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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16화 (21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3. 비탈길 레이스(3)

"그렇게 안 봤더니 상당히 무례한 인간이네, 후작."

후작의 성. 응접실에 후작이 나타나자 마자 케빈은 인상을 와락 구기고 그를 질책했다.

"다짜고짜 일정을 당긴다고 하질 않나. 그것도 직접 찾아온 게 아니라 병사 하나만 보내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그 건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기사의 곱지 못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셰단 후작은 쩔쩔매던 첫날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니 제가 당신들에게 굽힐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셀레니스 기사단은 유사시에 상황에 따라 후작 이하의 권리를 가진다- 고로, 아무리 높게 쳐 줘도 여러분은 제 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아아- 그러면 우리가 돕기로 한 것도 없던 일로 해도 괜찮은 건가?"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닌것 같습니다만."

뜻밖의 날카로운 반박이 돌아오자 후작을 몰아세우던 케빈은 움찔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들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 셰단 후작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당신들이 심어 두었다던 첩자가 잡혔다고요. 여러분도 그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그런 말을 하는 의도는 뭡니까."

카이스가 나서서 조용히 물었다. 그의 은근한 분노를 품은 날이 선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후작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윽고 당당히 대꾸했다.

"우위에 있는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저란 이야깁니다."

"......."

케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스카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었고 카이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셰단 후작은 의기양양하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쪽의 동료, 아직 꽤 어린 소년이라 들었습니다만. 쓸 사람이 없어서 어린애를 투입시키다니 여러분도 깨끗하다고는 말하기 어렵군요."

"그럼 그건 못 들었냐? 그 꼬맹이가 교단을 잡고 뒤집을 뻔 했다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이라도 어린애를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겠지요? 어째서 그가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폐하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당신들의 아둔한 머리로도 그 정도 판단은 가능하겠지요."

세 사람은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후작 역시 그 시선들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잠깐의 침묵 중의 대치의 끝에서 오스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후작, 귀족의 3대 미덕이 뭔지 알아? 찬스를 놓치지 않는 것, 행동을 주의하는 것, 말을 조심하는 것. 찬스는 훌륭하게 잡아채는것 같지만 나머지 두 개는 영 꽝이네. 그러다가 일찍 죽는 수가 있어."

"... 새겨듣겠습니다, 케스카 경."

케스카? 순간 의아하게 변한 카이스의 눈이 오스카와 케빈을 향했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그냥 넘어가, 넘어가. 카이스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입을 얌전히 다물었다.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그쪽 적발의 젊은... 아니, 어린 쪽에 가깝지만. 그쪽 분은 처음 뵙는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그러니까. 그. 카..."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는 선배들의 맹렬한 눈빛을 느꼈다. 후작의 시선 밖에서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피우는 그들 덕분에 카이스는 멈칫하고 말았다. 아냐, 안돼, 안돼! 그렇게 말하는 듯한 두 사람의 얼굴에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카이스가 오랫동안 뜸을 들이자 후작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카? 잘 못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카..."

"예?"

카이스는 갈등했다. 검은 눈동자를 갈 곳 없이 데구룩 굴린 그는 결국 아무렇게나 툭 내뱉고 말았다.

"카, 카시엘입니다."

"... 반갑습니다, 카시엘 경."

다행히 후작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간 모양이었다. 카이스는 그의 눈을 피해 선배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건 뭡니까. 아냐, 그냥 넘어가. 케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먼 해외에서 건너왔다는 향로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다. 잠깐 느긋하게 그 향을 음미하던 에쉬리아는 손에 든 성냥을 가볍에 흔들어 불을 껐다. 향로 안의 양초가 조금씩 타들어가며 꽃과 비슷한 향기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세이라. 이제 진정이 좀 되었나요?"

"......."

에쉬리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세이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치맛단을 꽉 쥐고 바닥만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다.

"세이라."

"...오빠는... 정말 거짓말쟁이에요?"

간신히 열린 아이의 입에서 울먹임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세이라의 맞은편에 앉아 잠시 바라보던 에쉬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길고 흰 손가락이 눈물로 얼룩진 소녀의 까무잡잡한 뺨을 감싸 천천히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판단은 세이라의 몫이에요. 하지만 이건 알아둬야 해요. 아시엘 군 때문에 우리 교단은 위험해질 뻔 했고, 세이라 양 역시 그에게 속았다고는 해도 그와 함께 교단을 위태롭게 만들었어요."

"......."

세이라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에쉬리아는 세이라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

"그렇죠? 세이라는 착한 아이고, 누구보다도 이그니스 님을 잘 따르는 충실한 종이니까요. 교단이 싫어져서 아시엘 군과 함께 신을 배신하려고 한 건 아니였죠?"

그녀의 조곤조곤한 말에 세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쉬리아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다면 되었어요. 신께는 다른 방식으로 봉사하면서 속죄드리기로 해요. 이제부터 더욱 충직하게 제 말을 따르면 되는 거에요."

".....네."

"아시엘 군은 모두를 속였어요. 세이라는 단순히 그의 말에 속았을 뿐인 거죠? 그는 교단의 파괴를 원하고 있었어요. 세이라는 그렇지 않죠? 교단이 없어지는 걸 원하지 않죠?"

