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17. 결말(1)
"야, 후작님. 네놈 부하들은 약 안 했지? 그럼 사양 않고 죽인다."
루이카엔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후작의 목에 닿은 검이 살을 살짝 찢어 놓았다. 따끔한 고통과 함께 주륵 피가 흐르자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잠깐잠깐! 잠깐만! 내가 황제의 큰 돈줄 중 하나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나를 베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할걸!"
"그딴 거 신경쓰면 여기까지 왔겠냐."
루이카엔은 비웃듯 툭 뱉았다. 점점 병사들의 포위망이 좁혀져 오고 있었다. 오스카와 아델레트, 제르닌은 주춤주춤 루이카엔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내부에서는 수색이 계속되고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들킨 거지, 제르닌은 혀를 쯧 찼다.
"이봐. 너희들은 단순히 돈으로 고용된 거 아니었나? 우리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텐데."
"고용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보수를 받지 못해. 그렇게 계약했다고."
스릉, 그들의 검이 뽑히는 차가운 쇳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갈랐다. 타닥, 타닥. 조용히 횃불이 타들어갔다. 붉은 불빛이 그들의 얼굴에 일렁였다. 루이카엔은 검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날이 후작의 목에 더욱 깊숙히 파고들었다.
"흐아아악!"
"호오. 그럼 이 녀석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셈인가. 물러나. 이대로 네놈들 돈줄의 머리통을 바닥으로 굴려버리기 전에."
"물러나면 네놈들 의뢰비는 꿈도 못 꿀줄 알아! 이 자식들을 어서 죽여버리라고!"
후작이 다시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다. 루이카엔의 얼굴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인상까지 구겨졌다. 루이카엔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느긋이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생각을 해 볼까. 형씨들, 만약에 내가 이 머저리를 놔 줘도 우리랑 싸워야 하는 건 똑같은 거지? 어차피 네놈들은 모든 걸 알면서도 황제폐하께 반기를 든 셈이니까 말이야.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놈을 바로 죽여버려도 네놈들을 썰어버려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아."
"그러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잖아?"
아델레트가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 병사들은 경계하는 것도 잊고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르닌과 오스카는 이 뒤에 펼쳐질 상황이 대충 짐작가기 시작했다. 누가 저 인간들 좀 어떻게 하라고, 브레이크를 건다던 부단장은 어디로 간 거야! 루이카엔은 히죽 웃고 후작을 앞으로 확 밀쳤다.
"어어?"
후작은 순간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아델레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집으로 그의 머리를 빠악! 내리쳤다. 깩, 짧은 비명을 지르고 후작은 그대로 기절해 고꾸라졌다. 헐. 병사들은 차마 황당하다는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루이카엔은 바닥을 구르는 후작의 몸뚱이에 발을 턱, 올려놓았다.
"저쪽은 보물찾기로 재미 보는 중인 모양일 테니까 우리도 뭔가 걸고 해야지. 네놈들 돈줄은 여기. 여기에 있어."
루이카엔은 툭툭 후작의 투실투실한 옆구리를 찼다. 병사들은 아직까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꿈뻑거렸다. 루이카엔은 씨익 사악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뒤로 악마의 꼬리가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인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닐 거라고 오스카는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장은 키득키득 웃으며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포즈로 발 밑의 후작을 가리켰다.
"내기다. 경품은 이거. 우리 손아귀에서 이 놈을 무사히 구해내면 너네는 보수를 받아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기면... 그 뒤는 알고 있겠지. 자, 덤벼."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거기에 기꺼이 응했다. 곧장 자신들의 무기를 빼들고 그들은 일제히 루이카엔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랴아아아아!"
"젠장, 또 시작이냐!"
거칠게 욕설을 토해낸 제르닌은 검을 뽑아 루이카엔의 등 뒤에 섰다. 카아앙! 그의 팔에 묵직한 무게감이 걸렸다. 루이카엔 역시 후작을 강하게 걷어차 걸리적거리지 않을 곳까지 굴려버리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이거 보수도 못 받을 텐데 어쩌나?"
"저놈들 돈 걱정보다 우리 감봉당할 일이나 걱정해요!"
결국 참다 못한 오스카가 외쳤다. 루이카엔은 대답 대신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었던 거야? 결국."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그 하나밖에 없는 신전에 슌의 목소리가 왕왕 울려퍼졌다. 홀에는 피떡이 되어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흘리거나 기절해버린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슌은 찢어진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흰 소매로 대충 닦았다.
