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18화 (218/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5.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난다.(1)

해질녘이 되어서 출병 시간이 되었을 때,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던 후작이 다시 응접실에 들어섰다.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금세 하인에게 막혀 버리고, 창문이고 뭐고 꽁꽁 잠겨 있는 응접실에서 반쯤 갇힌 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뒤늦게 나타난 후작에게 불만을 표했다.

"어이, 늦었어. 나가지도 못 하게 해 두고 어딜 다녀온 거야? 따로 할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텐데."

"병사를 움직이는 것은 저에게 맡기시고, 세 분은 그저 전방에서 도와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 해도 충분할 테지요."

확실히 처음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빌빌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초반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짜고짜 쳐들어 와 몇 세대 동안 금 하나 간 곳 없이 튼튼하기 그지없던 두꺼운 오동나무 문짝을 부숴버린 자들에게 쫄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후작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의자를 당겨 와 세 기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내부는 거의 다 저희가 장악했기에 후카덴 백작만 사로잡으면 끝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삐딱한 어투로 오스카가 질문을 던졌다. 대충 예상했다는듯 후작은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테이블에 쫙 펼쳤다. 후카덴 영지의 간략화된 지도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외벽에 표시된 출입구를 가리켰다.

"혹시나 도주의 우려도 있으니, 군사는 셋으로 나눠 침입합니다. 동문, 서문, 북문으로 각각 들어가 후작의 성 앞에 다시 집결합니다. 그리고 2개 분대는 성을 포위하고, 나머지는 안으로 잠입해 백작을 잡는 것이 목표입니다."

"교단은. 설마 우리가 이대로 황도에 돌아가도 입 다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케빈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후작은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십시오. 처음에 약속드렸던 보상은 모자람 없이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제 정말로 그걸 원해서 저에게 찾아오신 것이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오빈 경과 케스카 경은 세상을 아는 분이니까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오스카와 케빈, 그리고 카이스는 살며시 얼굴을 굳혔다. 분명 아시엘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후작은 그들의 살기 깃든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세 분은 각자 흩어져서 분대 하나씩을 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병사들을 이끌고 산을 둘러가 허물어진 성벽의 개구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흐음... 뭔가 찝찝한데 말이야."

케빈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은 오스카와 카이스 뿐이었다. 후작은 더 이상 말할 생각은 없는지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 기사들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뚜두둑, 카이스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몸을 풀었다. 후작은 그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럼 따라오시죠. 오늘 밤에는 만찬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밤 보다는 지금이 더 진수성찬이죠. 아주 배가 터지겠군요."

소년의 그 살벌한 말의 진의를 알아듯지 못하고 후작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응접실을 나섰다. 그렇게 세 사람이 안내된 것은 성 뒤쪽의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그의 부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연무장은 무가인 메르티스 가의 것만큼 넓었다. 빽빽하게 열을 맞춰 선 병사들은 하나같이 단단한 무장을 하고 있었고 후작 휘하의 기사들은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덕분에 세 사람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후작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희 병사들입니다. 타 지역에서도 최고의 용병들과 병사들을 영입해 왔지요. 일단 기본은 상인인 몸인지라 방비는 필수이니까요."

"... 고작 후작 하나를 치러 가는데 이건 좀 과하지 않나?"

"방심은 금물입니다."

케빈이 더듬더듬 말했지만 후작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사 하나가 후작과 케빈, 오스카, 카이스를 위한 말 네 필을 끌고 왔다. 그들은 꺼림직하게 고삐를 넘겨 받았다.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오냐. 내가 북쪽, 케스카가 서쪽, 카시엘이 동쪽을 맡는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당신은 우리랑 좀 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겠어."

케빈이 히죽 웃으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지만 후작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말을 몰아 연무장의 단상 위로 올랐다. 다각, 다각. 해는 거의 다 떨어져 하늘에는 어느덧 별과 달이 차갑게 박혀 있었다. 후작이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를 툭 치자, 그는 기다렸다는듯 크게 외쳤다.

"불을 붙이시오!"

선두에 서 있는 병사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횃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화르륵! 곧 어둑하던 시야가 밝아지고 붉은 불꽃이 인형이라도 된 듯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의 얼굴에 일렁였다. 주변이 환해지자 후작이 직접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제 1군은 오빈 경을 따라가라! 케스카 경은 2군, 3군은 카시엘 경을 따른다! 집결지는 백작의 성, 도착하자 마자 성을 포위하고 내 지시를 기다려라!"

