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1. 새벽의 불꽃 (1)
지하 3층의 깊은 곳. 교주와 부교주의 방을 지나 커다란 문을 열고, 횃불만이 겨우 앞을 밝혀주는 음습한 지하.
그리고 그 가장 깊은 곳의 감옥에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벽에 기대 앉은 작은 사람이 있었다. 소년의 감시를 명 받은 남자는 조금 불안해졌다. 저거 죽은 거 아냐,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하루동안 들어간 식사도 손 대지 않은 그대로 한 구석에 밀려 있었다.
영지민들의 주인이자 교주인 에쉬리아 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미모의 소년은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이라도 된 듯 차갑고 축축한 돌바닥에 한쪽 팔을 무릎에 걸치고 앉아, 숨을 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나 교단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 치고는 별 저항 없이 감옥까지 끌려와 갇힌지 만 하루. 그는 최소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은 소리 없이 눈을 천천히 떴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간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소년, 아시엘은 굳어 있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인가."
아시엘은 자세를 풀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을 냈다.
우지지직! 세 남자의 발길질에 애초에 잠겨 있지도 않던 신전의 두터운 오동나무 문이 박살났다. 얼떨결에 두 사람을 따르면서도 슌은 머릿속에 가득 차오르는 물음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 케빈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쾌하게 외쳤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이다! 뱃속에 넣어 둔 거 다 토해 낼 준비나 하셔!"
신상 앞에 가득 모여 있던 후카덴 백작의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곧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잠깐, 잠깐. 이러면 일부러 미리 와서 몰래 처치해 둔 보람이 없잖아- 슌은 식은땀을 흘렸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그는 카이스를 돌아보았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우리 꼬맹이 내 놔! 안 그럼 네놈들이 후회할걸!"
"그 발칙한 꼬맹이는 우리 수중에 있다! 그 놈의 목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무기를 버리시지."
누군가의 대꾸에 케빈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스 역시 어깨를 으쓱했고 슌도 지금은 딱히 제지를 걸 생각이 없는듯 했다.
케빈은 저벅 저벅 그 말을 한 병사에게 다가가 그 앞에 우뚝 섰다. 저도 모르게 느낀 위압감에 그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케빈은 히죽 웃으며 그의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었다.
"멍-청이. 우리가 그 걱정 했으면 여기까지 쳐들어 왔을까 보냐."
"뭐. 뭐?"
병사는 이를 으득 물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케빈은 여전히 여유롭게 킥킥 웃기만 할 뿐이었다. 병사의 갈 곳 없는 물음에 무뚝뚝히 답을 덧붙인 것은 카이스였다.
"제가 당신들이었다면, 그 녀석을 인질로 삼겠다는 무모한 발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뭐라고? 건방지게-"
뻐어억! 카이스를 향해 검을 제대로 치켜들기도 전, 병사의 얼굴에 날아든 것은 케빈의 주먹이었다. 어어어? 하는 주변의 당혹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그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신상 아래에 처박혔다. 쿠웅! 둔탁한 소음이 홀에 울려퍼지졌다.
병사는 뒤늦게 엄습하는 통증에 끄어억, 신음을 흘렸다. 케빈은 손을 탈탈 털며 자신을 흉흉하게 쏘아보며 점점 살기를 키워가는 민간인과 병사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바깥보다 한층 상대하기 까다로워진 적들을 찬찬히 눈으로 가늠했다.
"얘넨 죽이면 안된다고?"
"약물에 의해서 제대로 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전달 받았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좀 귀찮게 되네요. 여기서 더 일을 만들지 말아 주세요."
슌의 간절한 한 마디에 그는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그러면 남은 것은 육탄전, 곧바로 이 무리를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게 답이었다.
"여기에만 있을 리 없고... 아마 2층도 가득 찼겠지."
"빨리 처리하고 가야죠."
뚜둑, 카이스가 손 마디를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둔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한 평소와는 다르게 어째 조급해 보이는 뒷모습이 재미있어서 케빈은 킥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하게 기절 정도면 되겠지, 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죠."
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신이 산다는 성스러운 신전- 두말 할 것도 없이 3대 몇 십이 무식한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털썩! 감옥을 지키던 간수는 잠잠하던 와중의 갑작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기겁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쇠창살 쪽으로 달려갔다.
"이봐, 왜 그래? 야!"
"으ㅡ"
죽은 듯 벽에 기대 앉아만 있던 소년이 바닥에 쓰러진 채 웅크리고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거야? 한눈에 보기에도 소년의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긴 듯 했다. 그는 당황해 쇠창살을 쾅쾅 두드렸다.
"뭐야? 뭐가 문제야?"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설마 미동도 하지 않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는 이것 저것 따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가지고 있던 열쇠를 꺼내 문을 따 안으로 들어갔다. 아시엘의 곁에 앉은 남자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이, 괜찮아?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
작은 소년이 식은땀을 흘리며 보기에도 안타깝게 몸을 떨어 대면 아무리 적이라도 그냥 넘어갈 일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상당한- 의 범주를 넘어선 아름다운 외모의 아이라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시엘은 달달 흔들리는 손끝을 까닥였다. 더욱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남자가 의아하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날렸다.
빠악! 경쾌한 타격음과 동시에 남자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시엘은 몸을 추스른 후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히 일어나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미안해요, 아저씨. 나중에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듣지 못할 상대에게 짤막한 사과를 건넨 그는 곧 쭈욱 기지개를 펴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근육을 일깨웠다. 하루 종일 귀를 기울여 바깥 상황을 살피느라, 그리고 동료들의 시원스러운 스타트를 포착한 직후에는 현기증을 가라앉히느라 한참 동안이나 꼼짝하지 못한 탓에 온 몸이 뻐근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지나칠 정도로 전신운동을 할 예정이니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는 간수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겨 자신의 어깨에 걸친 후 열쇠까지 빼돌려 남자를 넣어둔 채 다시 감옥의 문을 잠궈버리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커다란 문을 열고 감옥을 완전히 빠져나와 복도에 서자 지하의 축축한 공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훈훈한 온기가 훅 끼쳐왔다. 아시엘은 주변을 살피며 종종걸음을 치다 곧 제스퍼의 방을 발견했다. 이 너머에 그의 검이 있을 터였다.
