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199. 고물 수레는 시끄럽게 굴러간다(2)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알 길이 없을 테지만, 사이비 교단 소동으로 황궁 역시 가벼운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 케빈에게 사태를 보고받은 루이카엔은 바로 황제에게 비밀리에 찾아갔고, 또 그런 신중함이 무색하게도 라이펜은 그 다음 날 대전 회의에서 그 사태를 언급했다. 좋은 먹잇감인 위기 속의 중립파 귀족, 그리고 그 곳을 무단 점거한 사이비교와 적은 수로 투쟁 중인 셀레니스 기사단 네 명은 정치판의 인간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화젯거리가 되어주었다.
물론 자세한 상황은 라이펜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루이카엔은 지금도 충분히 골머리를 썩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 이 이틀간만 해도 셀레니스를 지원하겠다며 어디어디의 후작, 무슨 백작, 기타등등 남작이 온갖 서신들을 루이카엔에게 디밀어 왔다. 거기다 대공의 루아 이클립스까지 정식으로 협조하겠다고 그쪽의 단장인 에피로스 경까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을 간신히 돌려보낸 참이었다.
"하아..."
그만큼 후카덴의 영지가 탐이 난다는 뜻일 터였다. 대공파 황제파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꼴을 지켜보며,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라이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로 루이카엔에게 언질조차 주자 않고 유유자적 노닥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신없는 하루의 끝 무렵, 혼자 집무실에서 가까스로 여유를 찾은 찰나에 걸려온 케빈의 통신은 루이카엔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아시엘은 여전히 구금 상태, 거기다 사람들은 단순히 어느 종교에 빠진 것이 아니라 약물에 의한 중독. 거기다 그 옆의 붙어 있는 셰단 후작은 교단과 손을 모아 후카덴 영지를 꿀꺽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셰단 후작은 황제의 가장 큰 자금줄 중 하나였고, 그걸 아는 케빈은 라이펜에게는 비밀로 하고 해독약을 구해 달라며 부탁했다. 이런 말 하기는 그 네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다고 얌전히 기 죽을 놈들이 아니지만.'
일단 마탑의 캐롤이란 교수에게 협조를 부탁하고- 루이카엔은 고민에 빠져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마 그 교수라면 당장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줄 터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자를 위해서 정체 불명의 위험한 물건을 맡아 준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그 구슬들은 모두 그 사람에게 맡겨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한 루이카엔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시엘은 신중한 녀석이었다. 분명 몇 개 정도만 넘겨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
"이거 답답하네..."
루이카엔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의자 뒤의 창문이라도 열까 싶었지만 곧 그것마저도 귀찮아져 그만두었다. 시원한 바람을 쐬어 봤자 이 갑갑함은 가시지 않을 터였다. 단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어째서 하필 이런 상황의 중간에는 아시엘이 있는 걸까.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누구보다도 아끼지만, 그러고 싶지만 또 그러기엔 라이펜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론 그런 것 따위에 얽매일 루이카엔이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외부로 새어나간다면- 아시엘의 모친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과거 슈베이만과 함께 있던 자고, 또 하노빌의 대 참사를 터뜨린 장본인일 수도 있다는 것- 황제파 내의 루이스와 아시엘 아르셰인은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리고 말 터였다.
'일단 나부터가...'
이렇게나 망설이고 있는데. 소년 그 자체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가 품고 있을지도 모를 독을 경계해야 하는가. 라이펜이 던져준 과제는 지독하게 골치 아팠다. 솔직히 그의 파견이 길어지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지금 상태로는 아시엘의 그 커다란 눈을 마주하지 못할 게 뻔했다.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의혹을 품은 채로 대면하기에는 그 두 눈동자는 너무나-
여기에서 아시엘 쪽이 황제와 이해 관계를 맻고 있는 셰단 후작을 친다면 단순히 넘어갈 문제가 못 되었다. 아마 케빈과 오스카, 카이스 그리고 아시엘이 원하는 것은 후카덴 백작령을 온전히 지켜내고 교단이란 것을 뿌리 뽑는 것일 터. 그 과정에서 몇 명의 대공파와 얼마의 황제파까지 연관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탁, 탁, 탁. 루이카엔의 손가락이 다시금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그 폭주하는 네 명을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게 분명했다. 심란하게 눈을 데굴 굴리던 그는 곧 눈을 살풋 감았다. 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불도 켜지지 않은 방, 꽤 오랜 시간동안 손가락과 책상이 만들어 내는 둔탁한 소리 외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루이카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회색빛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카덴 백작령. 어디에나 있는 장난꾸러기 꼬마들은 점심때가 되기 전, 마을에서 벗어난 곳의 인적 드문 공터에 삼삼 오오 모여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한 채, 어느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는 어린 아이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씩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다 모였어?"
"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꼬맹이들에게 남자, 오스카는 귀엽다는 눈길을 주었다. 이른 아침 개구멍을 통해 백작령으로 은밀히 들어온 그는 지나가는 8살짜리 꼬마아이 하나를 붙잡고 사탕을 마음껏 먹게 해 줄테니 친구들을 이쪽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어른들 몰래 모이라는 말 역시 잊어버리지 않았다.
"자, 약속한 사탕이야."
"와아!"
오스카는 가지고 온 주머니에서 형형 색색의 알사탕들을 꺼내놓았다. 아이들이 탄성을 터뜨리며 당장에 달려들자 그는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사탕을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실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에에- 아저씨! 사탕 준다면서요!"
"이건 조금 이따가 줄게. 대신 아저씨가 우리 친구들한테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재미있는 놀이인데."
"놀이요?"
놀이라는 말에 어린애들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졌다. 오스카는 등 뒤에 숨겨뒀던 다른 꾸러미를 앞으로 꺼내 풀어헤쳤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백 장의 종이 뭉치였다.
"이걸 각자 마음껏 들고 가서 마을 여기저기에다 뿌리고 오는 거야. 집 앞, 밭, 나무 위, 어디든지 좋아. 형 누나들한테도 나눠주고 엄마 아빠한테도 주는 거지. 어때? 재미있겠지?"
"네!"
"하지만 놀이를 하지 않고 아무데나 한꺼번에 버려두면 안 돼. 이건 마법 종이라서 그렇게 하면 도깨비가 잡으러 올 걸. 하지만 착하게 말 잘 들으면 아저씨가 사탕을 주지!"
끄덕끄덕. 아이들은 다시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스카는 가장 앞에 선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한 줄로 서서 종이를 받아가. 혹시 엄마나 아빠가 누가 줬냐고 물으면 하늘에서 사는 아저씨가 줬다고 말 하는 거야. 사탕은 3시간 뒤에 다시 여기에서 나눠 줄거야."
"네에!"
수고했다, 카이스. 밤새도록 글씨를 쓰고 지쳐서 지금쯤 숙소에서 곯아 떨어져있을 소년을 떠올리며 오스카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후카덴 영지는 다시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