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0. 결말(4)
밖에서 울려퍼지는 매타작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을 들으며, 아시엘은 만족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지하실 안은 완전히 어둠으로 가득 매워져 있었지만 묵직한 공기 속에 선명하게 풍기는 화약 냄새가 그것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시엘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차 익숙해지는 시야에 박살난 상자들의 파편과 가운데에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인 가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러 부순 건가..."
폭파시키기 쉽도록. 가루들은 척 봐도 아시엘의 키의 두 배 정도는 쌓여서 그의 발치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몸을 긴장시켰다. 아직까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의 생각대로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 때, 쿵, 쿵. 나무 상자를 무언가로 찍어 내리는 소리가 아시엘의 귀에 잡혔다. 그는 검을 뽑고 천천히 안으로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빠직, 빠드득.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밟히는 나무 조각들이 소음을 냈다. 상대에게는 들리지 않을 터였지만 아시엘의 예민한 신경에는 충분히 거슬리고도 남았다. 화약 더미를 둘러 점점 앞으로 나아갈수록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창고 뒤쪽에 아직까지 가득 놓여 있는 멀쩡한 화약 상자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긴가, 아시엘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쿵, 쿵. 점차 거리가 줄어들자 불빛에 비친 흐릿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누군가가 중얼중얼거리는 목소리 역시 파열음을 비집고 들려왔다
"... 내가... 내 손으로... 하하... 파... 그녀... 맞아..."
혼잣말인가. 아시엘은 빠르게 파팟, 빠르게 이동해 상자에 등을 붙였다. 다행히 상대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기계적으로 하던 작업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시엘은 청각을 돋우려 했지만 순간 귀에서 찡, 느껴지는 통증에 가까스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역시 무리였나, 어쩐지 아까부터 잘 안 들리더라니. 속으로 툴툴거린 그는 별 수 없이 최대한 상자 틈에 귀를 붙여 집중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선명한 음성이 들려왔다.
"멍청한 백작... 다 죽을 거야. 다. 네가 도움을 청한 그 사람들도. 그녀가 옳아, 그녀는 진리거든. 이번 일을 성공하면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준다고 했어. 정말로. 날 잊지 않겠다고 했거든..."
"으으... 으..."
짙게 광기에 벤 듯한 흥얼거림에아시엘은 숨을 들이켰다. 남성의 목소리 뒤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둘 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으으... 으으...!"
"아, 벌써 시간이 된 건가. 늦으면 안 되지, 안 돼. 백작, 안타깝지만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고."
우지직, 상자가 파괴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렌턴을 든 남자가 커다란 자루 하나를 끌고 휘적휘적 상자 사이에서 나왔다. 갑작스럽게 강하게 비치는 빛에 아시엘은 황급히 상자 뒤로 몸을 숨기고 그의 동태를 살폈다. 남자는 자신의 덩치보다도 큰 자루를 낑낑거리며 끌고 화약 더미로 가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냈다. 마찬가지로 검은 화약이였다.
"아아-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에쉬리아 님, 저를 잊지 않으신다 했으니 저는 기꺼이 이 목숨 하나쯤 바치겠습니다! 태양신, 불의 신의 이름 아래에..."
그는 망설임 없이 성냥을 북, 그었다. 화르륵 작은 불꽃이 피어 올랐다. 그는 황홀경에 빠진 듯 성냥불을 바라보다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화약으로 던지려는 찰나- 빠악! 뒷통수를 가격당해 비틀거렸다.
"커억!"
"젠장!"
약했나, 아시엘은 혀를 쯧 차고 성냥을 든 그의 손을 걷어찼다. 화약의 반대편으로 날아가 바닥에 추락한 그것은 곧 힘없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미해진 정신을 되찾으려 애쓰던 남자는 곧 사납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랜턴에 확 주변에 밝아지며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시엘은 한 대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에 입을 벙긋거리다 곧 입술을 깨물었다. 낯익은 목소리에 걸맞는 익숙한 외모, 중년인의 남자. 집사 베스토였다.
"망할 애새끼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그는 뒤집힌 눈으로 아시엘을 노려보았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두 눈이 정상이 아니었다. 아시엘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 어째서에요? 설마 당신도 이그니스 교의-"
"에쉬리아 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지."
그는 이를 씩 드러내며 웃었다. 조곤조곤히 이야기하던 집사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작을 걱정하며 영지를 되찾아 달라 부탁했던 베스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듯 했다. 아시엘은 답답한 마음에 깊이 탄식을 터뜨렸다.
"결국... 이 영지에 남아있던 건 백작님 뿐이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성에 머무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게 에쉬리아 님의 명령이었지. 그저 감시하며 네놈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 히스는 진작에 탈출시켰는데... 멍청하게도 다른 영지로 도망쳐버린 모양이군. 에쉬리아 님께 돌아가라 명령했는데."
"이 성을 폭파하란 명은 언제 들었어요?"
