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25화 (22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2. 새벽의 불꽃 (2)

카이스는 문득 아시엘의 안색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핏기 없는 얼굴이며 며칠 새 더욱 가늘어진 팔목이 그가 이야기하지 않는, 아마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 말들을 대변하는 듯 했다. 저 언짢다는 드러난 표정 안의 얼굴은 어떤 것일까. 카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늦어서 미안."

"됐네요."

그는 불퉁하게 대꾸하는 아시엘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 그들을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케빈 역시 곧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으그극, 아파 죽겠네... 쪼그만 게 힘은 더럽게 세요, 하여튼."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어렵지 않게 몸을 일으켰다. 카이스 역시 끙, 소리를 내며 얻어맞은 곳을 문질렀다. 뾰루퉁하게 그들을 지켜보던 아시엘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 그 피는-"

"아."

케빈은 새삼 자신의 몰골을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의 상처에, 피로 얼룩 덜룩해진 셔츠. 그는 건성으로 옷을 탁탁 털며 씩 웃었다.

"걱정 마셔, 거의 다 내 거 아니니까."

"선배도 꽤 너덜너덜한것 같은데요."

아시엘은 케빈과 카이스의 엉망이 된 몰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 사람은 잠시 잊고 있던 적들의 존재감 덕분에 정신을 현실로 돌려야만 했다.

"꼬마가 침입자와 함께 있다!"

"일단 넌 뒤로 물러서!"

카앙! 케빈은 아시엘을 뒤로 확 밀치고 그를 노리는 무기를 쳐냈다. 카이스 역시 그를 등지고 검을 뽑아 케빈이 미처 방어하지 못한 공격을 막았다. 챙, 땡그랑! 서툰 솜씨로 날아들던 단검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케빈은 혀를 쯧 차며 검을 치켜들었다. 카아앙! 병사의 커다란 대검과 케빈의 검날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야, 너 검은?"

"그저께 뺏겼어요! 지하 3층, 잠긴 방에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까지 안 지켜줘도-"

아시엘은 두 사람의 옆구리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가 병사에게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카이스를 노리고 달려드는 한 여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꺄악, 우당탕! 그녀가 뒤로 넘어지며 그 육중한 몸을 피하지 못한 병사들과 영지민들이 층이 진 좌석 아래로 우르르 굴러 떨어졌다.

"괜찮거든요!"

"거 참, 고집 세기는. 일단 검부터 찾으러 가자. 에쉬리아란 녀석도 지하에 있는 거 야냐?"

"전 못 봤지만, 제스퍼가 아래층에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아시엘이 외치는 말에 케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를 강하게 밀친 후 배를 세게 걷어찼다. 크헉, 짧게 비명을 지른 그는 곧장 나가떨어졌다. 카이스 역시 대치하던 남자의 검을 흘려버리고, 그가 비틀거리는 사이 뒤통수에 호된 발차기를 선사했다. 빠악,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대로 실신했다.

아시엘은 잽싸게 그의 검을 챙겨들었다. 케빈은 꾸물꾸물 밀려드는 이들을 견제하며 뒤로 물러섰다. 한눈에 봐도 그들은 제정신이 아닌듯 했다. 의지가 보이지 않는 텅 빈 눈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그들을 향한 적의 뿐이었다. 에쉬리아 님, 에쉬리아 님, 그들 사이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이름에 카이스 역시 질린 얼굴을 했다.

"너도 그 약초 연기 마셨어?"

"조금. 약효는 없었지만..."

케빈은 조금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금 그들이 가진 해독제는 그 독 성분과 반발해 상대방을 잠들게 만드는 것. 잠시 고민하던 그는 카이스에게 눈짓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다. 카이스!"

"예, 선배님!"

적당히 눈대중으로 기회를 보던 케빈은 꾸러미에 손을 넣어 주먹만 한 해독제를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무슨 얘기들을 하는 건지 아시엘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카이스가 갑자기 검을 집어넣고 두 팔로 자신을 번쩍 들어올렸을 때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하는 거야!"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원망이라면 나중에 들을 테니까."

