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27화 (227/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4. 새벽의 불꽃(4)

상황이 심상치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시엘은 드물게도 작은 몸에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제스퍼를 노려보았고 제스퍼는 이로서 완전히 그를 제압했다 생각하는지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이라에게 겨눈 단검을 놓지 않았다.

주변에는 어느새 객실 안에 빼곡히 숨어 있던 신도들이 그들을 빽빽히 포위하고 있었다. 케빈은 쯧 혀를 찼다. 루이카엔에게서 받은 해독제는 세 개, 이미 두 개를 썼으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터뜨려 버릴까- 케빈은 허리춤의 주머니를 만졌다. 아니, 하지만 해독제를 꺼내려는 순간 제스퍼가 세이라의 목을 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어떤 영향을 받을지 모르는 아시엘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망할 년 같으니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아서 미리 네놈을 죽여두자고 한 거였는데. 결국 네놈이 끌어들인 허섭쓰레기들 때문에 엉망이 되 버렸잖아!"

"세이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에요?"

분명 갇히기 전에 본 그녀는 멀쩡했다. 교단 내에서 유일하게 그 모순을 깨닫고 아시엘을 도와주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완전히 의지를 잃은 듯 초점도 잡히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중인지도 깨닫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시엘의 눈에서 살기가 풀풀 새어나왔다. 제스퍼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 네놈 탓이란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네가 어줍잖게 이용만 안 했어도 이 꼬맹이는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네가 얌전히 잡혀 있었으면 말이야. 이 녀석한테서 이것 저것 캐낸 모양이지? 그냥 얌전히 시중만 받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랬으면 너도, 이 꼬마도 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

"......."

"아주 신나서 설친 것 같지만 이제 너도 네 동료들도 끝이다. 망할 에쉬리아 년, 일이 조금 틀어질 것 같으니까 내빼기나 하고!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그년이 없어지면 내가 교주가 되는 거니까! 좀 똑똑하다고 으스대는 꼴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에쉬리아가 없다고? 아시엘은 당황해 외칠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제스퍼의 말이 이어졌다.

"독 때문에 마법도 쓰지 못하는 네놈은 단순히 애새끼일 뿐이다. 무슨 술수를 부려서 네 동료들을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놈들도 그저 네놈의 길동무가 될 뿐이다. 조금 강한 모양이지만 어차피 백작성으로 가겠지. 그렇게 되면 모조리 다 끝이라고. 모든 군대를 그쪽으로 집결시켰어. 설마 여기에 있는 놈들이 다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호오. 그렇단 말이죠."

아시엘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함을 느낀 제스퍼가 얼굴을 구겼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제스퍼 쪽으로 다가갔다.

"마법도 못 쓰고... 검도 빼앗겼고. 사로잡혔고. 당신 승리에요. 이제 어쩔 수가 없네."

"뭐?"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에 제스퍼가 험상궂게 되물었다. 아시엘은 항복이라는 제스쳐로 두 손일 살짝 들어보였다.

"당신 말대로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진작 그렇게 나올 것-"

"한 가지만 빼고."

아시엘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제스퍼의 얼굴에 곧장 주먹을 날렸다. 빠아악!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난데없는 공격에 제스퍼가 나동그라질 찰나 아시엘이 세이라를 낚아채 안았다. 세 사람을 에워싸고 있던 신도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이놈들! 감히 부교주님을!"

"죽여라!"

"글쎄다-"

그 순간, 케빈은 발 아래에 둔 해독제를 밟았다. 퍼어엉! 구슬이 폭발하며 주변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아시엘이 시선을 끄는 사이 몰래 꺼내 바닥에 굴려둔 것이었다. 아시엘은 재빨리 세이라와 자신의 호흡기를 망토 자락으로 가렸다.

"쿨럭! 쿨럭! 우에에에엑!"

"우웨에엑! 이게 뭐야! 쿨럭! 쿨럭!"

"잡아! 우에엑! 쿨럭!"

카이스가 비틀거리면서도 엉겨붙는 이들을 때려 눕히며 길을 열었고, 아시엘은 세이라를 안은 채 그의 뒤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에서 기어나오는 이들을 걷어 차고 두 소년을 따라잡은 케빈은 아시엘에게서 세이라를 빼앗았다.

