤뜰 장벽에서 시신 다섯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나 즉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신?"

아델레트가 의아하게 되묻다가 아차하고 루이카엔을 보았다.  그는 덤덤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말했다.

"어젯밤 황자궁을 습격하려 하던 암살자들이다. 사용하는 무기도 그렇고 검기를 운용하는 걸 보니 지난번에 아시엘 경이 체포한 놈들보다 두 등급 정도 위야. 적어도 AA급 이상. 폐하께 가서 그렇게 보고해. 우연히 그 근처에서 노닥거리던 루이카엔이 무사히 처리했다고."

"아..."

병사는 순간 벙찐 얼굴을 하다 곧 정신을 차리고 경례를 올렸다.

"예, 예! 그럼 폐하께 그렇게 고하도록-"

"아, 아니다. 그냥 내가 갈게."

루이카엔은 씻으러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제복을 제대로 걸쳤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에게 다가간 그는 장난스레 씩 웃었다.

"뭐해, 안 가?"

"아, 아 네!"

병사는 앞서가는 루이카엔을 황급히 뒤따랐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아델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휴-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AA급 암살자 다섯이라."

라이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툭 던져버리고 아침부터 쳐들어 온 방문자- 루이카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난번에 왔던 녀석은 -A급이었지."

"그랬죠."

루이카엔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마치 전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라이펜은 질렸다는듯 힘빠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다섯 상대하느라 마검사 아시엘 아르셰인 경은 너덜너덜해졌는데 말이야. 2급이나 높은 녀석들을 상처 하나 없이 도륙을 내 놓다니, 괴물같은 녀석."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암살자들은 각 실력에 따라 랭크가 나뉘어져 있었다. D, C, B, -A, A, AA, S. 황궁에 침투하는 것은 -A급 이상. -A급도 혼자서 일반 병사 여럿을 가뿐히 해치울 수 있는 실력자지만 AA급은 가장 높은 S급의 바로 아래인 만큼 골치 아픈 상대였다. 그걸 모르지 않는 라이펜이 눈을 가늘게 뜨자 루이카엔은 어깨를 으쓱했다. 둘 사이에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감돌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먼저 다시 입을 연 쪽은 라이펜이었다.

"소매."

"네?"

"오른쪽 소매에."

의아하게 눈을 깜빡인 루이카엔은 손을 들어 소맷자락을 확인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깨끗해야 할 소매에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얼핏 봐서는 모를 정도로 작았지만 하얀 제복인 만큼 꽤 눈에 띄였다.

"깔끔하게 했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깔끔이라고. 아침에 시체 발견한 놈들이 얼마나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알기나 하냐? 넌 화풀이를 그런 식으로 해?"

"어차피 살려두지도 않을 거였잖습니까. 살려둘 수도 없었고. 전 아시엘 녀석처럼 순진하지 않아서요."

루이카엔은 팔을 내리고 씩 웃었다. 라이펜 역시 턱을 괴고 입꼬리를 비대칭으로 들어올렸다.

"꼴을 보아하니 대충 생각 정리는 한 모양이지, 루이카엔 꼬마."

"별 수 있나요. 체스말은 주인 뜻에 따라 춤을 출 수밖에."

"네가?"

하, 라이펜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잘도 그러시겠다."

"뭐, 그건 두고 봐야 알죠... 이 시점에서 폐하가 저한테 그 이야기를 하신 목적은 대강 알겠지만 나머지는 감이 안 잡히거든요."

"네가 알아낸 내 목적이 뭔데?"

"요컨대, 필사적으로 숨기라는 거잖아요? 녀석을 지키고 싶다면."

틀리지 않은 말이았다. 소년이 초대형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여기저기에서 개떼처럼 물고 늘어질 인간들이 분명히 생길 터였다. 그렇게 되면 그를 양아들로서 거둔 루이스 역시 위험해지게 될 게 뻔했다. 애초에 범죄자의 자식은 황궁 출입부터 불가능하니. 확실한 것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호오. 난 살짝 걱정했는데. 완전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고려는 했어요. 루이스 경께 알린다, 아시엘의 행적을 조사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16살밖에 안 된 데다 기억도 없는 녀석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래서, 결국 모른 척 하겠단 결론이 나온 이유는?"

"루이스 경께 알려도 일이 커지는 문제만 생길 뿐이죠. 어쩌면 그분이 직접 녀석을 데리고 떠나버릴지도 모르고. 그건 폐하께서도 결코 바라지 않으시잖아요."

"그렇지."

라이펜은 헛웃음이 비져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두 사람 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꽁꽁 묻어두고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며 말해서도 안 되는 것. 라이펜은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너나 나나 멍청한 건 어쩔 수 없어. 꼬맹이 하나 정도는 신경도 안 쓰고 치워버리면 되는데."

"제가 멍청한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정말 의외는 폐하이신데요. 역시 루이스 경 때문입니까?"

루이카엔의 눈은 라이펜에게 묻고 있었다. 굳이 위험을, 귀찮은 일을 감수하려는 이유를. 라이펜은 켁,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저주받았네 뭐네 해도 말이야. 내가 아는 적안은 맑고 깨끗했으니까. 삭막해진 이 제국에서 마지막 남은 동화를 믿고 싶은 유치한 기분이지."

루이카엔은 표정을 살짝 굳혔다. 힐끗 그를 곁눈질한 라이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가벼운 어조로.

"루이카엔. 알고 있지? 지키고 싶다면 경계해. 품에 꼭 안고있지만 언제라도 목을 틀어쥘 수 있도록. 녀석의 씨앗이 슈베이만 형님 쪽에 있다면- 내 말 알지? 상대는 인간이 아니야."

"... 어린애 데리고 무슨 짓을 하자는 건지. 어른 둘이 말입니다."

입술을 슬쩍 들어올린 루이카엔의 회색빛 눈동자가 차갑게 날이 섰다.

"당신의 측근이라는 입장상, 제가 아시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폐하께서는 짐 하나를 덜어 놓으셨네요. 꽤 골치 아프셨나 보죠?"

"부정은 안 할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힘, 그걸 슈베이만이 손에 넣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그려졌거든."

라이펜은 펜을 도로록, 손 안에서 굴리며 빙그레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 이 엿 바꿔먹어도 시원찮을 세상과 암살자 하나 못 죽이는 어린애를 몰아넣는 상황이 뭐같은 것 뿐이니까... 이것저것 다 빼고 그 녀석이 평범한 꼬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루이카엔은 잠시 라이펜을 응시했다. 그 두 눈 속에는 은근한 열기와, 분노 그리고 입 밖으로 내고 싶은 수없이 많은 말은 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살짝 한숨을 내 쉬고 경례를 올려붙였다.

"분부하신 대로.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파견에서 애먹고 있다며? 아시엘. 힘 내라고 전해 줘."

곧바로 몸을 빙글 돌리려던 루이카엔은 멈칫하고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그대로 황제에게 등을 지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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