"그러게. 그 분은 나한테 뭘 원하셨던 걸까."
스륵,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듯 에쉬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각- 그녀의 높은 굽 소리가 낭랑한 목소리와 섞여 귀에 파고들었다. 슌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실컷 영지를 들쑤셔 놓고는 포기가 너무 빠른 거 아냐?"
"됐어. 나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니까... 그것보다 넌 왜 여기에 나타난 거야? 슈나리엔."
또각. 그녀의 구둣소리가 멎었다. 사락, 에쉬리아는 킥킥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끌어당겼다. 으윽- 발 아래의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뒤척이며 신음을 흘리는 것을 곁눈질한 그녀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다 살려둔 거야? 무르네."
"상관 마시지.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아직은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의 '슌' 이니까."
잠시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에쉬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슌을 응시했다. 평소 기사단에 섞여 있을 때의 사람 좋은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가 한참동안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슌은 살짝 인상을 구기고 그제야 눈을 돌려 그녀를 마주보았다.
"뭐야."
"아니, 그냥...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너랑 같은 제복을 입은 자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갈 곳 잃은 눈동자가 피로 얼룩진 채 기절한 사람들로 뒤덮힌 바닥으로 향했다가 자신의 신도들을 내려다 보는 이그니스의 신상에 닿았다가 다시 허공을 헤맸다. 그의 주먹이 소리 없이 쥐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에쉬리아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여도 모래성 위에 쌓았으니 오래갈 일은 없지. 하지만 설마 이렇게 쳐들어 올 줄이야. 내가 안일했던 걸까. 이런 방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적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 거 아냐? 에쉬리아. 네 생각보다 훨씬 답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슌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킥킥거렸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에쉬리아는 하아, 짧게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넌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있는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단장이 가자고 하니 따라야지, 이유같은 거 없어."
"그 애 때문은 아니고?"
그녀의 은근한 목소리에 슌은 움찔했다. 그는 다시 인상을 구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시엘이라고 했던가. 살짝 떠보니까 얼굴색이 안쓰러울 정도로 변했어. 아마 우리들에 대해서도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알아냈던 거 아냐?"
"......."
"넌 알고 있었지? 어쩌면 나중에 유용하게 쓸지도 모르겠네. 그럴 생각으로 대공도 그를 지켜보기만 하는 거지?"
슌은 대꾸하지 않았다. 탁, 타닥. 그의 발이 바닥을 치며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 녀석은 제거 대상이야. 절대 우리들의 편이 되지는 않을 거다."
"제거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랑받는 막내란 느낌인데 말이야. 너도 그를 지키러 온 거 아니야? 사실은."
"쓸데없는 소리야."
그녀의 말을 슌은 간단하게 일축했다. 잠시간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쉬리아였다.
"이건 보고하지 않겠어, 슈나리엔.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분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거하든 회유하든 마음대로 해. 단지 명령을 따르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네 말대로 심지가 지나치게 곧은 모양이니까-"
에쉬리아는 천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천장의 타일 하나가 스륵 모습을 감추고 뻥 비어버린 자리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보랏빛의 구슬이 나타났다. 그녀가 손짓하자 구슬은 저절로 천장에서 떨어져 나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스륵 에쉬리아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이게 사람들의 의식을 흐리게 해 주지 않았다면 약초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웠을 거야. 실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회수되는 거네. 나머지는 그 아시엘이 다 가지고 가버렸다지? 그렇게 된 거라면 우리들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만도 해... 당장 황제에게나 단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은 훌륭하지만."
"잠깐만, 대공 전하는 이미 그 녀석이 알고 있단 사실을ㅡ"
"에스테반 공이 움직였거든."
에쉬리아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슌은 숨을 들이키고 퍼뜩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에쉬리아는 말을 이었다.
"직접 손 대지는 않을 거라고 하셔. 다만... 요즘 순진한 황자님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 같더라. 황자에게 들었다고 해. 꼬마가 황실의 기밀 도서관에 호위 명목으로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구슬도 아이가 가져갔다고 했으니 대공 전하도 감을 잡으신 거지.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슈나리엔."
에쉬리아는 손 안에서 구슬을 천천히 굴렸다. 그녀의 입가에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슌은 자신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