"예!"

사병들의 쩌렁쩌렁한 대답이 연무장을 크게 울렸다. 케빈은 킬킬거리며 카이스를 꾹꾹 찔렀다. 야, 너네 영지 병사들이랑은 조금 많이 다른데? 제 알 바 아닙니다, 메르티스 백작은 형님입니다. 소리 죽여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후작이 기합을 넣어 소리쳤다.

"그럼 출병이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케빈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가 곧 훌쩍 말에 탔다. 오스카와 카이스 역시 힘있게 안장에 올랐다. 케빈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조금 이따 보자. 다들 조심하고."

두 사람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은 카이스의 어깨를 툭툭 쳐 주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힝, 놀라 작게 울음을 터뜨린 말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곧 그의 뒤를 한 병대가 따랐다.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모두 연무장을 빠져나가자 오스카가 말고삐를 세게 당겼다.

"조심해라."

"예."

스쳐 지나며 오스카가 건넨 말에 카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곧 그 역시 병사들을 대동한 채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다. 카이스는 잠시 선배들이 앞선 곳을 응시하다 복잡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도 말을 몰았다. 다각, 다각. 작은 발굽 소리가 몇 걸음을 내딛자 곧바로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쿠웅,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고삐를 잡은 한 손을 단단히 하며 한편으로는 망토 속에 손을 넣어 검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쥐 죽은듯 고요한 황무지에 병사들의 무기와 기사들의 갑옷이 마찰하는 쇳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후카덴 백작령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지만 조금 둘러 가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병사들의 선두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케빈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영- 기분이 쎄 한데."

저벅, 저벅. 케빈은 별 말 없이 걷기만 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단 넷 뿐이지만 횃불을 들고 선두에서 걷는 갑옷의 기사들은 투구로 얼굴을 가려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물리적 전쟁이 뜸한 요즘 시대, 기사들을 이렇게 많이 두고 무장까지 이리 시켰다니 확실히 후작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 자금 역시 무시할 것은 못 되지만.

밤공기는 차갑고 섬뜩했다. 케빈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점점 손을 허리춤 쪽으로 서서히 가져갔다. 그런 묘한 침묵 속에서 점점 후카덴 영지는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힌 외벽의 북문에 다다랐을 때-  스릉, 철컥.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쇳소리가 케빈의 귀를 스쳤다.

"....!"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고 몸을 비틀었다. 까앙! 방금 전까지단 해도 그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오던 암기가 검에 부딪쳐 떨어졌다. 케빈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갑옷의 기사들이 검을 뽑은 채 투구 너머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병사들 역시 제각기의 무기를 쥐고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빈은 빠르게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아,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 건가."

후작과 교단은 이미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케빈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슬금 슬금 무장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그 하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시작될 줄이야. 케빈은 검자루를 꽉 쥐고 입술을 비틀었다.

"일부러 흩어 놓은 이유가 이거였나."

오스카는 난감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뽑았다. 간발의 차이로 습격을 피했지만 대신 목에 단도를 맞은 말이 피를 쏟아내며며 그의 발치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낙마는 아슬아슬하게 면했어도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네 명의 기사와 수많은 병사들. 어떻게든 돌파해, 성 내로 진입한다. 그리고 후작보다 먼저 후카덴 백작을 빼돌려야 했다.

'-가능할까.'

그는 두두둑, 손가락을 꺾으며 서서히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적들을 응시했다. 가능성은 둘째 치고 지금부터는 날뛸 차례였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실전 경험이 적은 막내가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카이스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뒤에 선 나무에 박힌 단도를 곁눈질했다. 꽤 위험했다. 5센치만 더 왼쪽으로 날아왔어도 아마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하게 됐을 터였다. 어깨에 단도가 스쳐가며 제복을 찢고 얇은 생채기가 남아버렸다. 카이스는 스릉, 검을 잡아 뽑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조금 귀찮게 되버렸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도신이 밤공기를 머금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며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는 병사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동문이 위치한 곳은 산기슭. 달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이 곳에서 다수와 싸우기는 여간 고역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카이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다잡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언제나 무뚝뚝하던 그의 흑색 눈동자가 살기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방해하지 마라."

소년의 나즈막한 분노를 시작으로, 전투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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