"싸움이 시작된 순간. 에쉬리아 님은 파트너로 셰단 후작을 선택했지만 그 역시 그닥 미덥지는 못한 모양이더군. 그래서 이 자리에서 그를 폭파 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어린 아들을 후작으로 내세울 생각이신 모양이다. 그 애에게 아이를 여럿 넘겼다고 하셨거든. 필요한 건 후작의 이름이지, 후작이 아니니까."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시엘은 검자루를 꽉 쥐었다. 잠시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던 그는 간신히 입술을 똈다.
"야, 혹시 그 넘겼다는 아이들이-"
"물론 후작에게도 줬지. 하지만 그 아들내미한테 훨씬 공을 더 들이신 모양이라. 이번 싸움을 통해서 그의 가치를 시험해 보시고, 아니란 판단을 내리신 거겠지."
"그 아이들이 뭐냐고 물었어요."
아시엘이 다시 낮게 으르렁거렸다. 베스토는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치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을 쫙 벌렸다.
"물론 영지의 꼬마들이지! 이그니스 교의 충실한 부모들은 아이 한 둘쯤 바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그야,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는 거잖아? 아, 꽤 반반한 인물이었던 꼬마의 부모는 저항하긴 했지. 하지만 집에 불을 놓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잠잠해지더라고!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신의 분노에 의해서 죽어버린 거니까."
"설마... 화재로 아이가 죽었다고 부모를 속이고는 그대로 팔아 넘긴 거야?"
"그렇지. 밤 사이에 애는 미리 빼내 왔고 부모가 잠든 틈에 불을 놓은 거야. 제아무리 그래도 이그니스의 신자들이니까 그 부모는 당연히 수긍했고. 강력한 신을 받드는 교단이라도 돈은 필요한 법이니-"
그가 채 말을 잇기도 전 아시엘의 발이 그의 복부에 뻐억! 강하게 꽂혔다. 아시엘의 붉은 눈동자에 순수한 분노가 솟구쳤다. 크아악! 짧게 비명을 토해낸 그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이 쓰레기가... 너흰 사람도 아니야."
"쿨럭! 사람을 초월한, 쿨럭! 그런 존재지."
베스토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양복 속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들고 곧장 아시엘에게 돌진했다. 빠르다, 그는 급히 검을 들어 방어했다. 까아앙! 레이피어와 단도가 거칠게 충돌하며 날카로운 소음이 폭발했다. 끼긱, 끽, 이어지는 힘겨루기 속 아시엘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집사 치고는 제법이네요."
"꼬마 기사님, 나도 네 이름은 알고 있어. 아시엘 아르셰인. 마검사라고?"
키득키득 베스토가 웃음소리를 내며 기습적으로 아시엘의 가슴을 걷어찼다. 컥, 그는 검을 놓치고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가까스로 쓰러지는 것만은 면한 그는 강한 통증을 추스르고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 때는 이미 베스토의 단검이 코앞까지 날아든 상태였다.
"윽!"
아시엘은 급히 몸을 숙였다. 베스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혀를 쯧 차고는 곧장 아시엘의 다리를 걸었다. 우당탕! 어지러운 머리 때문에 차마 피하지 못한 그는 그대로 바닥에 강하게 충돌했다. 아시엘이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베스토는 곧장 그의 머리를 노리고 단검을 꽂았다. 하지만 아시엘이 재빨리 몸을 굴리는 바람에 검날은 바닥과 부딪혀 깡, 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시엘은 그가 주춤하는 동안 레이피어를 회수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하지만 베스토의 검에 의해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막히고 말았다. 카앙! 다시금 쇳소리가 튀었고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두었다.
"쥐새끼 같은 놈 같으니. 네놈 때문에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어! 적당히 뒈져! 심심하지 않게 곧 길동무들 많이 데리고 뒤따라갈 테니까."
"아직 죽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시엘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쇄도하는 레이피어를 베스토는 간단히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리고- 콰드득! 어깨에 무언가가 박히는 강한 통증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아시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날타로운 상자 조각을 뽑았다. 후두둑, 순식간에 베스토의 어깨에 새겨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네 놈...!"
"미안해요. 하지만 쓰러진 상대의 움직임도 잘 파악해 두셨어야죠."
아시엘은 빙글빙글 얄밉게 웃었다. 어느새 그의 왼손에는 피 묻은 나뭇조각이 들려 있었다. 베스토에게 당해 쓰러졌을 때 재빨리 주워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었다. 베스토는 상처를 꾹 쥐고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이 망할 애새끼가!"
"에헤이. 나중에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보시라구요. 당장에 사형일걸요? 혹시 알아요? 예쁜 말만 하면 폐하가 노망 난 노인네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쇠창살 있는 독방 하나 내어 주실지 알아요? 당신한텐 이것저것 들을 것도 많은 것 같고. 억울하게 팔려간 아이들의 소재라던가-"
가볍게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웅웅 울렸다. 베스토는 혀를 쯧 차고 눈을 굴렸다. 바닥에 놓인 작은 랜턴이 보였다. 저것만 손에 넣어서 폭약 사이로 던져버리면 곧장 그의 승리였다. 그는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한 발짝 발을 뗐지만 그 순간 아시엘이 랜턴을 발로 짓밟았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사위가 일순간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당황한 베스토가 주춤 뒤로 물러섰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당신들 패배야."
그리고 다음 순간 뒷목에 강하게 느껴진 충격에,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