아시엘은 귀를 기울여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철컥, 하는 둔탁한 느낌이 걸렸다. 아시엘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물러섰다. 지금은 혼자서 문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서. 쿵, 쿵! 아마 지상 1층에서부터 울려퍼지는 듯한 소음이 간혈적으로 바닥을 울렸다.
때리고, 치고 던지며 케빈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의 오른쪽에는 카이스가 손에 걸리는 족족 사람들을 기절시키며 뒤를 따랐고 슌 역시 효율적으로 민간인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없는 쪽으로 쓰러뜨렸다.
"1층은 제가 맡겠습니다. 둘은 내려가요."
"알았어!"
케빈은 막 덤벼들던 한 남자의 멱살을 잡아, 어디서 가져온 건지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여자에게 냅다 던졌다. 끼아아악! 우어억! 방정맞은 비명소리가 소란 속 섞여들었다. 여신상은 이미 깨지고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카이스 역시 당장 앞을 가로막는 병사에게 발길질을 하고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케빈 역시 걸리적거리는 이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슌에게 루이카엔이 준 해독초 꾸러미 하나를 던졌다.
"금방 온다! 기다려!"
"천천히 오십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슌은 꾸러미를 받아 들고 픽 웃으며 대꾸했다. 딱히 그 녀석이 눈에 밟혀서 온 건 아니니까. 겨우 잊고 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르며 새삼 입맛이 썼다.
"그냥 먼저 처리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지."
작게 중얼거린 그는 뒤에서 닥쳐오는 남자의 주먹을 휙 피하고 그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렇지?"
"뭐?"
당연히 남자는 이해하지 못해 눈을 둥그렇게 떴고, 그는 답을 얻기도 전 슌의 손에 의해 바닥에 패대기 쳐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죄수가 탈출했- 크헙!"
복도를 활보하는 아시엘을 발견하고 고함을 치는 남자의 명치에 그의 주먹이 꽂혀들었다. 짧은 신음을 흘린 그는 곧장 바닥에 쓰러졌다. 아시엘은 그가 뒹구는 것을 무심하게 내려보다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제법 큰 소란이 일었는지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제는 아우성과 타격음이 예민한 귀에 들려왔다.
약초를 옮기던 이들을 간단하게 쓰러트리고, 또다시 조우한 병사들을 넉다운 시킨 그는 드디어 지하 1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아시엘은 잠깐 거칠어진 호흡을 정리하고 힘차게 계단을 밟고 올랐다. 탁탁탁,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힘있게 계단참에 울려퍼졌다. 한동안 인적 드문 복도를 다시 달려 드디어 마주한 두 번째 관문의 커다란 문을, 그는 주저 없이 열어젖혔다.
콰아앙! 고요한 기도 와중 난데없이 공기를 찢는 파열음에 신도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집회장의 앞문, 에쉬리아와 제스퍼만이 사용하는 화려한 문짝이 활짝 열려 벽과 충돌한 반향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등장한 것은 소년, 아시엘이었다.
"뭐, 뭐야?"
"설마 탈출했나?"
당황하는 목소리들을 무시하고, 아시엘은 단상 위로 훌쩍 뛰어올라 회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평소의 배가 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기를 정비하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는 예의 그 약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출정 준비를 하는 중인듯 했다. 병사들은 으득 이를 악물며 저마다 칼과 창을 챙겨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놈! 이 발칙한! 감히 우리들을 속이고 교단을 차지하려 한 주제에 탈출을 하다니! 이 자리에서 찢어발겨 주마!"
아시엘은 히죽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크게 외쳤다.
"나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소속, 아시엘 아르셰인! 무단으로 영지를 점거하고 반역을 꾀한 너희들을 처단하러 왔다. 애초부터 목적은 그쪽이었어. 속은 쪽이 바보지."
"뭐가 어째? 감히 신성 모독을!"
비웃는 듯한 마지막 말에, 결국 사람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저 녀석을 죽여버려! 죽여라!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난 그들은 우르르 아시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기도 없이 맨몸인 소년 하나와 검, 활, 단도 등 무장한 사람들. 아무리 신도들이 오합지졸이라도 승산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되려 단상 아래로 뛰어내려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날아드는 검날을 피하고, 솜씨 좋게 급소만을 때려 제압하며 그는 파도같이 밀려드는 신도들을 가르고 어느 한 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몇 개의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시엘!"
"선배, 카이!"
거짓말하지 않고 정말 감정이 욱 하고 올라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아시엘은 떨어진 후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던 이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케빈과 카이스 역시 아수라장 사이에도 선명히 보이는 그의 모습에 반가움을 금치 못하고 마주 달려갔다. 아시엘은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땅을 박차고 도약했고- 그대로 케빈의 얼굴에, 카이스의 명치에 작은 발을 꽂아 넣었다.
"크어억!"
"끄억!"
두 사람은 경악하며 뒤로 쓰러졌다. 사뿐, 가볍게 착지한 아시엘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늦었잖아요!"
끄으윽, 케빈과 카이스는 아픔을 간신히 삼키며 아시엘을 올려다 보았다. 앳된 얼굴에는 분명 반가움을 담은 미소가 담겨 있었지만 그들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 나가면 죽겠구나. 케빈과 카이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