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03화 (20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0. 향기 뒤에 감춰진 것(1)

센을 앞세운 세 사람은 곧 큰 시장의 뒤에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 센은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얼굴이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이 안이야?"

"마약 굴이에요... 앞에 시장의 제일 큰 상단 건물이랑 연결되어 있어요. 저, 저 돌아가도 되나요?"

"흐음."

센이 울먹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카이스는 목을 길게 빼 골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살짝 가려진 천막 아래로 기다랗게 놓인 들이 눈에 들어왔다. 볕조차 들지 않는 어둑한 골목은 희미한 붉은색 초롱으로 밝혀져 있었다.

"설마... 선배님은 그 약초가 마약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뭐겠어? 꼬마야, 넌 돌아가라. 위험하니까. 돈은 받았지?"

케빈의 말에 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뜻으로 케빈이 씩 웃으며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센은 잠깐 고민하듯 눈을 데구룩 굴리다 곧 몸을 팩 돌려 우다다다 멀리 달려가 버렸다. 오스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아직 어리니까 겁 많은 건 당연하지."

"그럼 애도 보냈으니 슬슬 들어가 볼까. 네놈들은 함부로 나서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오스카는 뭐라 말하려는 카이스의 어깨를 툭 쳤다. 카이스는 불만이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지만 오스카는 그냥 놔 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골목을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케빈은 이윽고 크게 걸음을 옮겼다.

"가자."

"......"

오스카와 카이스는 그의 뒤를 따라 마약굴에 발을 들였다. 입구를 가리는 얇은 천을 걷어내자 마자 훅 끼쳐오는 썩은내에 카이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매캐한 연기가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양쪽으로 줄지어 놓인 양탄자와 간이 침대 위에는 마약 중독자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고 물담배를 피우거나 말린 약초를 태우고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예외란 없었다. 개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중년 남성과 갓난애를 옆에 둔 젊은 엄마도 있었다. 초점 잃은 무수한 눈동자들이 허공을 헤매며 의미 없는 웃음을 흘리는 광경은 더럽다 못해 기괴했다. 여기저기에 썩은 음식 쓰레기와 쥐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지만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것 같았다. 시궁쥐 한 마리가 마약에 취한 한 남자의 몸을 타고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카이스는 걷는 속도를 올려 오스카의 바로 뒤에 따라붙었다.

"넌 이런 곳 처음이지? 귀족가의 막내 아들이라고 했잖아."

"네... 상상보다 훨씬."

심하네요. 카이스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최대한 옆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카이스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디까지 들어가려는 건지, 마치 아가리를 벌린 미지의 굴 속에 깊숙히 들어가는 것 같아 점점 꺼림직해졌다. 하지만 선두에 선 케빈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계속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스쳐지나고 가림막을 넘어 허름한 천막에 다다라서야 케빈은 발걸음을 멈췄다.

"... 들어가야 합니까?"

"어. 따라 와."

카이스가 머뭇거렸지만 케빈은 간단히 대꾸하고 과감하게 천막을 확 열어젖혀 안으로 들어갔다. 오스카와 카이스가 잠시 망설이다 그의 뒤를 따랐을때, 이미 케빈은 안에 자리를 지키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그들 때문에 당황한듯 남자는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게 마약상인가. 허름한 옷을 입은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무, 무슨 일이오? 약을 사러 온 것ㅡ"

꽈아앙! 그가 더듬더듬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케빈이 앞의 테이블을 내려쳤다. 히끅, 제대로 겁을 집어먹고 딸꾹질을 시작하는 그의 멱살을 케빈이 덥석 잡아챘다.

"흐이익!"

"넌 어차피 고용되서 저 약쟁이들한테 약을 파는 것 뿐이겠지? 진짜 마약상은 저 문 안에 있고. 맞지?"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좋아. 그럼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진짜 주인이란 녀석을 불러 와. 장사 쫑내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오라고 전해. 황성의 케시비언이 왔다고도."

우당탕! 케빈이 내던지듯 남자를 놓아 주자 우왕좌왕하던 그는 테이블을 하나 넘어뜨리고 급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카이스는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배님... 혹시 아는 사이십니까? 이 곳의 주인이랑."

"나 옛날에 이쪽 바닥에선 꽤 유명했거든."

유명했다니, 어느 쪽으로? 카이스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년의 의문을 읽어낸 케빈은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뒷목을 주물렀다.

"대충 역대급 꼴통 고객 쯤으로 말이지. 한심한 얘기지만."

"아..."

