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13화 (213/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0. 고물 수레는 시끄럽게 굴러간다(3)

셰단 후작의 집무실. 언제나 당당하던 이 방의 주인은 지금 한껏 움츠러들어 손님용 의자에 앉아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아침부터 쳐들어와 뻔뻔하게도 제일 싱석을 차지하고 앉은 한 기사, 오빈 경-케빈 때문이었다. 집무실의 책상에 부츠 신은 발까지 척 올리고 소가죽을 씌운 의자에 파묻힌 채 그는 최고급의 차를 홀짝였다.

"차가 이게 뭐냐? 떫어 죽겠네."

"그... 송구합니다."

케빈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자 그는 몸을 움찔했다. 아무래도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후작은 케빈이 다짜고짜 찾아왔을 때부터 줄곧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됐다면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편해지지. 슬슬 찔러볼까- 케빈은 히죽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있잖아, 네가 말 한 그 내부의 협력자들에 대해서 조사를 해 봤걸랑?"

"...예?"

셰단 후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케빈은 발을 내리고 은근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뭐 엄청난 거라도 있는줄 알았더니 겨우 사이비 종교 단체였냐? 그 뭐라고 하더라. 이그니스?"

"겨, 겨우라니요... 기사님이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들의 세력은 무시할 만 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너야말로 감히 황제 폐하의 기사를 무시하고 있는거 아냐?"

케빈이 사납게 윽박지르자 후작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누가 엿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 케빈은-집무실의 문짝은 첫날 오스카와 둘이 박살낸 덕분에  뻥 뚫려 있었다- 크게 인심을 쓰는 척 후작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후작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상체를 숙였다. 케빈은 목소리를 잔뜩 죽여 속삭였다.

"지금 황궁에서도 난리가 났단 말이야. 지들 나름대로 숨기고 있다곤 하는데 이미 다 뽀록났어. 우리가 이미 안에 첩자를 심어 뒀걸랑. 지금 폐하는 놈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박살낼 준비를 하고 계셔. 고작 교단 하나랑 한 제국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냐?"

"......."

"그런 마당에 네가 그 교단이랑 내통하고 있었단 게 알려져 봐. 당장에 네 목도 날아갈 걸?"

"그, 그러면 전 어떻게 해야..."

후작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모양새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그에게 케빈은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까 내 이야길 들어 보라고. 생각해 봐, 상대는 군사도 제대로 없는 오합지졸들이야. 당장 영지에 있는 병력이라곤 십수 년동안 전쟁도 제대로 안 해본 후카덴 백작의 후줄근한 사병들이랑 칼이라곤 한 번도 안 잡아 봤을 민간인들 뿐이라고."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아, 진짜 답답하네."

케빈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꽥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은! 이 기회에 후카덴 영지도 꿀꺽하고 교단도 직접 박살 내란 소리야. 분명 폐하께서도 반역자들을 처단해 줬다고 기뻐하실걸."

"...정말입니까?"

꽤나 솔깃했는지 후작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빈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니까! 그리고 사실 이 방법 아니면 후작이 살 길도 없다고. 너도 같이 역도로 몰려서 죽고 싶진 않지? 지금 마침 그 교단의 주축이 후카덴 영지에 있잖아. 그것들만 사로잡으면 일망타진은 손쉬운 일이라고. 그리고 그 공은 전부 다 셰단 후작 거고."

"하지만..."

"우리가 도와 준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폐하의 바로 아래에 있는 셀레니스 기사단의 가장 뛰어난 기사들이 도와줄 거라고. 약간의 보상과 함께. 어때? 공도 세우고, 영지도 차지하고.이 오빈 경만 믿으라니까?"

한참을 갈등하던 후작의 고개가 이윽고 끄덕여졌다. 케빈은 속으로 환호성을 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대신 히죽 크게 미소지었다.

"오케이. 거래 성립이라고 봐도 되겠지?"

"예...에. 하지만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오빈 경. 꼭이요."

후작이 불안하게 건네는 말에, 케빈은 답하지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후작이 안도한듯 한숨을 내 쉬었다. 케빈은 그에게 미리 챙겨온 종이를 슬쩍 내밀었다.

"좋아, 그럼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 볼까. 우선 이게 교단 내부의 약도야. 우리 뛰어난 첩보원이 직접 작성해서 넘겨준 거니까 걱정은 안 해도 돼."

"가, 감사합니다."

가여운 희생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부도를 넘겨 받았다. 그는 결국 케빈이 친 올가미에 완전히 걸려든 것이다.

"오빠! 아시엘 오빠!"

하릴없이 방에서 시간을 죽이던 아시엘은 갑자기 문이 벌컥 열어젖힌 바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세이라는 숨도 고르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비틀비틀 들어왔다. 소녀의 흐트러진 곱슬머리가 그려를 따라 흔들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거요, 이거!"

의아한 물음을 건네던 아시엘은 다짜고짜 코앞까지 디밀어진 종이에 더욱 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잠시 후,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로 쓰여 있는 커다란 글씨들을 읽은 그는 저도 모르게 큽,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크흐흐... 푸훕...."

"오빠?"

갑자기 아시엘이 어깨를 파들파들 떨기 시작하자 세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다가 결국 깔깔거리며 주저앉아버렸다.

"크하하하! 하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하하하하!"

"오빠! 왜 그래요?"

세이라가 당황해서 묻자 아시엘은 끅끅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어떻게든 웃음을 멈추려고 용을 썼다.

"아, 아냐, 큭, 신께서 나를 이렇게나 생각하고 계신다니 영광이네... 크흐흡. 그나저나 이거 어디서 났어?"

"동네 애들이 나눠주고 다녔어요. 오빠, 이거..."

아시엘은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아 다시 찬찬히 읽었다. 하지만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막기는 어려웠다. 전발 밤 통신에서 뭔가 하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런 방법을 쓸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린애들을 그렇게 써먹다니.'

익숙하디 익숙한 글씨는 천연덕스럽게 있지도 않은 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이라는 또 그걸 철썩같이 믿어 안절부절하는 중이었고. 아마 바깥의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아시엘은 킥킥거리며 세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밖에 나가서 전해. 진정한 첫번째 종인 아시엘 아르셰인을 믿고 따르면 괜찮을 거라고. 그리고 이 사실은 절대로 에쉬리아나 제스퍼에게 내색하지 마. 만약 발설한다면 정말 큰 재앙이 닥칠 거라고."

"정말,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죠?"

세이라가 재우쳐 묻는 말에 아시엘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그러니까 얼른 나가서 전해 줘.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을 테니까."

"네!"

그제야 소녀는 환하게 미소짓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마자 아시엘은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다시 종이를 들여다 보았다.

거짓된 이를 따르는 자는 모두 파멸. 진리를 찾아라.

영지전 개시 2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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