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1. 비탈길 레이스(1)
"설마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이야."
아시엘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라를 통해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모여달라고 전했더니 저녁 9시가 되자마자 신도들이 교단의 회장으로 밀려들어온 것이었다. 자신을 뜨겁게 응시하는 뜨거운 눈들과 다시 한 번 마주한 아시엘은 단상에 서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상기된 얼굴, 심지어 항상 딴짓을 하며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던 어린 아이들조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흥미진진하게 아시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구 선정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잘 하셨네요, 들을 리 없겠지만 아시엘은 바깥의 선배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오늘의 소동은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진실한 자를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 찾아온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동안 우리들은 거짓된 교주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런 메세지가 돌았다는 것은 이미 신의 분노가 임했다는 뜻이겠죠."
소년의 또랑또랑한 음성이 집회장에 울려퍼지자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시엘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주욱 훝어보았다.
"지금이라도 신이 분노할 만 할 일은 멈추세요. 신께서 원하시는 건 추종자의 열렬한 신앙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하면 재앙은 찾아오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아시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무서운 일은 찾아 옵니다. 모레- 이제 서른 시간도 채 남지 않았네요. 혹시 모레, 에쉬리아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지 않나요?"
"......."
싸아- 순식간에 내부 공기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아시엘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민간인들도 영지전에 끌어들이려고 한 모양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가장 앞의 여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성전...이. 성전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신을 위함입니다. 좀 더 힘을 길러서 세력을 키워야 하지 않습니까?"
아,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온 반박에 아시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슬슬 약효가 떨어져 가는 것이었다. 하는 말만 듣고 고분고분한 쪽이 휘두르기는 편하지만 뿌듯해 해야 하는 건지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애매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을 아닐 테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신께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사람을 해하지 말라고. 그런데 성전이란 명목으로 사람을 해친다면 과연 이그니스 님이 기뻐하실까요?"
90의 뻔뻔함과 약간의 말솜씨. 아시엘이 심각하게 말하자 의이를 제기했던 사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전쟁은 무서운 재앙이에요. 재앙은 닥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만들고 있는 거에요. 영지전을 벌이게 되면 여러분도 상처입게 되고, 집이 망가지고 사람이 많이 다칠 거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마지막에 이르러서 집회장에는 또랑또랑한 아시엘의 음성만이 울려퍼질 뿐 사위는 쥐 죽은듯 고요해졌다. 단순한 침묵보다는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현실은 그래요. 사람은 꿈에서만 살 수 없어요. 신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좋지만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죠? 어쩌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요. 이 교단을 따르다가는요! 결국 그녀는 당신들을 위험한 곳에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 숨어서 여러분을 조종할 뿐-"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아시엘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모든 일이 끝난 후,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세 사람에게 찾아온 후작의 전령은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해 왔다. 대강 기대 앉아있던 케빈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병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부에 사정이 생겨서 일정이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출병은 모레가 아니라 내일, 밤 9시 반입니다. 기사님들도 부디 염두에 두시길."
"그러니까- 무슨 사정이냐고 묻잖아! 뭐길래 난데없이 출병을 하루나 당기냐고!"
케빈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듯 으르렁거렸지만 그는 맹하니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저도 모릅니다. 후작님께서 단지 사정이 있다고만... 그리고 내일 기사님들은 그저 지휘처에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된다고 전하셨습니다. 병사들은 직접 이끄신다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가 도와 준다고 했잖아!"
"필요 이상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작전은 원래의 것 대로 간다십니다. 오빈 경께서 제안하신 것은 각하된답니다."
연달아 터진 말에 케빈은 아연실색해 도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스카 역시 영문을 몰라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카이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그 녀석에게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또각, 또각. 높은 굽의 발소리가 천천히 등 뒤에서 가까워져 왔다. 아시엘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렸다. 에쉬리아가 그 곳에 서서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다.
"예쁜 아이는 좋아하지만 장난이 심한 꼬마는 싫어해요."
에쉬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아시엘에게 다가갔다. 아시엘은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조용히 응시했다. 시야 한 구석에 쭈뼛쭈뼛거리며 단상의 커튼 뒤로 몸을 숨기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가 에쉬리아에게 알린 듯했다.
"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제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 그래도 조금은 더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쉽네요."
아시엘은 씨익 장난스레 미소지으며 그녀를 정면으로 올려다 보았다. 에쉬리아의 영롱한 오색빛 눈동자와 아시엘을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섞였다. 잠깐 무표정으로 소년을 응시하던 그녀는 곧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아시엘의 귀에 속삭였다.
"장난은 여기에서 끝이에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 아시엘 경. 안타깝게도 당신이 잡으려던 여우는 덫에서 빠져나가 버렸답니다. 체스 게임은 끝이에요. 당신의 패배로."
아시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도망칠까, 그는 뒤로 살짝 물러서며 출구를 눈여겨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낌새를 눈치챈 에쉬리아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윽..!"
"친애하는 신도 여러분. 심란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런 이단 하나에 휘둘리다니, 교주 자리에 걸맞지 않은 추태를 보이고 말았네요."
에쉬리아는 눈을 곱게 휘며 난데없는 사태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상황만 멀뚱이 지켜보던 이들에게 말했다.
"참된 신의 종은 바로 저입니다. 이 소년은 여러분들을 속여 교단을 망가뜨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오빠는 불로 기적을 일으켰어요! 가짜 사도라면 그런 건 불가능 하잖아요!"
그때, 세이라가 발딱 일어나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잡힌 손목을 빼내려 힘을 주었지만 에쉬리아의 악력은 생각보다 굉장히 강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쿡쿡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 자리에서 다시 그에게 기적을 청해 보세요. 그 날 보았던 불의 영광을 다시 불러달라 청하세요. 아마 그는 응하지 않을 테지요. 그 날도 어차피 조잡한 속임수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아시엘은 다시 팔을 비틀어 용을 썼지만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에쉬리아의 여려보이는 손은 소년을 더더욱 견고히 묶어버렸다. 실패자를 비웃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애쉬리아는 부드럽게, 하지만 날카롭게 덧붙였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우리를 속이고 있었던 겁니다. 신의 정화를 받아 순수해진 여러분을 시기해서 거짓말로 타락시키려 현혹한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일 뿐입니다."
아아. 아시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망했네, 이거. 그것도 엄청. 그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사나워지는 것이 피부로도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울 것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한 소녀. 아니라고 부정을 기대하는 듯한 소녀의 간절한 눈동자에 아시엘은 쓰게 웃으며 딱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세이라,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