"쪼그만 게 뭘 들고 간다고. 뛰어!"

"이-"

아시엘은 무어라 항변하려 했지만 포기하고 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바닥에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연기가 옅어지는 지점까지 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은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연기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우당탕탕! 순간적으로 앞으로 쏠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그들은 곧장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에고고... 콜록! 콜록콜록! 엄청, 콜록! 독하네, 콜록!"

"괜찮아?"

엎드린 채로 기침을 토하던 아시엘은 카이스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케빈은 세이라를 바닥에 눕히고 흔들었다.

"야, 야! 꼬맹아!"

"약에 취했을 거에요. 천천히 해독하기 전에는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힘들 거에요."

아시엘이 숨을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여기까지 오는 중 제법 연기를 마셨을 텐데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도 깜빡이지 않는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복도에 누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케빈은 쯧 혀를 차며 세이라를 놓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애한테...!"

"저 때문이겠죠. 아마 제가 잡히면서 세이라가 절 도와줬단 걸 에쉬리아가 알아차렸을 거에요. 그나저나 에쉬리가가 없다니... 그 여자를 잡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구요."

아시엘은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케빈은 쯧 혀를 차고 그의 등을 퍽 쳤다.

"으악!"

"멍청아, 그게 왜 네 탓이야? 네가 파고들지 않았으면 백작령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라고. 일단은 제스퍼부터 끌어내서-"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은데요."

카이스는 손을 들어 복도를 가리켰다. 아시엘과 케빈은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곧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쓰러진 사람들을 어떻게든 비집고 나온 제스퍼가 비틀거리며 반대쪽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얼굴로, 곧장 신발 한 짝을 벗어들고 힘껏 던졌다. 빠악, 깩! 무거운 부츠가 정확히 그의 정수리를 가격하자 제스퍼는 다시 픽 넘어졌다. 케빈이 질렸다는듯 중얼거렸다.

"... 성질머리 하고는."

"... 주워오겠습니다."

카이스는 조용히 말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뻗어 있는제스퍼와 아시엘의 신발, 그리고 잠시 버려뒀던 자신들의 검을 주으러. 복도를 가득 채운 채 뻗어 있는 이들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는 다시 출발 지점이었던 계단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아시엘의 주먹에 코뼈가 내려앉아 헤롱거리는 제스퍼, 그의 옆에서 굴러다니는 신발 하나와 검 두 자루. 카이스는 허리를 숙여 먼저 검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때- 구두를 신은 발 하나가 검의 끝을 살짝 밟았다.

"어?"

카이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발의 주인은 쿡쿡 웃으며 그를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푹, 푹. 뾰족한 굽으로 산처럼 쌓인 신도들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짓밟았다. 그는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녀'를 발견한 케빈 역시 딱딱하게 굳어버렸지만 아시엘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얇은 발목에 높은 힐의 구두. 몸매가 과감히 드러나는 드레스에 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보랏빛 흑발. 아시엘이 씨익 웃으며 툭 내뱉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어라, 절 기다렸나요?"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그녀가 답했다. 탁. 망설임 없이 아시엘의 코앞에 멈춰 선 그녀- 에쉬리아는 마치 지팡이처럼 금빛 레이피어를 바닥에 짚었다. 아시엘의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이스와 케빈은 어버버, 하며 입을 열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시엘은 웃는 낯 그대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에쉬리아는 훗,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타이밍에 내가 나타날 줄 알고 있었나 보네요."

"대충 짐작은 했죠. 제스퍼는 당신이 도망친 줄 알고 고래고래 헛소리들을 늘어놓았지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라, 왜죠?"

"그냥 감으로."

아시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공기에 케빈은 끼여들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카이스 역시 귀신이라도 보는 것 마냥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는 아시엘의 것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게다가.

"언제 들어왔지? 위에는 슌 선배가-"

"저에게 입구 같은건 필요 없어요. 마찬가지로 출구도 필요 없죠. 어디에나 갈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지."

그렇게 말하며 에쉬리아는 아시엘을 내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일순간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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