케빈이 단호하게 말하고 카이스까지 그를 안아든 손에 힘을 주자 아시엘은 뭐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숨 참아라, 꼬맹이!"

"네에?!"

그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케빈은 퍼엉! 해독제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카이스는 아시엘을 감싸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안긴 채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아시엘은 직감적으로 아까 간수에게서 빼앗은 망토로 코와 입을 가렸다.

"콜록, 콜록, 콜록!"

"이게 뭐야! 우에에엑!"

사람들이 몸을 비틀며 발버둥치는 사이를 헤집으며 케빈과 카이스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강한 진동에 아시엘은 한쪽 팔로 친구의 목을 꽉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려가면 보자, 속으로 살벌하게 중얼거린 그는 케빈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선배, 이게 뭐에요?"

"해독제! 마탑쪽에 네 지인한테 부탁해서 받아왔다나. 넌 입 다물고 얌전히 있기나 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집념으로 덤벼드는 한 남자를 걷어 차고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도 다리에 엉겨 붙는 이들을 대강 밀어버리며 케빈이 대꾸했다. 난 민폐 덩어리인가.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해독제를 터뜨린 곳과 점점 멀어지며 비교적 영향을 적게 받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연기로부터는 슬슬 안전하다고 판단한듯 카이스는 아시엘을 다시 내려놓았다.

"여기서부터 단숨에 간다. 둘 다 괜찮지?"

"네!"

케빈의 외침에 두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별다른 신호 없이 셋은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정면에서 달려드는 자들은 케빈이 뚫고, 우측은 아시엘 좌측은 카이스가 처리하며 서로의 곁을 지켰다. 검자루를 쥔 주먹으로 막무가내로 돌진해 오는 소년의 가슴팍을 치고 카이스는 곧장 왼발을 회전축 삼아 크게 뒤쪽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빠아악! 아니나 다를까 빈 틈을 노리던 남자 하나가 정통으로 맞아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머리 위에서 날아드는 도끼날은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 콰아앙! 나무 바닥을 작살냈다. 카이스는 기겁하며 방금 공격을 감행한 상대를 확인했다. 14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는 경악하면서도 방비가 허술한 그녀의 명치를 때려 쓰러트렸다. 잠깐 여유가 생긴 틈에 그는 아시엘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유려한 움직임으로 그는 효율적으로 적을 하나 하나 쓰러트리고 있었다. 빼앗은 검은 그에게는 조금 무거웠는지 방어용 외에는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것 같았다. 쿠웅, 꽤 힘겹게 휘두른 철제 검에 그를 향해 내리 꽂히던 나무 몽둥이가 뚜둑 부러졌다.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평범한 아낙은 눈이 뒤집어진 채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아시엘은 혀를 쯧 차고는 육중한 공격을 손쉽게 피하고 그녀의 뒷목을 쳐 간단히 기절시켰다. 별 다를 것은 없지만 묘한 위화감이 카이스를 덮쳤다.

"...너 마법은?"

"......."

그가 툭 던진 질문에 아시엘은 허를 찔린듯 움찔했다. 케빈 역시 카이스의 말을 들었는지 몸을 홱 돌려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마법이 왜? 뭐 어쨌다고?"

"ㅡ 못 써."

남몰래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아시엘은 담담하게 답했다. 회장을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보였다. 내부는 충분히 헤집어 놨고 신전 밖은 슌이 지키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듯 했다. 케빈은 덤벼 오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며 사납게 캐물었다.

"뭐라고? 마법을?"

"들어온 첫 날이었던가, 둘째 날이었던가. 에쉬리아에게 당했어요. 마력을 흩어 버리는 독에."

왜 죽이지 않았는지는 상당히 의문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로선 아시엘을 없애버리는 쪽이 더 이득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굳이 살려서 불화의 씨를 남겨둔 이유는 뭘까. 그의 흩어지는 생각은 카이스의 외침에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 바보야! 왜 진작 말 안 한거야!"

"말 해봤자 별 수도 없었잖아, 어차피 잡혀 있는 이상 마법을 쓰건 못 쓰건 차이도 없고."

"그 말이 아니라 네 방어 수단이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잖아, 이 답답아!"

