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8.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난다. (4)
호기롭게 외치긴 했지만 역시 벅차긴 벅찼다. 어느새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남고 호흡 역시 다소 거칠어졌다. 케빈은 숨을 고르며 자세를 바로 해 남은 인원을 노려보았다. 전신의 감각이 생생했다.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쁘지 않네, 가끔 이런 격한 운동도 해 줘야지."
"......"
케빈이 히죽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은 이제 질릴 대로 질려 있었다. 아직도 인원은 충분히 많았지만 원래의 3분의 1이 한 기사의 검에 무자비하게 썰려 나갔다. 피에 젖은 제복과 살기 어린 눈, 그리고 미소. 발치에는 굴러다니는 시신들. 괴물이 따로 없었다.
후우, 길게 숨을 뽑아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횃불의 붉은 빛이 어린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겨우 한 명, 이 사방이 무장한 병사들로 가득 찬 고립 무원에 혼자였지만 그의 존재감은 그 모두를 압도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렇다 해도 케빈은 그들과 같은 인간, 그렇기에 한계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 자신 역시 깨닫고 있었다. 여기에서 끌어 봤자 결국 불리해지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케빈은 결심한듯, 품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빈 손에 쥐었다. 양 손으로 무장한 그를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케빈은 침착하게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 그는 어느새 성문과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대략 30초 정도의 거리. 하지만 그의 사방으로는 빽빽하게 병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우두머리 격인 기사 둘을 순식간에 잃고 나서 몸을 사리고 있었지만 만약 케빈이 먼저 움직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두둑, 케빈은 뻐근한 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왼손에는 단도, 오른손에는 장검. 그의 달라진 무장에 그들은 일제히 태세를 더욱 단단히 했다. 어떻게 움직이려는 걸까. 병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함정 속의 그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맹수와도 같았기에. 케빈 역시 생각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파박! 그가 갑작스레 땅을 박차고 돌진하자 병사들은 순간 당황했다.
카아앙! 반사적으로 케빈의 검을 막은 병사는 다음 순간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힘에 경악했다. 케빈은 어렵잖게 그를 내던져 버리고, 그대로 포위망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이게 갑자기 미쳤나! 왜이래?"
"성문으로 가려는 속셈이다! 막아!"
누군가의 외침에 병사들은 와아아- 소리를 지르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검이 그의 머리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케빈은 급하게 팔을 들어 막았다. 푸욱, 피가 튀며 그의 팔뚝에 검이 꽤 깊숙히 박혔다. 그는 개의치 않고 검날을 맨손으로 잡아 뽑은 뒤 뚝 분질러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피가 묻은 검의 파편을 정면에서 그의 목을 조르려 하던 놈의 심장에 쑤셔넣었다.
"크허억!"
"꺼져!"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는 다시 검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왼손의 단도에도 주황의 선명한 빛이 깃들었다. 이변을 알아챈 병사들이 기겁하고 물러서려 했지만 케빈이 더욱 빨랐다. 어설프게도 등을 보인 놈을 단도로 베고 몸을 빙글 회전시키며 측면에서 덤벼오는 이들의 목을 한꺼번에 몸뚱이와 분리시켰다. 그 틈을 노리고 케빈의 옆구리를 파고들던 녀석은 단도의 다음 희생자가 되었다. 첫 번째로 휘두른 검에 그의 손목이 날아가고, 두 번째로 목에 찔러 넣은 단도로 목숨을 거뒀다.
"크허어억!"
그가 쓰러지는 것도 확인하지 않고 케빈은 입에 단도를 물고 제복 코트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피에 젖은 긴 제복은 그닥 도움 되는 물건은 아니었다. 팔뚝의 상처가 심하게 아파왔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셔츠 소매까지 걷어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우측에서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오던 놈의 얼굴을 갈겨버렸다. 빠가악-!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확실히 들렸다.
"쿠억!"
케빈은 비틀거리는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바로 옆에서 달려드는 놈의 멱살을 잡아 뻐어어억! 둘의 머리를 격돌시켰다.
