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7. 실마리(1)
끼이익-쾅. 집무실의 문이 등 뒤로 평소보다 다소 거칠게 닫혔다. 문지기 병사가 자신을 의아하게 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루이카엔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차피 다 시험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나. 일부러 황자를 막무가내로 맡긴 것도, 황실 전용 도서관의 출입증을 쉽게 내어준 것 역시. 처음에는 신뢰가 바탕으로 깔려 있는, 아시엘과 루이스를 곁에 붙여두기 위한 것 정도로 여겼지만 방금의 대화로 모든 게 정리됐다. 그 정 반대였던 것이었다. 라이펜은 미끼를 던져주고 그 뒤의 행동. 얼마나 책임감 있게 움직이느냐, 이걸 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대공의 아래에 있었던 수수께끼의 여성, 그 여성과 빼닮은 소년. 여성은 실종 얼마 후에 대형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고, 아이는 그 당시의 기억이 씻어낸 듯 사라져 있다. 그들의 뒤에 있는 것은 대공 슈베이만과 그 알 수 없는 힘- 흑마법과 아직까지 베일에 가려진 마족들이었다. 직접적인 연관은 아직 칮을 수 없지만.
루이카엔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시엘이 마족으로 의심된다고 꼽았던 아울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일전 파티장에 나타나 게르만이라는 상인에게 그 구슬을 넘겼다던. 그 남자는 정말로 인간이 아닌 무언가일까. 그런게 정말로 존재할까? 이미 한참 전에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새삼 의문이 스멀스멀 솟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난."
루이스 경이랑 약속했잖아, 지켜주겠다고. 나 자신도 지키겠다고. 루이카엔은 미간을 주물렀다. 황자를 대하는 순수할 정도의 태도를 보면 아시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황실 전용 도서관에 들어가는 건 그 혼자라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시엘은 충실하게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모든 걸 짊어지고 애처로울 정도로 꿋꿋하게, 웃으면서 앞을 향했다. 소년은 스스로의 힘으로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갔다. 황제 역시 그것을 외면할 생각은 없는듯 했다. 더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자 루이카엔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지금 황제가 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도 아시엘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바뀔 건 없었다. 루이카엔 그 스스로의 시선을 제외하고는.
유트리안은 자신의 정원에 앉아 한가로운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추워지기 전이라 날씨도 적당했고 볕도 좋았다. 억지를 부려 끝끝내 선생도 돌려보내버렸다. 아시엘이 있었다면 잔소리를 해 댈 일이었지만 어차피 그는 자리를 비웠으니 황자를 통제할 자는 없었다. 덕분에 시종들과 하녀들의 한숨만 늘어갔다.
"황자님은 외출같은거 안 해?"
"귀찮아."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트리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말을 건 소년은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생긋 예쁘게 웃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바깥엔 재밌는게 많은데."
"됐어."
유트리안은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했다. 정원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그 다음날, 그러니까 바로 어제부터 갑자기 저 꼬마가 황자궁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12살쯤 되었을까, 새하얀 머리칼에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처음에는 그 화려한 외모와 하얀 색채 덕분에 얼이 빠지고 말았지만 최근 아시엘과 얼굴을 맞대고 지내서 그런지 금세 적응했다. 그렇게 등장한 꼬마는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나타났다.
"아침마다 잘도 오는구나, 넌. 병사들이 들여보내지 않았을 텐데."
"그야 난 요정님이니까."
소년, 에스테반은 몇 번째 반복하는 말을 내놓았다. 나무 아래에 팔을 베고 하얀 고양이처럼 길게 누운 아이는 보랏빛 눈을 데굴 굴렸다. 잠깐 그를 못마땅하게 보던 유트리안은 포기하고 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쯤 되면 이제 쫒아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꼬맹이였다. 아시엘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엉뚱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지만 그와 같이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언제나 있었던 것처럼 유트리안의 주변에 스며들어 버렸다. 짜증이 날 정도로 귀찮아도 덕분에 아시엘이 파견을 떠난 후 찾아든 적적함이 사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늘도 안 와? 황자님의 호위 기사."
"아직 일이 안 끝났겠지. 바쁘다는 모양이니까."
유트리안은 시큰둥하게 책장을 넘겼다. 아이는 아쉽다는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언제 온대?"
"내가 아냐. 시끄러우니까 꺼지던지 아니면 조용히 해."
"나도 그 기사님 보고 싶은데."
"시끄럽다니까."
"기사님은 황자님보다 일이 더 좋은가 봐."
