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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17화 (21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4. 비탈길 레이스(4)

"그래서, 작전은 있습니까?"

저녁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만 남기고 후작이 어디론가 사라지자 마자 카이스가 꺼낸 말이었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에 서린 조급함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듯했다. 케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있지. 일단 숨어들어서 쳐들어가고, 박살낸다."

"야, 야. 아서라. 대책 없는 상황인 건 사실이지만."

그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준 오스카는 골치가 아픈듯 뒷목을 주물렀다.

"일단 교단 측에서는 우리가 후작의 군대에 섞여 있다는 건 깨닫지 못한것 같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가."

"그래도 저희의 움직임은 예의주시 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 여자는. 아니면 다른 데 눈을 돌릴 틈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아시엘을 붙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그건 아닐 걸, 그렇게 허술한 녀석들은 아닐 테니까."

카이스가 덧붙이는 말에 케빈이 반박했다. 그것 역시 맞는 말 같아 카이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면 어떻게든 작전을 세우는 수 밖에 없네요. 별로 변하는 건 없겠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해야죠."

"그렇지. 일단 아시엘과 연락이 되지 않는 이상 그쪽의 상황은 알 길이 없으니 어떻게든 운에 맡길 수 밖에. 막히면 막히는 대로 돌파하는 수 밖에."

케빈의 손가락이 도르륵,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잠깐 응접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오스카는 떨떠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화약을 지고 불더미에 뛰어드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리고 뭣보다 나중에 부단장님한테 죽도록 혼날 것 같아. 교단과 후작 양쪽을 상대로 셋이라니, 이런 코미디가 따로 있냐."

"후작이 우리랑 교단 사이에서 간을 보는 것 같으니까... 지금쯤 어느 쪽이 우위인지 판단했다면 이미 우리가 합류했다는 걸 에쉬리아에게 보고했을 걸."

케빈이 지적하자 오스카도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절망적인 작금의 상황만 얼굴 앞에 들이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좁은 후카덴 영지는 몇 시간 후에는 난장판이 될 터였고, 교단의 영지민들은 셰단 후작의 병사들과 합심해 후카덴 백작의 성을 공격할 것이 자명했다. 아시엘이 교단과 신도들을 이간질하려 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실패.

"이제 와서 교단을 흩어버리는 건 불가능해. 삼파전으로 만들면 그래도 좀 나을 것 같았는데."

"그러면 남은 방법은 별로 없지 않습니까."

오스카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카이스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케빈도 동의하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급으로 미친 짓이지만."

"오늘 밤이 끝나기 전에 넷 다 목숨이 붙어 있을지, 난 지금 그게 제일 궁금한데."

진심이 듬뿍 담아 오스카가 말했다. 거기에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스와 케빈 역시 반신반의하는 상태였으니. 돌아갈 수 있을조차 의문이었다.

"이제 와서 말하긴 좀 뭣 하지만 병력 요청을 했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지금 누굴 상대하는지 잊어버렸어? 셰단 후작은 폐하의 돈줄이라고. 그리고 폐하는 우리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아냐."

"그럼 결국 답이 없었다는 거네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런 셈이지."

케빈은 휘유,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스는 새카만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처럼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셀레니스 기사단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세 명, 저희 측 병력에 함께 한다고 합니다."

[호오. 그런가요?]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여성의 음성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그녀에게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셰단 후작은 고개까지 크게 끄덕이며 열심히 이야기했다.

"갑자기 저를 돕겠다며 처들어 와서는 지휘권을 넘겨달라 요구했습니다. 허나 에쉬리아 님께서 인질을 확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자 얌전해 지더군요."

[그런 것 치고는 보고가 꽤나 늦으셨습니다, 후작님. 설마 그들이 오늘에서야 당신에게 접근한 것은 아닐 테지요?]

에쉬리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후작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그녀는 쿡쿡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그를 추궁했다.

[그래서, 마음은 다 정하셨나요? 이제 슬슬 어느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곳에 있는지 결정을 내리셨겠죠.]

"아, 아니, 그것이..."

후작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에쉬리아는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재미있다는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결정을 확실히 하셨다면요.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예, 예예! 최정예 병사들과 제 기사들이 대기 중입니다. 그 셀레니스 기사단의 세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음...]

에쉬리아가 잠깐 고민하는듯 하자 후작은 긴장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그녀는 결단을 내린듯 가볍게 말했다.

[죽여야죠. 안타깝지만.]

"예?"

[파견 중 목숨을 잃는 기사는 생각보다 많아요. 특별히 문제될 건 없어요. 아마도 그들은 병력 지원 요청도 하지 못할 겁니다. 후작님은 황제 폐하의 비호 아래에 있으니까요. 폐하를 따르는 당신에게 검을 겨눈다는 것은 황제의 개에게 맞지 않는 행동이니까요. 아마 그들끼리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겠죠. 하찮은 정의감 때문인지- 아니면 사로잡힌 동료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고작 그 정도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후작은 그녀의 뒷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하지만 에쉬리아는 개의치 않고 다시 분명하게 말했다.

[그들은 말살합니다. 당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황제 폐하도 크게 의심하지 않으실 거에요. 이미 그들이 황도에 영지전이나 저희 교단에 대해서는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니, 후작님은 바깥의 정의의 사도가 되시는 겁니다. 아마 후카덴 백작을 잡는 것은 쉬울 거에요. 이미 성은 텅 빈 것과 마찬가지니까. 지금부터 잘 들어 주세요.]

"예!"

[백작을 잡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하세요. 교단의 손을 벗어난 자는 모두 없애버리세요.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황도로 올라가서 폐하를 알현하세요. 후작님이 사전 보고 없이 영지전을 벌인 이유는 후카덴 영지를 완전히 집어삼킨 교단을 말살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에쉬리아는 저녁 식사 메뉴를 이야기하는 것 마냥 가볍게 이야기했다.

[교단의 배후는 후카덴 백작. 사실 모든 것은 그의 음모로 일어난 일이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기사단과 합류해 교단을 쳤지만 기사들은 불행하게도 작전 수행 중 사망. 당신은 훌륭하게 교단을 격퇴하고, 백작의 영지를 손에 넣은 영웅이 되는 거에요.]

"아..."

[이미 이 곳 주민들은 제 손 안에 있으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그늘 아래에서 후작님을 돕는 거죠.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일종의 계약금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해 두었답니다.]

그녀의 속삭임에 후작은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단 하나는 깨달았다. 여왕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진정한 악당이.

"선물.. 이라 함은."

[후작님, 상품들 중에 가장 값이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에쉬리아는 무시하고 엉뚱한 말을 던졌다. 후작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예?"

[이번 작전을 성공한다면 그것들의 절반은 당신의 것이 될 거에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던진 에쉬리아는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 버렸다. 후작은 순식간에 빛이 사그라드는 통신용 수정구를 보며 그녀가 남긴 말의 의미를 알아내려 힘겹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 때, 후작의 개인 침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님. 출병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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