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1. 향기 뒤에 감춰진 것(2)
"그래서, 알아보고 싶다는 약은 뭐야?"
"후카덴 영지 근처에서 나는 약초 비슷한 건데. 바닥에서 자라는 풀. 잎이 사슴 뿔 모양으로 갈라진 거라고 하더라. 말린 건 갈색빛이 돌고."
케빈이 간략하게 설명을 마치자 상인은 기억을 더듬는듯 굵은 눈썹을 찌푸리고 턱을 쓰다듬었다.
"효능이라던가. 그런 건 모르나?"
"단순히 내 추측일 뿐이지만- "
그가 그렇게 운을 떼자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오스카와 카이스가 고개를 들어 케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국의 상인 역시 생각을 멈추고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케빈은 잠깐 망설이다 다시 입술을 뗐다.
"...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거나. 겉으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아도 말이야."
"너-"
오스카가 놀라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거렀다. 설마 사람들이 단체로 홀려버린 게 마약 때문이라고? 카이스의 무뚝뚝하던 눈도 휘둥그레졌다. 케빈은 굳은 얼굴로 상인을 조용히 응시했다.
"있어?"
"으음..."
상인은 곤란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마약... 은 없어. 하지만 한 가지 짚히는 게 있군."
달칵. 문이 열리고 세이라가 방에 들어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아, 왔어?"
"네. 그런데 이상하네요... 문이 고장났나 봐요. 열쇠가 제대로 안 들어가네요. 문도 열려 있구요."
"그래?"
시치미를 떼는 아시엘에게 이상하죠, 하고 물으며 세이라는 다시 문을 닫았다. 곧장 그릇들을 치우고 깨끗하기만 한 방 정리를 시작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시엘은 끊겼던 생각을 이어갔다.
창고에 쌓인 약초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판매용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후카덴 백작령 주변은 몬스터가 득시글 거리는 황야라 자랄 수 있는 약초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었다. 약초 밀매로 돈을 벌 생각이었다면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을 터. 그리고 굳이 한 종류의 약초만을 가득 모아 뒀다는 것은 역시.
"사용하려는 건가."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리다 화들짝 놀라 세이라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녀는 방 안쪽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안심하고 다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약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쉬리아나 제스퍼가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두 사람 분이라고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역시 목적은 마을 사람들이겠지. 그리고 거기에서 연상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제 자식의 죽음도 받아들이게 하고, 고통을 잊어버리고 철썩같이 믿던 자신들의 영주마저 저버리게 한 비정상적인 신앙. 맹목적인 믿음.
정말로 그 둘이 관련이 있다면 생각보다 상황은 더 위험하면서도 또 간단했다. 아시엘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그건 끊었나, 라고 했던가. 치료사 영감이 케빈에게 넌지시 했던 말. 아시엘은 짧게 한숨을 쉬고 몸을 뒤로 기댔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아시엘은 이윽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 망할 기사단은 어떻게 그런 사람들만 모아둔 건지. 치료사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디서 이런 길고양이를 주워 온 거냐- 라고 어이없다는 듯 툭 던졌던 그의 한 마디가.
"짚히는 거? 그게 뭔데?"
잡아먹을 기세로 케빈이 캐묻자 상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약은 아니지만 그런 약초가 있지. 애초에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건 부작용일 뿐이다. 원래는 말리지 않고 생것인 채로 즙을 내어 의료 마취약으로 써."
"마취약?"
"그래, 마취약. 즙으로 만든 연고를 바르면 그 부분의 감각이 둔해지고, 한 모금 환자에게 먹이면 마치 잠드는 것처럼 전신이 마비되어 버려. 하지만 그 잎은 따고 나서 곧바로 써야지, 말라버리면 없던 마약성의 독성이 생겨."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진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케빈과 오스카, 카이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태우면 무색 무취의 연기가 피어나. 그걸 마시면 머리에 이상이 생겨. 관리를 잘못한 그 풀을 사용했던 환자들한테도 똑같은 문제가 생겼지.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판단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어. 거짓말과 사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순진한 어린애처럼 모든 걸 곧이곧대로 믿어버려. 물론 효과는 길지 못했지만."
세 기사는 이제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상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약초 이름이 뭐더라, 엘크론이라고 했던가. 사슴 뿔 모양이랑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었지. 가끔 어떤 놈들이 그런 용도로 찾는 모양이라 알고 있어."
"...그거다."
오스카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는 엉? 하고 그제야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경악해 마지않는 얼굴로,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상인이 어리둥절해 눈만 꿈뻑거리는 찰나, 입만 뻐끔거리던 카이스가 간신히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겁니다! 말솜씨고 속임수 같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단체로 중독자로 만들어 놓으면 그 정도 일은 문제도 아니었겠지."
생각보다 간단하면서 또 엄청난 사실이었다. 케빈 역시 불안해진 것인지 발을 바닥에 탁탁 치기 시작했다. 집회. 아마 그 때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사람들을 약에 노출시켜 세뇌당하게 했을 터였다. 결국 케빈이 다시금 상인에게 사납게 다그쳤다.
"해독제, 그거 해독제 있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 마취를 깨울 때 쓰는 약초가 효과 있지 않을까... 마취에서 막 깨서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 하는 녀석들한테 작게 환으로도 만들어 먹인다고 하던데."
그거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막막하던 눈앞에 한줄기 빛이라도 든 느낌이었다. 오스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단 아시엘한테 연락해서 어떻게 그 놈들이 영지 사람들한테 한꺼번에 약을 쓰는지 알아보라고 해. 그걸 알면 막을 방법도 생길 거야."
"영지전도 막아야 해. 저쪽은 병사들도 죄다 세뇌당했으니 만약 셰단 후작과 이그니스 교단이 한 패라면 분명 속수무책으로 성을 뺏겨버릴걸. 지금 꼴을 봐선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백작 본인 뿐이니까."
케빈이 덧붙이자 묵묵히 있던 카이스가 끼어들었다.
"일단 영지전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어차피 믿음을 주 무기로 가진 녀석들이니 신앙이 사라진다면 무너질 거에요. 상황이 바뀐다면 셰단 후작 역시 무리하게 영지전을 벌이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역시 후카덴 백작령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 그 전에 해독제란 걸 구해 놓고."
그렇게 끝맻은 순간, 오스카는 지금 상황이 더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케빈과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