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05화 (20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2. 향기 뒤에 감춰진 것(3)

"역시, 약 때문이었네요."

케빈이 대충 짐작했던 답을 전해주자, 아시엘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결국 에쉬리아는 영지민 전부를 중독자로 만들어 자신의 충실한 말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순간 치미는 분노에그는 이를 으득 악물었다.

[넌 괜찮아?]

"걱정 마세요, 전 멀쩡하니까. 아무래도 약을 퍼뜨린 건 밤의 그 집회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건 그때 뿐이니 제일 간편하고 확실하죠."

[그래? 하지만 그러면 그 교주란 녀석도 중독되잖아. 같이 있을 테니까.]

"으음..."

아시엘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마 약초를 태운 것은 그 제단 앞의 화로. 집회 중에는 바로 옆에 서 있어야 하는 제스퍼나 에쉬리아는 절대 그 연기를 피할 수 없았다.

"확실한 게 없네요... 일단 오늘도 잡회에 나가볼게요."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별 방법도 없고... 일단은 조심해. 무색에 무취니까 너도 모르는 새 당할 수도 있다고.]

"네네, 알았어요. 그리고 최대한 제 선에서 막아 볼게요. 해독제가 없다면 힘들겠지만 더 이상 약에 찌드는 걸 저지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죠. 잡혔던 날이랑 어제는... 의도치 않게 난장판이 되 버리는 바람에 아무도 연기를 마시지 않았으니까요."

[너 설마 매번 깽판 치겠다는 소리는 아니지?]

케빈이 조심스럽게 묻자 아시엘은 뜨끔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 설마요. 안 그럴 거에요... 아마도."

[야, 뒤에 아마도는 뭐야!]

귀에서 들리는 것도 아니건만, 곧바로 큰 고함소리가 터져나와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케빈이 왈왈왈 퍼부어대는 잔소리를 피하려 귀걸이를 멀찍이 떼면서 아시엘은 억울하게 대꾸했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저 아직 화 안 풀렸거든요!"

[익......]

효과가 있었는지 케빈은 주춤 입을 다물었다. 아시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대충 짚히는 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선배들은 이제부터 어쩔 거에요?"

[아... 상황이 이 꼴이 되버렸으니 일단은 루이카엔한테 보고하려고. 당장에 영지전도 일어날 것 같으니까. 우리는 내일 아침에 상단에 섞여서 다시 후카덴 백작령으로 들어갈 거야.]

"셰단 후작은 어떻게 해요? 영지전은 불법이고... 대충 정황을 봐서는 에쉬리아와 뒤로 줄이 있는것 같은데."

[... 괜찮아, 다 한번에 쳐 버리지 뭐.]

잠깐 침묵하던 케빈은 곧 짐짓 쾌활하게 답했다. 그 미묘한 간격이 신경쓰여 아시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요?"

[아냐, 아무것도. 그냥 일이 좀 귀찮아질 것 같아서.]

"... 일단 알았어요. 곧 세이라가 들어올 테니까 이만 끊을게요."

아시엘은 그대로 귀걸이에서 손을 떼고 통신을 끊었다. 뭔가 걸리는데, 그는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교단을 박살내면 당장 가까이에 있던 물고기 몇 마리는 함께 낚아올릴 수 있겠지만 바로 잡아채지 못한 이들은 곧장 증거 인멸에 들어갈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교단으로 인해 혜택을 본 자들은 처벌받지 못할 게 뻔했다.

"내 욕심인가..."

골치가 아파지는 것 같아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잡혀있는 주제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번에 약초를 빼돌릴 때도 꽤 위험했으니 아무래도 몸을 조금은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오늘 해야 할 일은 집회에 얌전하게 참석해 제스퍼와 에쉬리아의 동향을 살필 것. 그리고 창고에 가득 쌓인 약초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아봐야 할 차례였다.

어느덧 저녁이 되고 잠깐 자리를 비웠던 세이라가 돌아왔다. 그때까지 생각에 빠져 있던 아시엘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왔어?"

"네. 밥은 먹었어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온 세이라는 제일 먼저 낮에 가져다 놨던 접시를 확인하고 곧장 아시엘에게 사나운 눈총을 보냈다.

"또 안 먹었잖아요!"

아시엘은 곧장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이라의 따가운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역시나 곧 소녀의 잔소리가 작은 입에서 터져나왔다.

"먹는다면서요! 약속도 했잖아요!"

"하하... 하. 아냐, 배가 별로 안 고파서..."

변명처럼 말하던 그는 세이라가 발을 쾅 구르자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 진짜 어린애한테 약한 건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시엘은 힘겹게 말꼬리를 돌렸다.

"그것보다... 오늘 집회에서 연설은 누가 하셔?"

"에쉬리아 님이 돌아오셨으니까 교주님이 하시지 않을까요?"

다행히 먹혀들었는지 세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시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오늘도 가고 싶은데. 데려가 줄거지?"

"물론이죠!"

세이라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방금까지 화 내고 있지 않았어, 하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담고 아시엘은 하하, 하며 억지 웃음을 냈다.

"그것보다 세이라, 문 고장났다는 건 에쉬리아 님께 말씀 안 드리는게 좋겠어."

"어째서요?"

"오빠가 혼날 것 같거든. 그러면 교단에서 쫒겨나 버릴걸."

아니, 사실은 정 반대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어디에 꽁꽁 가둬지거나 아예 살해당할지도 모르지만. 아시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이라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비밀로 할게요."