"지금 말해서 뭐해요! 나가서 해요, 나가서!"

케빈이 나무라자 아시엘은 빽 마주 소리쳤다. 콰아앙! 아옹다옹 하면서도 세 사람은 단숨에 사람들을 뚫고 복도로 튀어나왔다. 카이스는 다시 아시엘을 번쩍 들었고 케빈은 해독제를 터뜨렸다. 퍼어엉! 진득한 연기가 순식간에 주변을 메우고 곧 해독제의 하얀 연막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들은 복도를 따라 빠르게 달렸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이동하며 케빈은 침착하게 지시했다.

"지하로 가서 일단 검을 찾고, 에쉬리아랑 제스퍼란 자를 찾는다. 아시엘, 네가 얼굴은 알고 있지?"

"네. 것보다 내려줘!"

아시엘은 카이스의 등을 퍽퍽 때렸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작으니까 저렇게 안기는구나, 케빈은 속으로 쓰게 웃음을 터뜨렸다. 양 팔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폭 안긴, 남자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포즈지만 솔직히 잘 어울린다는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하 2층엔 뭐가 있다고?"

"호화 객실이요. 가끔 찾아오는 거래 상대를 대접하는 곳 같아요. 두 사람이 있다면 아마 거기일 거에요... 아까 지하 3층에서는 딱히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리고 내려 달라니까?"

카이스는 지금 2번째로 아시엘의 말을 무시하는 경이를 보이고 있었다. 빠직, 조금 열 받았는지 아시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가서 보자. 아무리 그라도 이런 난장판 속에서 친우를 두 번씩이나 팰 수는 없었는지 아시엘은 조용히 뒤를 기약했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느낌에 카이스가 몸을 부르르 떤 것은 따로 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휴재공지입니다ㅠ

안녕하세요!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의 작가 가언입니다. 언제나 즐겁게 읽어 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와 사랑♡♡을 드리며 오늘도 죄송스러운 공지를 들고 왔습니다..ㅠ

이그니스 교단 에피소드는 지금 절정을 달리고 있습니다만 저도 이 작품이 초작인데다 처음으로 이렇게 길고 스케일 큰 에피소드를 진행하다 보니 머리가 과부하가 걸려버렸습니다

8ㅁ8 마침 이번 주 금요일부터 제주도 여행 일정이 잡혀서 잠깐 쉬다 올까 합니다! 가볍게 외전도 써보고 싶고 차마 두 눈 뜨고 못 봐줄 초기 편들 퇴고도 할 겸 2주일만 쉬다가 돌아오갰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거듭 죄송하단 말씀을 드리며ㅠㅠㅠ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어요! 사랑합니다! 다음주 목요일엔 가벼운 외전 한 편, 다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본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외전. 인성 정리는 방 청소에서부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 우중충한 날씨였다. 스산한 공기 때문인지 언제나 시끌벅적한 황성도 묘하게 고요했고 범죄자들도 이런 날에는 영 움직이고 싶지 않는지 일 역시 평소의 반절도 되지  않아 오후가 되기 파견에 나가지 않은 모든 인원이 한가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휴일을 바라 마지않는 기사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지루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 흰 사냥개 무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함에 못 이겨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야, 뭐라도 할 일 없냐? 이러다 몸에서 곰팡이 필 것 같아."

"네놈 머리엔 이미 곰팡이가 가득 낀 거 아녔냐? 뭘 새삼-"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케빈이 웅얼대자 루이카엔이 마찬가지로 나른하게 대꾸했다. 그의 발치에는 케빈의 뱀 앤이 쉭쉭 혀를 낼름대고 있었고 모로 누운 케빈의 배 위에는 독수리 에니르가 날개를 가다듬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는 늑대형으로 변한 베르칸이 배를 내놓고 아무렇게나 뒹굴었고 벨킨 역시 엎드린 채 코만 벌름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시엘은 그들의 등을 베개 삼아 파묻혀 책을 읽다 반쯤 조는 중이었고 카이스 역시 어김없이 그 근처에 앉아 멍하니 천장만을 응시했다.

