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22화 (222/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09. 모든 일은 밤에 일어난다. (5)

"빌어먹을, 끝이 없네."

오스카는 결국 욕을 쏟아냈다. 죽여도 죽여도 적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감각까지 둔해질 지경이었다. 격한 움직임에 어깨의 상처는 끝도 없이 벌어졌다. 이제 슬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하지만 정면 돌파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지이잉- 그의 검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곧 빛을 머금었다. 어차피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잠깐 소강 상태가 된 전장을 둘러보며 그는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정신없이 싸우긴 했지만 어떻게든 성문과는 멀어지지 않도록 애쓴 덕분에 오스카는 성문과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에게 포위된 상태였다. 너무 지체하면 후작보다 먼저 백작에게 도달하지 못할 터였고 그렇게 되면 일은 네 배로 복잡해질 것이었다. 오스카는 고민에 빠졌다. 검기로 문을 박살낼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병사들의 검이 그의 등에 꽂힐 게 분명했다.

"그럼 차선책."

오스카는 슬쩍 입술을 비틀었다. 성난 병사들이 살기를 끌어올리며 성큼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오스카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파바박! 적들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 빠른 속도로 정면을 향해 튀어나갔다.

"어어어?"

"잠깐 실례!"

병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그는 강하게 뛰어올라 허둥대는 병사의 어깨를 사뿐 밟고 휘청이는 그의 머리를 발판삼아 높이 도약했다.

"우와아악!"

오스카는 위로 날아드는 검과 창를 요리조리 피하며 두 명의 병사를 더 짓밟고 빙글, 공중제비를 돌아 성문 바로 앞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병사들은 그야말로 닭 쫒던 개 모양새로 그를 아연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오스카는 그들을 향해 씩 웃어주고 유유히 성문으로 다가가 문틈으로 검을 쑤셔넣었다. 우지직! 안쪽에서 걸린 빗장과 자물쇠가 간단히 부서지고 곧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럼!"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병사들에게 혀를 베 내밀며 손을 흔들어준 그는 곧장 성 안으로 냅다 튀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아까보다 배로 분노한 병사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두두두두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쯧, 케빈은 혀를 찼다. 계속해서 움직이며 주위를 꼼꼼히 살폈지만 성 안은 완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아마 영지민들은 죄다 교단 쪽에 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앞이 막막해졌다. 애초의 작전은 오스카와 케빈이 백작성으로 가 백작을 확보해 탈출하고 카이스가 교단에 있을 아시엘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함정에 멍청하게도 정면으로 걸려든 덕분에 계획은 초반부터 꼬여 버렸다.

아마 후카덴 백작의 사병들은 영지민들과 함께 죄다 교단에 모여 에쉬리아의 지휘를 받고 있을 터였다. 후작의 병사들 만으로도 벅찼는데 그들까지 합세한다면-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도 후작의 병사들을 간신히 따돌리긴 했지만 상처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때문에 흔적이 남는 것이 신경쓰였다. 따라잡히기 전에 카이스와 합류하는게 급선무였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케빈은 칫 혀를 차며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탁, 탁탁탁.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이것은 분명 발소리였다. 한 두명의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아니나 다를까 케빈 앞의 골목길에서 어둠을 뚫고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싸우던 후작의 병사는 아니었다. 분명 교단을 따르는 백작의 사병들이었다.

"... 망했군."

진심을 담아 케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쪽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이 자신을 추격하던 자들이라는 데에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도망칠까, 양쪽에서 점점 다가오는 이들을 경계하며 케빈은 잠깐 생각했지만 유일한 탈출구에서도 병사들이 꾸역꾸역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빠르게 포기했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접근해 케빈을 빽빽하게 애워쌌다. 스릉, 케빈은 다시 검을 뽑았다. 피가 엉겨붙어 엉망이 된 그의 검이 다시 날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그의 눈 역시 날카로워졌다. 백작의 군단 중 선두에 선 자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죽여라! 에쉬리아 님께 절대로 보내지 마라!"

"와아아아!"

그것을 신호로, 양 측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케빈에게 우르르 떼를 지어 달려들었다. 케빈은 몸을 숙이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날아들 검에 대비하고 있을 때, 퍼어엉!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자욱히 피어올랐다.

"뭐, 뭐야?"

"쿨럭, 쿨럭! 커헉!"

어리둥절하게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괴롭게 기침을 토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케빈 역시 의아해져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무언가를 알아채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새하얀 연기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지독하게 익숙한, 망할 친구이자 단장의 등이었다.

오스카는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다. 내가 왜 그랬지, 하고 후회까지 했지만 이미 했던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오스카의 조그만 심술- 마지막의 그 메롱-은 안 그래도 약이 올라 있던 병사들의 사기를 완전히 올려버렸고, 덕분에 오스카는 안 그래도 해야 할 운동을 더욱 격하게 하는 중이었다.

"망할, 작작 좀 따라와 이 미친놈들아!"

뒤를 향해 욕을 퍼부었지만 그것은 추격자들의 기세를 더욱 올릴 뿐이었다. 덕분에 오스카는 처음 목표한 백작성과도 점점 멀어지는 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샌가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 결국 성문 앞에서의 격투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저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속으로 외치며 오스카는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후에 합류한, 후작의 사병들과는 조금 다른 옷차림의 병사들은 아마 후카덴 백작의 병사들일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에쉬리아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을 터였다.

"아오, 진짜 미치겠네!"