"돌 머리가 동료라면 좋을 건 하나도 없지."
킥킥 웃으며 케빈은 다시 단도를 쥐고 앞으로 돌진했다. 걸리적 거리는 놈들은 걸리는 족족 죽여버렸다.우드득, 푸욱! 단도로 찌르고 검으로 베고. 이성은 이미 한참 전에 날아가고 없었다. 방어는 하지 않고 공격에 집중한 덕에 케빈 역시 몸에 상처가 하나 둘 늘어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크아아악!"
"죽여! 뭣들 하는 거야!"
누군가의 단말마와 기사의 고함이 뒤섞였다. 진한 피 냄새와 무언가를 죽이는 손 끝의 감각이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케빈은 포위망을 뚫어버렸다.
"저런 미친! 막아! 빨리 막으라고, 이 멍청한 것-"
기사가 악에 받혀 고래고래 외치던 것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기도 전 그의 머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더 이상 앞을 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케빈은 있는 힘껏 뛰었다. 목표는 물론 굳게 잠긴 성문이었다.
"젠장! 막아! 막아!"
퍽, 퍽- 그의 등에 뒤에서 날아온 암기가 꽂혔다. 케빈은 잠깐 비틀거렸지만 곧 몸을 빙글 돌려 계속해서 쇄도하는 단도와 암기들을 쳐내고 다시 달렸다. 그의 검에 서린 검기가 점점 더 빛을 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문 앞에 다다른 그는 단도를 다시 입에 물고 땅을 강하게 박차고 도약했다.
병사들은 경악했다. 추격도 멈추고 그들은 멍하니 케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에 물린 단도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번뜩였다. 양 손으로 검을 치켜든 케빈은 있는 힘껏 성문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순간 섬뜩한 정적이 주변 공기를 콱 틀어막았다. 그리고 그 직후, 콰아아아앙! 비현실적인 소음이 폭발하며 폭풍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며 병사들을 덮쳤다. 그들은 급히 몸을 숙여 피했다. 곧이어 쿠웅, 쿠우우웅! 육중한 무언가가 땅에 쓰러지며 지면을 울렸다. 쏟아지는 흙먼지가 조금 잦아들자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그의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뻥 뚫린 성문 안쪽으로 보이는 새카만 하늘이었다. 짙은 그리고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멀어져 가는 하얀 옷의 피투성이 기사. 그는 멍하니 몸을 일으키려다 무언가가 손에 걸리는 느낌에 문득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케빈이 버리고 간 제복 코트였다. 코트를 집어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롱받은 기분이 목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부득 갈며 쾅, 발을 굴렀다.
"언제까지 멍 때리고 있을 거냐, 이 머저리들아! 얼른 쫒아가!"
쉬지 않고 달린 케빈은 가까스로 인가에 다다랐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로 몸을 질질 끌듯이 들어간 그는 허름한 벽에 기대 힘겹게 숨을 골랐다.
"하으, 헉, 하, 젠장."
마지막 돌파 때 입은 상처들이 이제야 쿡쿡 쑤셔 왔다. 생각보다 훨씬 빡센데, 입가에 흐른 피를 셔츠 소매로 대충 닦아낸 케빈은 자세를 바로 했다. 너무 무식하게 움직였나, 스스로도 조금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아마 오스카와 카이스 쪽 역시 똑같은 상황일 터였다. 솔직히 그로서는 이런 방법 외에는 떠오르는 대책이 없었다. 이제부터 어쩌지. 그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생각했다.
'카이스가 제대로 빠져나오긴 힘들텐데.'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그에게는 무리였다. 오스카는 그렇다 쳐도 카이스가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쪽으로 도우러 가기에는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혼자 남을 오스카 역시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 오스카 녀석이라면 괜찮겠지."
성내가 아직 조용한 것을 보니 성 안에 들어온 건 케빈 혼자인듯 했다. 결국 그는 카이스 쪽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턱, 한 걸음을 옮기자 온 몸이 욱신거렸다. 그는 통증을 무시하려 애쓰며 벽에 의지해 어둠 속으로 비틀비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