고객이라면, 카이스의 무뚝뚝하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오스카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케빈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왜. 선배가 마약 중독자였다니까 실망스럽냐?"

"아뇨."

하지만 카이스는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신경쓰는 건 이 기사단에 들어오면서 부터, 아니 아시엘과 어울리면서 부터 그만뒀으니까요."

"켁, 그 꼬맹이가 사람 다 버려 놨구만. 그런 거 배우지 마."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면 이 막장 기사단에는 적응도 못 했을 겁니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따악! 뻔뻔하게 대꾸하는 그의 이마에 케빈이 꿀밤을 놓았다.

그 때, 마침 닫혔던 문이 벌컥 거칠게 열렸다.

"여긴 왜 온거야, 당신! 약은 끊었다면서! 뭘 바라는 거야!"

새로 들이닥친 자는 버럭버럭 고함을 치며 이마에 배여나온 식은땀을 닦았다. 대충 50 중반은 되어 보이는 남자는 굵은 반지 여러 개를 낀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굵은 눈썹은 검었다. 머리에 뒤집어 쓴 천조각 사이에 보이는 머리칼 역시 검정색이었다.

"어이구. 오랜만이야. 남쪽에서 이 먼 타국까지 와서 장사한다고 고생이 많네. 약팔이는 잘 되어 가나?"

"하, 잘 되가고 말고. 10년 전에는 황도에서도 떵떵거리고 살았지. 당신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말이야!"

꽥 소리를 지른 그는 씩 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빙글대는 케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것을 눌러 참는 것 같았다. 케빈은 손을 내저었다.

"너무 흥분하지 마. 그러게 누가 약을 팔랬나. 어쨌든 오늘은 다른 건 때문에 왔어. 부탁 하나만 하려고."

"누가 당신 부탁 같은 걸 들어 준다고 했어!"

쾅! 결국 그는 분을 못 이겨 이미 엎어져 있는 테이블을 세게 걷어찼다. 다시 한 번 바닥을 나뒹구는 원탁을 힐끗 곁눈질 한 케빈은 차갑게 입술을 비틀었다.

"호오. 이번에야 말로 쪽박 차고 감방 가고 싶으면 계속 뻗대던가. 내가 누구인지는 잘 알지? 요 옆에 있는 친구들도 말이야."

성큼 성큼, 그가 큰 보폭으로 점점 다가서자 상인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뭐, 뭐야! 가까이 오지 마!"

"그냥 부탁 몇 개만 들어 주면 된다고. 그럼 여기서 장사하는 건 눈감아 줄게. 응?"

케빈은 그에게 바짝 다가서서 망토를 살짝 들어 흰 제복의 황금빛 태양 문양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상인의 거뭇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

"오늘은 공무로 왔어. 싹 다 엎어버리기 전에 순순히 협조하는 게 좋을 걸? 네 녀석을 지키는 경비병이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나랑 여기 두 녀석, 셋 만으로도 쑥대밭 만들어 버릴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불법으로 마약 장사하는 놈을 단속하는 것 뿐이잖아."

응? 케빈이 눈꼬리를 휘자 궁지에 몰린 상인이 까득 이를 악물었다. 주먹 쥔 그의 손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잠깐 망설이듯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곧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뭐가 그리 궁금한데?"

"잘 생각했어."

케빈은 히죽 웃으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아직도 한쪽 구석에 멀뚱멀뚱 선, 처음에 천막을 지키던 남자를 밖으로 내보고 한쪽에 있던 상자 하나를 끌어당겨 대충 걸터앉았다.

"일단 약 하나에 대해서 좀 알고 싶은데. 그리고 내일 후카덴 백작령으로 들어가는 상단 있지?"

"...그런데."

"거기 자리 세 개만 내주라. 무슨 뜻인지 알지?"

케빈이 능청스레 손가락 세 개를 펴보이자 상인은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역시나 허락의 말이었다.

"알았어. 대신, 일 끝나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내 장사에 손 대지도 말고!"

"그렇댄다. 어쩔래?"

케빈은 오스카와 카이스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불법 마약 거래를 하는 사람을 눈 감아줘도 괜찮은지 묻는 것이었다. 아시엘 구출이 무엇보다 우선인 카이스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오스카 역시 승낙했다. 케빈은 다시 상인에게 눈을 돌렸다.

"약속할게. 그럼 우리 쪽의 조건이다. 셀레니스가 왔었다는 말, 절대로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해. 물론 내 이름도. 그게 지켜지지 않는다면 곧장 이 상단 박살내러 올 거다."

"좋다."

상인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 협박 거래의 성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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