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89. 실마리(4)
"뭐야,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뒤에 물러나 있던 오스카와 카이스가 사람들을 헤치고 케빈에게 다가갔다. 그는 말없이 두 사람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디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스카 역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기겁했다.
"야, 야, 뭐야 이거? 왜 갑자기, 하필 이 타이밍에?"
"뭔가... 연관이 있어 보이죠?"
카이스의 조용한 물음에 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종이를 빼앗긴 병사는 황당한 얼굴로 다시 안내문을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형씨? 혹시 지원하게? 용병이야?"
"아니, 그건 아니고. 미안하게 됐어."
케빈이 대충 손을 휘젓자 병사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영문을 몰라하는 센을 질질 끌고 구석진 자리로 가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공교로운 것도 정도가 있지... 옆 영지에서는 사이비교가 판을 치고 있는데, 여기서는 모병 중이라고?"
"후카덴 백작은 완전히 힘을 잃은 상태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은밀하게 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불법이지 않습니까."
오스카와 케빈의 말에 카이스가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두 선배는 조개가 된 마냥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잠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등하는듯 눈동자를 데구룩 굴린 오스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야 그렇지. 하지만 지금 황실의 내부 분열 때문에 이런 지방은 황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해."
"중앙은 오히려 두 수장 사이에서 눈치싸움하는 귀족들 덕분에 권력이 폐하와 대공 전하께 몰려 있는 상태지만. 내쳐지면 곧바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격이니까 말이야."
케빈이 덧붙이자 카이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파와 대공파로 갈라진 귀족들은 서로 간에도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파의 귀족이 만에 하나라도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면 대공파의 귀족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케빈이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후카덴 백작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어. 좋게 보면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거지만 나쁘게 본다면 자신의 뒷배가 없는 셈이야. 그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황제파, 대공파 중 하나가 공격을 가한다면? 귀족들이 입을 다물면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만약 안다고 해도 두 분은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할거야. 이득이 되거든."
만약 다른 쪽의 귀족에 의해서 중립 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선심쓰듯 손을 내밀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세력이 중립 귀족을 정복한다면 그 말대로 순수하게 자신의 힘이 키워져서 좋다. 휘하의 귀족들의 세력은 곧 황제와 대공의 세력이 되는 거니까.
"아아..."
카이스는 꺼림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평화 운운 하면서도 황제와 대공은 오히려 중립 귀족과의 분쟁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영지의 후작은 어느 쪽 사람인데요?"
"그게 말이지."
케빈은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카이스가 의아하게 오스카를 올려다 보자 그도 곤란하다는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지? 눈만 깜빡이던 그는 문득 품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목걸이를 꺼내자 아니나다를까, 물방울 장식품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시엘로부터의 호출이었다.
아시엘은 에쉬리아가 나간 뒤 한참 후에야 간신히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식은땀이 후두둑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일단 돌아가야 했다. 세이라가 돌아오기 전에.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그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에쉬리아가 버리고 갔는지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아시엘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마 이 두사람은 꽤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주변을 살필 새도 없이 방으로 돌아온 아시엘은 곧바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직도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축축해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불행 중 다행인가... 세이라가 오기 전에 도착했네."
의미는 없는것 같지만. 그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가로 걸어가 푹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애써 머리를 휘휘 털어 정신을 되찾은 후 품에서 빼돌린 약초를 꺼내 자세히 살폈다. 역시 자신으로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아시엘은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 귀걸이로 손을 가져가 통신을 걸었다. 연결되자마자 카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엘? 괜찮아?]
"어어. 바깥은 어때?"
그렇게 대꾸하며 그는 침대 맞은편에 놓인 거울을 힐끗 곁분질했다. 거울 속의 소년은 초췌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이 몰골을 이녀석이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아시엘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침 잘 됐어. 지금 후카덴 백작령에서 나와서 셰단 후작령에 와 있거든? 근데 문제가 좀 있는것 같아. 후작이 영지전을 벌일 모양인지 병사를 모으고 있어. 상대는 후카덴 백작이고.]
"영지전?"
아시엘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상황에 그렇다면 역시 셰단 후작과 에쉬리아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는 또 한가지를 떠올렸다.