"일에 좋고 싫은게 어디 있냐. 어차피 내 옆에 있는 것도 일의 일환일 뿐인데. 그쪽이 우선순위였을 뿐이야."
팔락, 책이 또 한장 넘어갔다. 에스테반은 눈을 데굴 굴렸다. 잠깐 정원은 조용히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잠시 후 에스테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황자님, 그러고 보니 얼마 뒤에 바깥에서 축제같은게 있대."
"축제?"
유트리안이 의아하게 되묻자 에스테반은 뒹굴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야시장이라고 하던가. 매달 하는 건데, 이번달에도 곧 열린다나."
"야시장?"
"전 제국의 상인들이 모여들어서 온갖 것들을 팔아. 먹을 것도 많고 볼것도 많고. 상인들이 가진 희귀 물건들 따라서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어.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것도 볼 수 있어. 책이나, 약재나, 장신구같은 것도 있고! 밤에 열리는데 빛도 반짝반짝해서 꽤 장관이라나 봐."
"......"
유트리안은 뚱한 표정이 되었다. 항상 지내는 게 황궁이다 보니 온갖 별난 물건이 모여들었고-라이펜이 괴짜라 더더욱 그랬다- 왁자지껄하거나 복잡한 것은 애초부터 좋아하지 않는 그였다. 에스테반은 생글 웃었다.
"궁금하지 않아? 황자님 아직 안 가봤지?"
"별로. 지저분한 건 질색이야."
"그래? 아쉽네."
에스테반은 입맛을 쩝 다시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황자님 항상 궁에만 있으니까 외롭지 않아? 외출도 제대로 못 해보잖아."
이번에는 유트리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듯 에스테반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그렇지? 있어봤자 하인들이나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귀족들밖에 없고. 황제 폐하는 바빠서 제대로 신경도 못 써주지?"
"상관 없어. 지금 와서 새삼. 요즘엔 짜증날 정도로 떽떽거리는 녀석이 들락거리니까 심심할 틈도 없다고. 파견 나가니까 좀 조용할까 싶었더니 얼마 안가 네가 들이닥쳤고."
"하지만 난 곧 사라질 건데. 그리고 황자님이 말했잖아. 기사님이 황자궁에 오는 건 일 때문일 뿐이라고. 별로 황자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나, 보고 싶어서가 아니잖아. 친구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어라, 정말 그렇네."
에스테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하얀 머리칼이 한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황자님 진짜 친구가 없네."
"시끄럽다니까. 그런 거 필요 없어.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거야."
"그럼 이런건 어때?"
유트리안이 퉁명스레 말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듯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 작은 기사님이랑 같이 가보는 건?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필요 없어. 별로 바라지도 않아."
"거짓말. 그치만 황자님, 친구가 없으면 쓸쓸하잖아. 기사님은 친구도 있고, 선배들도 있어서 즐거워 보이던데. 또 모르잖아, 사실 기사님이 황자님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지."
베시시 미소짓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트리안은 곧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에스테반은 잠깐 그를 빤히 바라보다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 황자님이랑은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아이답지 않은 웃음을. 에스테반은 읏차- 하고 몸을 일으켜 옷을 툭툭 털었다. 유트리안은 미간을 살짝 모았다.
"뭐해?"
"슬슬 가려고. 내일, 또 그 기사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올게, 황자님."
에스테반은 살짝 손을 흔들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황자는 그를 잡지 않았다. 병사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어떻게 나갈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에스테반은 몸을 빙글 돌렸다.
"또 봐."
소년의 보랏빛 눈동자에 순간 붉은색이 서렸다가 곧 자취를 감췄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시엘은 세이라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아침이 밝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는데 그래도 피곤한 몸은 수면을 절실하게 요구했던 모양이었다.
타박타박,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소녀의 발자국 소리는 평소보다 잘 들려왔다. 아시엘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벅벅 긁는 사이 문이 달칵 열리고 세이라가 들어왔다.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응. 잘 잤어?"
아시엘이 맞아주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가지고 온 식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제 갑자기 에쉬리아 님이 돌아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에쉬리아 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별거 아니었어. 그냥 이것저것."
뭔가가 억누르는 듯한 가슴의 답답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력 운용도 여전히 불가능했고 방을 샅샅히 뒤져도 쓸만 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놓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우니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아시엘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눈앞에 놓인 따끈한 수프와 빵, 샐러드가 놓인 간편한 식사가 보였다. 세이라가 눈을 반짝였다.
"맛있겠죠!"
"그러네.."
아시엘은 스푼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장난질을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일단 배부터 채우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쥐구멍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니. 없다면, 스스로 뚫으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