간간히 괴성을 질러 가며 무의미한 카드 게임을 반복하던 오스카와 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졌는지 신중하게 카드로 탑을 쌓으며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다 곧 와르르 무너뜨려 버리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기타 등등, 한쪽에 모여 수상한 책을 보며 히히덕거리거나 가죽만 남은 것 마냥 축 늘어져 있는 단원들을 지켜보며 한숨을 푹 내쉰 것은 다름 아닌 아델레트였다. 이 치들을 어쩌면 좋을까. 결국 그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다들 발딱 일어나. 대청소나 하자."

"으엥?"

난데없는 말에 전원은 고개만 반쯤 들어 아델레트를 바라보았다. 아시엘 역시 으에, 하며 잠에서 깨어났고 카이스 역시 허공에 향해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아델레트는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네놈들 방 태반이 개판일 거 아냐. 이 기회에 청소하자고."

"싫어어- 어차피 시종들이 다 하는 건데 뭐 하러 또 해?"

"별로 치울 것도 없어."

"쓰레기들 많은데? 로비에 굴러다니는 말하는 쓰레기들. 다 싸그리 내다 버리기 전에 빨리 안 일어나?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이 어디다 팔아 치울 수도 없는 폐기물들 같으니라고."

가슴에 푹푹 꽂히는 현란한 독설에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움찔 몸을 떨다, 결국 마지막 마디에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제각기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마침 수련 후 샤워실에서 나오던 제르닌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동료들과 야차상의 모양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물론 아델레트는 그들 대부분보다 키가 작았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큰 소란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깐잠깐잠깐, 각자 방 각자가 청소하는 거 아니었어? 왜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는데?"

케빈이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는 간단하게 묵살됐다. 간만에 작정한 듯 아델레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뒤를 풀 죽은 채 졸졸 따라가던 이들과 아직 잠이 덜 깨 하품을 쩍 하던 아시엘,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는 루이카엔 그리고 조금 달관한 얼굴인 제르닌과 카이스라는 행렬은 기이했다. 아델레트의 걸음이 멈춘 것은 계단을 오른 후 가장 먼저 보이는 아시엘과 슌의 방이었다.

"흠."

아델레트는 문 앞에 멈춰서 턱을 쓸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아시엘이 눈을 꿈뻑거리며 맹하게 말했다.

"저희 방은 별로 치울 것 없을 텐데요..."

"그건 내가 판단한다."

단호한 그녀의 한 마디에 아시엘은 찍 소리 없이 물러났다. 곧이어 문이 벌컥 열어 젖혀지고 기사들의 기대 어린 눈이 방 내부로 모였다. 그리고 역시나- 하는 한숨도 잠시, 아시엘의 책상을 발견한 그들의 입에서 컥 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너 저게 다-"

"......."

오스카의 신음성에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카이스의 그럴 줄 알았다는 한심함 섞인 시선은 간단히 무시했다. 아델레트는 이마를 턱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방 안은 대충 예상했던 대로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침구들은 가지런했고 여분의 옷들 역시 말끔히 개어져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슌과 아시엘의 짐 모두 모범적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되어 있어 가구들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문제는 아시엘의 책상이었다.

방에 따로 마련된 책꽂이도 그의 도서 수집벽을 이겨내지 못한듯 엄청난 수의 책들과 자료들을 가득 물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에 꽂힌 책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도서들을 토해놓고 있었다.

이 곳만큼은 정리보다 어떻게든 우겨 넣는것을 위주로 했는지 들쭉날쭉 엉망이고 간간히 따로 필기를 해 둔 것처럼 보이는 종이들도 삐죽 삐죽 솟아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시엘이 주로 연구용으로 쓰는 책상 주위에도 숱한 자료들과 책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너, 책장한테 사과해."

"하하..."

누군가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믿었던 그에게 배신당한 기분으로 아델레트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시엘."

"아, 아녜요! 평소에는 아공간 가방에 넣어 두는데... 요즘 공부할 게 좀 있어서..."

아시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했지만 아무도 듣는 이는 없었다. 그를 한쪽에 밀어 두고 선배들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저거 다 정리할 수 있냐?"

"으음..."

루이카엔이 회의적으로 묻자 아델레트 역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시엘이 불안하게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벨킨이었다.

