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34화 (23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1. 결말(5)

"... 후아아..."

아시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땡그랑,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검이 바닥과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는 꺼림직한 얼굴로 기절한 베스토를 내려다 보았다. 설마 그마저도 에쉬리아의 추종자였을 줄은- 아시엘은 이윽고 고개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야야, 갈비뼈라도 부러졌나.."

"우웁!"

그 때, 구석에서 들려온 신음소리에 아시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씨, 어두운데. 짧게 툴툴거린 그는 더듬더듬 손으로 짚어가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상자가 쌓인 곳에 다다르자 바닥에 결박당한 채 재갈까지 물려 몸을 비틀고 있는 한 남자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아시엘은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백작님, 당신도 놀랐겠네요. 그래도 여기 끌려온 덕분에 저 밖에 있는 병사들한테 잡혀서 죽는 꼴은 면했으니까 쌤쌤으로 치고 넘겨요."

"우우우!"

후카덴 백작이 버둥거리자 아시엘은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대충 일단락 된 것 같았다.

지하실의 문을 여니, 대충 예상했던 대로 깔끔히 바깥의 상황도 종료되어 있었다. 앞발로 기절한 병사의 머리통을 툭툭 치던 벨킨은 아시엘이 꽁꽁 묶인 백작과 기절한 베스토를 질질 끌고 나오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반쯤 울고 있는 적을 발로 꾹꾹 밟던 베르칸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시엘, 그 두 사람은요?"

"한 놈은 성 폭파시키려고 했던 미친놈이고, 이쪽은 그 미친놈을 미친놈인 줄도 모르고 집사로 썼던 백작이에요."

"으으으!"

백작이 다시금 몸부림치며 신음을 흘리자 아시엘은 아차, 하며 붙잡고 있던 그의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벨킨이 성큼성큼 다가가 킁킁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으어어! 백작이 기겁하며 필사적으로 꿈틀거리자 베르칸은 이상하다는 듯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햇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걸까요."

"아니, 그냥 먼저 풀어주기만 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석에서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카이스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역시 이 괴짜 조합에 끼어있는 건 위험해.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새삼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백작쯤 되는 사람을 짐짝마냥 끌고 나온 아시엘이나 뭐가 문제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벨킨과 베르칸 덕분에 충직한 집사인 줄 알았던 베스토가 성을 폭파하려 했다, 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좋게 여겨졌다.

그들은 백작을 풀어준 뒤 그를 묶고 있던 밧줄로 베스토를 꽁꽁 묶었다. 백작은 간신히 자유를 되찾은 손목을 돌리며 숨통을 틔웠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설마 이 녀석마저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배신한 게 아니라 오래 전에 배신했었는데 백작님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죠."

아시엘이 굳이 콕 찝어주는 말에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베르칸은 후후 가볍게 웃었다. 후작의 군대보다 먼저 그를 확보했으니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일단은 기절했던 백작님의 군대는 슬슬 정신이 돌아왔을 거에요. 해독약을 썼으니까, 당장에 완전히 교단을 떨쳐내기는 어려워도 자신의 원래 임무 정도는 기억해 낼 수 있겠죠. 상황 파악이 끝나면 아마 돌아와 줄 거에요. 지금 전투에서 전력이 되어 주길 바라는 건 무리지만."

"예... 감사합니다."

후카덴 백작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성 안에 있던 전력 대부분의 수가 지하실로 내려왔다가 두 쌍둥이와 카이스에게 된통 깨진 덕분인지 더 이상의 방해꾼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약탈과 파괴행위에 엉망이 된 성을 보고 백작은 상심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분명 우리 영지는 평화로웠을 터입니다만."

"백작님 잘못은 아니잖아요.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에요!"

해맑게 말하는 아시엘을 백작은 불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름 귀족으로 태어나 곱게곱게 자라면서 생전 처음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나오는 호된 경험을 한 그로서는 처음에 마냥 지나치게 예쁜 아이로만 보던 아시엘을 더 이상 곱게만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아시엘은 뻔뻔하게 미소지었다.

"왜요?"

"아닙니다."

백작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때 머리를 휘휘 내저은 벨킨이 일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분명 늑대였던 그의 몸에서 털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희미한 빛이 나나 싶더니 곧 덩치가 작은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백작이 기겁하며 물러섰지만 벨킨은 그를 무시하고 아시엘에게 다가섰다.