".....네."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세이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소녀의 눈은 물기를 머금고 있지 않았다. 향로에서부터 퍼지는 꽃향기는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에쉬리아는 마치 아끼는 인형을 어루만지듯 세이라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세이라는 그런 나쁜 아이가 아니죠?"

"네."

"교단은 세이라에게 소중한 거죠?"

"네."

점점 세이라의 대답이 분명해졌다. 이제 향기는 카펫에 향수를 한 사발 쏟은 것 마냥 지독하게 공기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두 사람, 에쉬리아와 세이라는 개의치 않는듯 했다. 에쉬리아는 멍하게 풀린 세이라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바깥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해줄 거죠? 아시엘 군은 교단을 파괴시키러 온 악의 사자, 셀레니스 기사단의 한패고 감히 신을 사칭하려 든 죄인이라고."

"네."

세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쉬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착한 세이라, 밖에 나가서 그렇게 전해줄래요? 그 후의 역할은 이미 신께서 정해 놓으셨답니다."

"네."

세이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꾸벅 에쉬리아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종종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에쉬리아는 향로의 초를 바로 꺼버리고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지하는 다 좋지만 환기가 잘 안 되서 아쉽다니까."

"그렇게 공 들여서 어린애 꼬여낼 필요가 있어?"

독한 향이 방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기다리던 제스퍼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하게 남아 있는 꽃냄새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뭘 쓴거야?"

"평소랑 같은 거. 향을 섞어서 조금 더 진하게 만들어 봤지."

에쉬리아는 향로에서 초를 빼냈다. 액체로 녹아 있어야 할 그것은 새카맣게 탄 재로 남아 있었다. 향초가 아니라 향을 내는 가루와 섞어 빻은 약초 가루를 원통에다 채워 둔 것이었다.

"그리고 저 애는 요긴하게 쓰일 거야."

"어디에?"

"셰단 후작과는 관계를 긴히 유지할 필요가 있거든."

그녀는 잿가루를 쓰레기통에 조심스럽게 털어내며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제스퍼에게 물었다.

"내가 왜 하필 셰단 후작에게 손을 뻗었는지, 넌 알고 있어? 귀찮은 유령 소동까지 벌여 가며 영지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영지전을 일으키려는 이유를."

"으음..."

제스퍼는 신음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듯 에쉬리아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떡밥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아. 그렇게 잡은 물고기로는 상어를 낚아야지."

"무슨 소리야?"

"히스를 급하게 영입해서 유령 소동을 벌인 건 영지민들의 결속력과 신앙을 다지기 위해서지. 유령이 나타난 건 이 곳의 영주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서- 이런 소문도 흘리면 내 귀여운 말들은 평생을 바쳐 자신들을 위해 살던 영주도 가차없이 버릴 거야. 실제로 그랬고. 뭐, 그 애한테 트릭이랑 목적이 너무 쉽게 간파당해 버렸지만."

그녀의 굽 높은 구두가 두터운 카펫을 밟아 넓은 방 한켠에 놓인 장식장 쪽을 향했다. 그 구석에는 제스퍼의 방에서 옮겨 온 금빛의 레이피어가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민심을 잃은 주인은 쉽게 무너져. 그리고 텅 비어버린 영지를 셰단 후작에게 던져주는 거지. 그는 탐욕스러운 장사꾼이야. 하지만 그만큼 조심스럽지. 그러니까 이 스테이크에는 독이 발리지 않았다고 확신을 줘야 해. 후카덴 백작의 영지는 완전히 우리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리고 우린 그걸 당신에게 선사하겠다고."

"그래서?"

"후작은 알거야. 우리가 거저로 이 영지를 내 주는게 아니란 것을. 그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는 분명히 물겠지.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탐스러운 고깃덩어리거든. 그리고 우리의 눈치를 살필거야.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한 번 고기 맛을 본 개는 우리 손을 놓지 못할 테지."

쿡쿡 웃으며 그녀는 레이피어를 손에 쥐고 검날을 살폈다. 평범한 세검보다는 조금 무겁고 도신이 두꺼웠다. 주인을 잘 만난 건가. 에쉬리아는 손끝으로 날을 만졌다. 지금 감옥에 처박혀 있을 소년과 잘 어울릴 만 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의 관계를 잘 유지할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해선 먹이도 계속 줘야지. 후작은 특이한 취향이 있다고 들었어. 어린 소녀를 좋아한다지?"

"그럼-"

에쉬리아는 검에서 눈을 떼고 제스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지금 상황도 잊어버린 채 아름답게 휘어지는 그녀의 눈꼬리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후작은 다른 낚싯줄이야. 그 끝은 황제에게 닿아 있으니까... 직접 잡아채기엔 너무나도 연약한 줄이지만, 그래도 간간히 우리의 손끝에 진동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지. 그리고 우리는 더 깊은 곳도 엿볼 수 있게 되는 거야."

즐겁게 반짝이는 에쉬리아의 눈동자에 문득 붉은 빛이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제스퍼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미 그 미묘한 색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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