"그냥 둬. 뒤에 있는 멍청이들은 물론이고 마법에 대해 모르는 부단장이나 단장이 손대면 아무거나 섞여버려. 나중에 저 녀석이 알아서 하게 둬."

"그게 좋겠네. 아시엘!"

갑작스러운 부름에 아시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델레트는 고통스러워하는 책장과 잔뜩 쌓인 책, 자료더미를 척 가리켰다.

"저거 정리하고 검사 받아. 그리고 웬만하면 필요 없어진 건 좀 버리고."

"네에..."

드물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아시엘이 대답했다. 아델레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다음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 잔뜩 움츠러든 것은 룸메이트를 파견 보낸 오스카였다.

"저기, 알아서 치울 테니까 안 열면 안 됩니까?"

"응. 안돼."

그리고 문은 아델레트의 손에 의해 다시 벌컥 열어 젖혀졌다. 오스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다음 순간 터져나온 것은 깊은 탄식이었다. 전형적인 어질러진 방, 그 표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침대는 아침에 자고 일어난 그대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여기 저기 벗어 던져진 겉옷과 셔츠, 심지어 속옷까지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아마 세탁하지 않은 것들 같았다. 제대로 환기가 되지 않은 방의 공기에 떠도는 것은-

"아저씨 냄새."

"이게 아저씨 냄새인가?"

"으아아아아 말하지 마!"

기사단 내 최연소자들- 카이스와 아시엘이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오스카는 비명을 질렀다.

"아직 20대라고! 아저씨 냄새 날 나이는 아니란 말이야! 나보다 단장이 더 나이 많거든!"

"시끄럽고, 저 흉물스러운 것들이나 주워서 정리해."

빽빽 소리치는 그에게 아델레트는 바닥에 널부러진 팬티와 속옷들을 가리켰다. 전투 의지가 바닥난 오스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옷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고 일동은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벨킨이 연구실 겸용으로 사용하는 개인 방이었다.

"......."

절대로 열게 하지 못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벨킨은 문 앞에 버티고 두 팔을 벌려 앞을 막아섰다. 인간형으로 다시 돌아온 그의 단호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게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아델레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어깨를 덥썩 잡아 옆으로 반쯤 집어 던져버렸다.

"우왓, 잠깐만-"

"예외는 없어."

벌컥! 아델레트는 가차 없이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난색을 표해야만 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방 안을 내다본 루이카엔이 평했다.

"너... 무슨 저주 연구라도 하냐?"

"......."

벨킨은 대꾸하지 않았다. 구석에 처박힌 커다란 책상 위에는 부글부글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천에 덮혀 안이 보이지 않는 병들은 차마 덮개를 들춰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방에 빛을 내는 것은 천장에 박힌 푸르스름한 저급 야광주들 뿐이었다. 바닥에는 아까 아시엘의 방에 널려 있던 것과 비슷한 책들과 수식이 적힌 종이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일동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난색을 표하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제르닌은 바로 옆의 선반을 확인하고 기겁하며 물러섰다. 마찬가지로 조그만 화로 위에 무언가가 끓는 중인 냄비 바깥으로 개구리의 뒷다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이걸 치우는 건... 청소라고 할 수 있나?"

"전에 웨어울프 전통 술식을 연구할 거라고 하시더니 이거였어요? 우와- 나중에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아델레트가 중얼거리는 말은 아시엘의 순수한 감탄사에 끊겨버렸다. 모두는, 심지어 카이스마저 순간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벨킨은 조금 기쁜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시엘은 신이 나 히죽 웃었다. 마법사는 특이한 사람들만 모아 둔 집단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일단 여기도 넘어 가자."

"그게 좋겠네."

부단장의 조용한 말에 제르닌이 찬성을 표했다. 꼭 다시 치울 것을 벨킨에게 약속하게 한 아델레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복도로 나왔다. 다음은 제르닌과 카이스의 방이었다. 두 사람은 별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문을 그녀에게 내어 주었다. 이 녀석들이라면 괜찮겠지. 아델레트는 희망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오오...!"