"사업... 그래, 이건 에쉬리아만 어떻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야. 사업을 한다고 했으니까 그 여자랑 거래하는 놈들 전부 다 잡아넣어야 하는거 아냐?"
아시엘의 말에 카이스는 숨을 들이켰다. 케빈과 오스카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맞아... 사업. 그 이그니스 교를 뒷받침 하고 있을 녀석들도 있었어."
[셰단 후작은 아마 그 중 하나겠지. 영지전은 독단적으로 일으키려는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이쪽도 보고할게 있어. 조사 좀 부탁해.]
"조사?"
[어어. 지하 2층 한구석에 약초를 가득 저장해 둔 창고가 있었어. 그런데 약초라고는 해도 난 생전 처음 보는 거라서... 뭔지 감도 못 잡겠네.]
"약초? 모아서 다른 데다 파는 건가?"
[그런것 치곤 한 종류밖에 없는걸. 딱히 큰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겠어.]
"으음... 약초라..."
카이스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때, 카이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케빈이 갑자기 그에게서 목걸이를 빼앗아 들었다. 카이스가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아시엘! 나 케빈인데. 약초가 뭐 어쨌다고?"
[아, 선배. 지하의 방에 약초를 가득 쌓아둔 방을 찾았어요. 근데 그 약초가 뭔지는 감도 못 잡겠어요.]
"그거, 어떻게 생겼어?"
그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그치자 아시엘도 놀란듯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뭇잎이 아니라 바닥에서 자라는 풀 같아요. 사슴 뿔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고, 말린 것은 약간 갈색빛이 돌아요. 생것은 짙은 녹색이고요. 좀 찢어진 날개같이 생겼어요. 따로 건조해서 보관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보관된 건 그 한 가지 뿐이고- 채취하는 사람들도 그게 뭔지는 모른대요. 교단에서 직접 지시한 것 같아요.]
아시엘의 말이 이어질수록 케빈의 얼굴이 차차 굳어갔다. 그의 설명이 끝난 뒤에도 잠깐 침묵하던 그는 곧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칼을 벅벅 헤집었다.
"... 일단 알았어."
[... 혹시 이게 뭔지, 선배는 아는 거에요?]
평소와 조금 다른 낌새를 느낀 아시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케빈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대꾸했다.
"아니.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아."
[네?]
"알아보고 연락할 테니까, 네가 눈치 봐서 받아. 루이카엔 놈한텐 네가 보고하고."
[아, 네...]
아시엘의 얼떨떨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통신을 끊은 케빈은 목걸이를 다시 카이스에게 넘겼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카이스는 묘하게 식어 있는 듯한 케빈을 의아하게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케빈이 통신 중에 한 말로 대충 상황을 짐작했는지 오스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케빈. 괜찮겠냐?"
"뭐가. 사건 조사일 뿐이잖아."
케빈은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것 역시 평소답지 않아 카이스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케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곁에 선 센을 툭 쳤다.
"꼬마야, 길 안내나 해."
"어, 어디로요?"
"제일 큰 상단. 물론 보이는 시장에서만이 아니라, 뒷골목에서도 꽤 큰 곳으로."
"네에?"
센이 울상을 지었지만 케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 웃으며 그의 등을 격려하듯 팡팡 때렸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동료에게 눈길을 주었다.
"야, 오랜만에 대형 사고 한번 치자. 슬슬 감봉 또 먹을 때 되지 않았냐?"
"... 이 무식한 자식. 난 모른다? 뒷일 어떻게 되도 난 모른다고."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신경쓰고 살았나. 썩은 물에서 나온 돈은 너도 싫을거 아냐."
카이스는 두 선배들 사이에 오가는 일련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케빈은 씨익 개구진 미소를 그리며 그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너는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제대로 해. 책임은 이 듬직한 선배들이 져 주지."
"그래. 기사단에서 잘린다면 나야 좋지."
오스카마저 히죽 웃자 카이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스는 잠깐 망설이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괜... 찮은 겁니까? 셰단 후작에게 뭔가가 있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신경쓰지 말라니까. 오랜만에 폐하 엿도 좀 먹여보자고."
하지만 케빈이 실실거리며 못을 박아버려 그는 더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