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8. 고물 수레는 시끄럽게 굴러간다(1)
[... 다 받아 그렸어요?]
"오냐. 대강이지만 완벽해."
오스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금까지 붙잡고 씨름하던 종이를 눈높이까지 집어 들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백지였던 곳에는 교단 신전의 상세한 내부도가 그려져 있었다. 아시엘도 제대로 가 보지 못한, 지하 3층이라고 표시된 곳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1, 2층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해독제 쪽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케빈이 루이카엔한테 연락하고 있어. 지금 머물고 있는 건물 아래층에 통신구가 있더라고."
[아아... 다행이네요.]
거래 때만 사용하는 거라며 절대 안 된다고 빽빽거리던 상단주 녀석을 윽박지르던 케빈의 얼굴은 정말 볼 만했다고 말 해주려던 오스카는 곧 그만두었다. 상대는 카이스를 시켜 빈 집에 불까지 놓고 신의 말씀인 양 "소년을 따르라"는 유치찬란한 메모를 남기게 한 녀석이었다.
"그나저나 넌 어쩔 셈이야? 신도들을 네 추종자로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고."
[마음대로 주무르기 편하잖아요.]
"... 네 방금 말, 엄청 악당 같았다고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지?]
[전혀요.]
넌 양심도 없냐, 오스카는 다시 한 번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평소에는 착한 애가 스위치만 들어가면 왜 이 모양이 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조심해. 그거, 엄청 큰 도박이니까."
[알고 있어요. 저도 제 목숨 귀한 거 알거든요?]
"뻥 치시네."
그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하자 아시엘은 잠깐 침묵했다가 말을 돌렸다.
[이제 슬슬 세이라가 데리러 올 시간이라서 가 볼게요. 선배들도 조심하세요.]
"하여튼 빠져나가는 데는 선수라니까."
오스카가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시엘은 그대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성질머리 하고는. 야, 카이스. 잘 되가냐?"
"저한테만 이 막노동을 시키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종이 더미와 씨름하던 카이스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옆에 쌓인 백지의 양만큼 똑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그의 옆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카데미 때도 이런 짓은 안 해봤습니다."
"그래도 처음 그 쪽지 글씨랑 비슷한 쪽이 나을 테니까 네가 수고 좀 해줘."
오스카가 달래듯 건네는 말에도 카이스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고 뭐라고 작게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새 종이에 글씨를 쓰는 중이었으니 오스카로서는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일을 루이카엔과의 통신을 끝낸 케빈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대충 상황만 설명했어.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 두고 마탑에 부탁해서 가공해서 보내준대. 당장 끌어모으기 시작한댔으니까 아마 양은 충분할 거야."
"마탑?"
의아하게 그가 되묻자, 케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엘의 옛날 은사님이 계시다고. 사정 설명하니까 당장에 발 벗도 도와준댄다."
"아아..."
오스카는 대강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똑같은 글씨를 쓰는 것만을 반복하며 카이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게 잘 하는 짓일까요. 아시엘의 간 큰 짓거리에 편승하는 게."
"별 수 없잖아. 일단 내일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해와 함께 찾아가는 미친놈들인가."
오스카의 말에 뒤이어 케빈이 무심결에 덧붙이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푸큽,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작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효과가 컸던 것 같은데. 회장에 들어서자 마자 아시엘이 한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1층 객석과 2층의 난간 객석 모두 사람들로 가득 가득 찬 회장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집회에 앞서 그를 데리러 왔던 세이라 역시도 바짝 얼어붙은 상태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가득한 눈을 한 소녀를 달래 회장으로 왔더니 똑같은 표정의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 아시엘은 경련을 일으키려는 얼굴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 세이라. 잠깐 기다려 줄래?"
"네? 아, 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시엘은 훌쩍 뛰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속아 넘어가는 어린 아이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광대 짓을 할 시간이었다.
"여러분, 바깥에서 화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마 그건 이그니스 님의 벌일 겁니다."
웅성웅성. 역시 그랬어. 신께서 노하신 거야. 새하얗게 질린 아낙들과 장정들, 그리고 노인들과 사춘기 나이가 된 소년 소녀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던 아시엘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젯밤 꿈에서 신의 뜻을 받았습니다. 이 지방의 사람들이 신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고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대로라면 아마 멸망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그게 무슨-!"
용기를 낸 한 남자가 크게 외치자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분노하셨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사제님은 아실 것입니다!"
"어제 불이 난 집의 나무에 소년을 따르라는 계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사제님이시죠?"
"하지만 사제님은 여자아이가-"
예민한 귀 덕분에 소음 공해에는 배로 민감한 아시엘이었다. 그러는 와중 누군가가 뱉어낸 어느 남자의 경솔한 한 마디에 그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아시엘은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동시에 발을 콰아아앙! 세게 굴렀다. 커다란 타격음이 사람들 사이를 꿰뚫었고 왠지 모를 위협을 느낀 그들은 일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아시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숙 부탁드려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리고 전 남자입니다. 남자요. 남자에요."
"......!"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충격이 신도들-특히 남자들- 을 찌르륵 훑고 지나갔다. 당황한듯 움찔거리는 사람들이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아시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신께서 분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에쉬리아 님이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예? 하지만, 그 분은 신의 첫번째 종으로..."
"첫 번째 종이라도 실수는 한답니다. 이그니스 님께서도 그걸 아시고 미리 경고를 주신 거에요. 그걸 저에게 바로잡게 하기 위해서요."
회장은 다시금 잠잠해졌다. 순한 양떼처럼 자신의 입술만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아시엘은 조금 묘한 기분으로 둘러 보았다. 이렇게나 존경의 눈빛을 받은 적이 있던가. 많은 사람에게 경멸받는 일이야 어렸을 때는 흔한 것이었지만 거짓으로 산 이 경외의 시선들도 그에 못지않게 강렬했다.
"여러분, 혹시 신의 교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당장 그만둬 주세요. 이 땅에 파멸을 부르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행동이라는 게...?"
한 신도가 조심스레 묻는 말에, 아시엘은 잠깐 뜸을 들였다.
"빛에 말린 풀. 모두들 그걸 자주 입에 대시죠? 에쉬리아 님께도 바치고요."
모두 짐작하는 것이 있는지, 신도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좋았어. 아시엘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었다.
"신 께서는 그 영험한 약초를 굉장히 아끼십니다. 그런 신의 약초를, 저희 하찮은 인간들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법이죠. 하지만 에쉬리아 님은 여러분의 건강을 너무나도 염려한 나머지 그런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신께서는 노하셨지만 더 이상 그 약초를 채취하지 않고, 모아둔 것들 역시 모조리 모아 땅에 파묻는다면 그냥 넘어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그니스 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화재에 대한 자세한 것은 에쉬리아 님이나 제스퍼 님께는 함구하도록 해주세요. 제가 이렇게 따로 말씀 드린 이야기도. 신앙이 깊은 두 분은 자신들이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 죄책감에 시달릴 테니까요. 이 시간부터, 화재에 대한 것과 약초에 대해 제가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입 밖에 꺼내지 않도록 해 주세요. 이 역시 신의 뜻입니다."
신이란 거 엄청 편하네. 아시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가 말을 끝맻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시엘은 그들이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조용한 묵례는 굳은 맹세를 뜻하는 '함구'였으니. 하지만 반대로 정신이 아찔해지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리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칼을 겨눌까. 그것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