그들이 대충 예상했던 대로 멀끔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남자들 답게 짐도 그리 없는데다 둘 다 너저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탓에 방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겉옷 외에는 흠 잡을 곳도 없어 보였다. 조금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델레트를 지켜보던 루이카엔은 문득 툭 한 마디를 내뱉았다.

"너무 평범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하여간 재미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맞아."

"솔직히 좀 그렇지."

"누가 저렇게 깔끔하게 해 놓고 살아?"

남자는 질투의 생물- 순식간에 단원들이 웅성거리며 힐난을 시선을 보내기 시작하자 제르닌과 카이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맞아, 맞아, 눈치가 있으면 좀 통일감 있게 어지럽혀 두고 살지. 졸지에 뜻모를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맞으며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아델레트의 일갈이 공기를 찢었다.

"더럽게 사는 게 자랑이냐? 쪽팔린 줄 알면 그냥 입 닥치치?"

"그나저나..."

조용히 입에 잠금을 건 동료들을 무시하고 루이카엔은 슬금슬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멈춰선 것은 방 가운데에 놓인 티테이블 앞이었다. 루이카엔은 그 위에 활짝 펼쳐진 채 놓인 책을 들여다 보았다.

"으음... 빨간 책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요리 책이었어?"

"아까 나오기 전에 잠깐 선배님이랑..."

카이스가 하는 말에 제르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에 일순간 일동의 표정이 으에- 하며 일그러졌다. 딱딱한 얼굴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스튜는 이렇게 하는게 좋은 건가' '소스가 조금 더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었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기 그지 없는 모습일 테지만 무뚝뚝한 남자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 봤자- 루이카엔이 신속하게 후퇴하고 아델레트는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어째서?"

"아냐, 아냐. 문제 없어. 응. 다음 방으로 가자."

기계적으로 대꾸하며 아델레트가 성큼성큼 자리를 떠 버리자 제르닌은 진심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카이스 역시 마찬가지로 아시엘에게 설명을 원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아시엘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을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레트는 바로 그 옆의 방 앞에 멈춰 섰다.

"여긴 누구 방이야?"

"내 방인데."

손을 들고 나선 것은 케빈이었다. 그의 애완 뱀이 목에 달라붙어 혀를 낼름거렸다. 아델레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의 성격 상 상당히 개판일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 마음의 각오를 어느 정도 단단히 한 채 그녀는 문을 열었고-

콰아앙! 곧장 닫아버렸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영상에 기사들은 그 자리에 경악한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간신히 입을 연 누군가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 마의 소굴이다... 카오스야... 세계 종말인가..."

"사탄이 강림했어..."

"어라, 그렇게 심해? 꽤 깨끗하지 않아?"

문틈에서 시커먼 연기라도 스며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아시엘의 조용한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동료들이 허공을 떠도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원인 제공자- 케빈은 에헤헤, 하고 웃으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아델레트는 멍청히 문고리를 그대로 잡고 있다가 곧 화들짝 놀라며 방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뻣뻣하게 미소지으며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 얘들아. 청소는 그만두고 포커나 할까?"

"찬성!"

일동은 약속이나 한듯 손을 번쩍 들며 외치고 우르르 앞다퉈 로비로 쏟아지듯 내려가 버렸다. 아델레트와 루이카엔, 제르닌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졸지에 버려진 꼴이 되어 버린 케빈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듯 그들의 뒷통수에 대고 외쳤다.

"도대체 왜!"

"... 선배."

"응?"

작은 손이 어깨에 얹히는 느낌에 케빈은 옆을 돌아보았다. 아시엘은 아련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어 보이고는 선배들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카이스 역시 처음 보는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케빈을 잠시 바라보다 친구를 졸졸 따라갔다.

"왜?"

케빈이 허공을 향해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텅 빈 2층 복도에 울려퍼지는 메아리 뿐이었다.

결국 그는 간신히 정신을 챙긴 아델레트의 감시 하에 서식지를 개방하고 하루 종일 청소에 매달려야 했다. 아시엘과 벨킨이 케빈의 방 여기저기에 청결 마법을 퍼부었고 부단장의 무시무시한 욕설도 부가로 선사되었다는 후문 역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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