"응, 고마워."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아시엘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었다. 에쉬리아는 그가 방 밖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잠깐 세이라와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되자 아시엘은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어제 봤던 그 길로 곧장 회장으로 올라가자 이미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사제님! 다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사제님!"

세이라는 아시엘과 함께 잇는 것이 뿌듯한지 제법 자랑스러운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하지만 역으로 아시엘은 민망함을 숨기려 갖은 노력을 하며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괜히 잘못 걸렸다가는 어제와 비슷한 꼴이 될 지도 몰랐다.

겨우겨우 인파를 헤치고 아시엘은 구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살다살다 이 정도의 사랑을 받을 줄이야,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지만 어이가 없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오늘도 오셨어... 분명 오늘은 뭐라도 말씀해 주실거야."

"그나저나- 어린 소녀가 참 대단하셔."

"어라, 남자 아니었어?"

성별 구분도 못 하게 되버릴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졌구나. 아시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절대 현실 도피가 아니야, 이건.

그나저나 에쉬리아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시엘이 약초를 빼돌린 것 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빼돌렸다고 해도 바깥과 접촉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 만약 후자라면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약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터였다.

곧 에쉬리아가 앞문에서 나타나 교단 위에 오르자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에쉬리아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신도들을 쭉 둘러보다 아시엘과 눈이 마주치고는 눈꼬리를 곱게 휘었다. 아시엘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곧 에쉬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몸을 빙글 돌렸다.

"이그니스 님의 충실한 종 여러분, 오늘도 경건한 신앙을 위해 기도합시다. 모든 것은 그, 이그니스를 위하여."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에 선 제스퍼가 화로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마른 장작에 불이 붙고 에쉬리아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아시엘은 화로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마 저 곳.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여도 사람의 판단력을 비정상적으로 하락시키는 독초. 거기다 중독성까지 있다면 사람들의 제 편으로 만들기는 아주 쉬울 터.

아시엘은 설교를 듣는 척 에쉬리아를 살폈다. 제스퍼도, 에쉬리아도 둘 다 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닌 건가.

"... 신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 마세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따른다면 가시밭길 같은 인생길이 꽃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입니다."

-신이란 게 정말 있다면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이 곳에 온 뒤로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거리를 나뒹구는 노숙자의 시체도 악취 나는 골목도 있을 리가 없었다. 불합리 속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아시엘의 손을 잡아준 것은 신도 뭐도 아닌 사람의, 루이스의 온정이었다.

확실히 단상에서 연설을 하는 에쉬리아는 아름다웠다. 딱히 약초 때문이 아니더라도 눈이 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새하얀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꿈의 세계였다. 몸짓은 마치 고양이처럼 부드러웠고 나긋나긋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는 흠잡을 데 없는 유리구슬같았다. 신비한 빛을 내는 눈동자는 선연하게 반짝이며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독가루를 뿌리는 검은 나비 같다고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는 거짓된 꿈과 검은 욕심이었다. 집중해서 연설을 듣는 세이라를 힐끗 곁눈질한 그는 다시 에쉬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불을 붙인 후, 그녀는 더 이상 화로에 직접 다가가지 않았다. 제스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걸음 떨어진 채 활활 타는 화로 곁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연설이 거의 다 끝나갈 때 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오늘도 신과 함께하시길."

간단한 인사로 끝을 알린 에쉬리아는 신도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 빙글 돌아섰다. 어라? 아시엘은 눈을 크게 떴다. 제스퍼 역시 주섬주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놓쳤을 리 없는데, 어째서? 아시엘의 혼란과는 관계 없이 두 사람은 유유히 앞문으로 회장에서 나가버렸다.

"오빠, 왜 그래요?"

"세이라. 보통 이... 설교가 끝나면 뭐해?"

"회장에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세이라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성실하게 대꾸했다. 아시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저 화로는 누가 관리해?"

"저쪽으로는 가면 안 돼요. 화로 가까이에 가면 벌을 내린댔어요."

아- 무언가가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아시엘은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에서 사제님, 어디 가시나요? 왜 그러세요? 하며 묻는 목소리들은 죄다 무시하고 거의 뛰다시피 단상의 화로 쪽으로 향했다.

"잠깐, 사제님!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쪽엔 신의 화로가ㅡ"

그제야 아시엘의 목적지를 알아차린 신도들이 서둘러 붙잡고 말렸지만 그는 다 뿌리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발을 돋아 화로 속을 살폈다.

"......!"

새빨간 장작더미 아래에, 아래에 깔려 끝부분 부터 조금씩 타기 시작하는 약초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비죽 웃었다. 아예 처음부터 그들은 약초를 화로 안에 넣어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해 두고,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약초가 타지 않도록 꽁꽁 싸맨 후 장작을 교묘하게 배치해 겉봉이 다 탈 때쯤 두 사람은 자리를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사제님!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덥석 잡아채, 아시엘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혹시나 화로의 저주를 받을까 잔뜩 겁을 먹어 식은땀까지 흘리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가득 찼다.

이걸 빼내려면,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아시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팔을 꼭 붙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남자와 단상 아래에서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도, 그리고 세이라. 아시엘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잠깐 내려가 주시겠어요? 제가 모든 화를 피할 수 있는 기도를 가르쳐 드릴게요."

"예...? 정말 이십니까?"

"그럼요. 그러니까 신도님은 자리로 돌아가시고."

아시엘은 생글 미소지었다. 남자는 순간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른 신도들 역시 언제 불안해 했냐는듯 눈을 반짝이며 자세를 바로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의 미소는 어른스럽고 깨끗하며- 또 뻔뻔했다.

"그리고 모두들 눈을 감아 주세요. 기도를 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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