내가 진짜 두 번 다시 이딴 짓을 하면 케빈의 아들이다, 오스카는 이를 북북 갈며 정신없이 달리다 곧 끼긱 급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골목이 코앞까지 닥쳐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멍청이! 오스카는 그만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닥쳐온 군단이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스카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자신 뒤의 벽과 한도 끝도 없는 적군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완전 몰려 버렸잖아, 미간을 와락 구긴 그는 다시 검을 뽑았다. 일진이 사나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까보다도 상황이 나빴다.

다시 끔찍한 긴장감 속에서의 대치 상태가 이어져 갔다. 병사들 역시 아까 오스카의 사람 같지 않은 실력을 똑똑히 본 터이니 섯불리 덤벼들지는 않았고 오스카 역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 언제 달려들지 모를 사냥개들을 앞에 두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갑자기 후방에 서 있는 병사들로부터 비명이 터져나왔다. 크허엉! 하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함께 갑자기 한 병사의 몸이 하늘로 치솟하 담장 넘어로 날려져 버렸다. 오스카는 멍하니 검을 내렸다. 병사들은 곧바로 태세를 바꿔 뒤의 정체 모를 적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젠장, 이 녀석 다른 동료는 같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가?"

"몇 명이 됐든 죽이면 그만이야, 허둥대지 마!"

선두 급의 갑옷의 기사가 그렇게 외쳤지만 대열은 뒤쪽에서부터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으아악, 크악! 괴물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짐승이! 잠깐, 뒤로 좀 물러나! 여러 목소리가 뒤섞이는 아수라장, 오스카는 미소지었다.

"늦었어."

파바박, 네 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힘차게 뛰어올라 오스카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헤치고, 입에 비명을 질러대는 남자를 문 채 유유히 걸어 또 다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뾰속 솟은 귀, 달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는 털, 유리알 같은 눈동자. 병사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스카를 보호하듯 그의 앞에 버티고 선 것은 두 마리의 거대한 늑대였다.

카이스는 점점 힘이 부치는 것을 느꼈다.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은 조급해졌지만 적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엄청난 수를 베었어도 또 그 배는 되는 병사들이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결국 카이스는 성문 바로 앞에 몰려 포위당하고 말았다.

공기 중에 섞인 비릿한 냄새와 뜨거운 공기, 손과 얼굴에 엉긴 누군가의 피 때문에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각오는 다졌고 적군이라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익숙하지 못한 현장에서 카이스는 지쳐 갔다.

헉, 헉, 숨을 고르며 카이스는 성문에 등을 붙였다. 앞을 경계하면서도 문을 세게 밀어 봤지만 여전히 굳건히 잠겼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부술 수 밖에 없는 건가. 검기로 벤다면 가능할 테지만 앞에 수많은 적들을 두고서는 무리였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바로 목이 떨어질 게 틀림 없었다.

어떻게 하지. 카이스는 품에 손을 넣어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단도를 꺼내 코트의 소매 안으로 숨겼다. 다행히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정면을 경계하며 문의 중앙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가 외쳤다.

"....! 이 자식 문 잠금쇠를 파괴할 생각이다!"

"이런."

카이스는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급한 대로 검기를 일으켜 문틈에 콱 박았다. 그러는 사이 병사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안돼, 카이스는 다급하게 단도는 움직였다. 하지만 조금 길이가 모자랐는지 잠금쇠는 잘리지 않았다.

"뒈져라!"

"젠장!"

결국 카이스는 포기하고 다시 튀어나갈 태세를 취했다. 병사들은 지척까지 다가왔고, 그 역시 발에 힘을 주었다.

"뭐 하는 거야."

가까이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대로 튀어나갔을 터였다. 제대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 카이스에게 덤벼 오던 이들의 검이 댕캉, 카앙,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리고 등 뒤의 문 역시 무언가가 깨지는 우드득 하는 소음과 함께 곧 쩌어억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카이스는 몸에 힘을 뺐다. 묘한 허탈감과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소년을 대신해 병사들의 앞에 선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간단하게 물었다.

"괜찮나."

카이스는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간단하게 문을 부숴버린 여자가 검을 거두며 인상을 구겼다.

"너희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나중에 돌아가서 보자."

"...예."

이번에는 간신히 대답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다. 여자, 아델레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척척 걸음을 옮겨 제르닌의 옆에 섰다. 새로이 나타난 전력에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곧 다시 태세를 정비했다. 아델레트는 카이스를 쳐다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얼른 가, 마왕한테서 공주님을 구해야지. 케빈도 그쪽으로 갈 거야. 여긴 우리가 맡는다."

"......."

카이스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뒤로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행태를 지켜보던 갑옷 기사가 분에 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가 그냥 보내줄 것 같은가!"

"그냥 안 보내주면 어쩔 건데? 우리 죽이고 가게?"

아델레트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빛을 본 그녀의 애검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바닥에는 아마 카이스가 해치웠을 듯한 병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꽤 수고 했나 보네, 아델레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의 망설임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너희 둘 다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성문에다 걸어 주마!"

"아마 힘들 텐데."

다시 기사가 악을 쓰자 그녀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제르닌은 코웃음도 치치 않았다. 아델레트의 검과 제르닌의 검이 달빛을 머금고 시리게 번뜩였다. 그녀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꼬마들 괴롭힌 녀석들은 어른들이 혼내줘야지. 그러니까, 이쪽에서 먼저 간다."

아델레트는 제르닌과 주먹을 가볍게 톡 부딪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지면을 차고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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