"아시엘, 너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 독에 당해서요. 마력 응집이 안 되더라구요."

아시엘이 히힛, 하고 어색하게 웃자 그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바보같으니, 하며 짧게 꾸중한 그는 소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시엘의 손등에 희미하게 하얀 마법진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벨킨이 시동어를 외쳤다.

"에스테 렌 유스트라 아르센. 큐어!"

순간 답답했던 것이 느슨해지며 혈액이 제대로 도는 느낌에 아시엘이 눈을 크게 떴다. 벨킨은 그를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5서클의 치유 마법이다. 근데 이것조차도 응급 처치밖에 안 되는것 같군. 뭔가가 강하게 심장 주변에 마력이 모이는 걸 막고 있어. 일단 당장 마법은 쓸 수 있도록 했지만 큐어의 효과가 사라지면 며칠 안에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황성에 가서 치료받아."

"아..."

아시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굼뜨게나마 마력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고 있었다. 가슴의 답답함 역시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그는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와락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돌아가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됐으니까 떨어져!"

벨킨이 질색하며 그를 떼내려 했지만 아시엘은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그의 상체를 폭 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친절하네, 벨킨. 베르칸이 농담을 던지자 벨킨이 왈칵 화를 냈다. 누가! 시끌벅적 떠들면서도 그들은 잰 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큰 문을 힘주어 열었을 때, 일행은 마지막 빛을 발하는 달빛과 마주할 수 있었다.

"진짜 나이가 들었나, 좀 빡세긴 하네. 어렸을 땐 이 정도로는 끄덕 없었는데."

"내 말이."

루이카엔의 말에 제르닌이 전적으로 동의했다. 상처는 둘째치더라도 체력적인 한계가 슬슬 찾아오고 있었다. 살짝 후들거리려는 팔을 다잡은 루이카엔은 얼굴에 튄 피를 대충 슥 훔쳤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도중부터 모두 다 반쯤 정신을 놓고 날뛴 덕분에 상대편의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그 기세에 눌린 병사들이 지금은 섯불리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웬 헛소리들이야. 아직 창창한 나이잖아."

"여자의 나이랑 남자의 나이는 다르답니다, 부단장."

아델레트가 쏘아붙이자 루이카엔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인간도 아냐, 적들 중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잡아낸 케빈이 얼굴을 구겼다.

"아아앙? 말 다 했냐, 이 못생긴 놈이."

"솔직히 당신들은 인간 범주를 벗어나긴 했어."

숨을 헐떡이던 오스카가 툭 내뱉었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지만 그 역시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 진 이 괴물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게 가끔은 자랑스럽기도, 가끔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가령 지금과 같은 사건이라던가. 그는 피로 번들거리는 검자루를 꽉 다잡았다. 그 때, 그의 뒤에 있던 후작이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오스카가 놀란 소리를 내기도 전, 어디선가 날아든 부츠에 얼굴을 직격당한 후작이 다시 쭉 뻗어버렸다. 동료들의 어이없는 시선을 받으며 루이카엔이 어색하게 변명했다.

"아니,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지 않아?"

"뭐 어때!"

아델레트가 비난하자 그는 빽 고함을 쳤다. 그러는 통에 잠깐 빈틈이 생기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병사들이 으극 이를 악물고 지면을 강하게 딛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 때다! 이제 그만 뒤져!"

"지치지도 않냐."

루이카엔은 한 손으로 검을 다잡고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나머지 기사들 역시 공격에 대비해 다시 태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양 측이 충돌하기 일보 직전-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병사들의 발 바로 아래에 커다란 붉은색 마법진이 떠올랐다.

"어어?"

"이그니스 렌 데이란 아만 셀린! 파이어 스피어!"

"파이어 버스트!"

소년과 청년의 낭랑한 외침이 울려퍼지자 기사들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시엘은 히죽 미소짓고 손 끝에 생성된 불화살을 사정없이 날렸고 동시에 벨킨의 마법진에서 새빨간 불꽃이 치솟으며 공기가 폭발했다. 콰과광! 퍼벙! 콰앙!

"끄아아아악!"

"으아악! 뜨, 뜨거!"

순식간에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로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 경계선이 생겼다. 벨킨과 아시엘은 기다렸다는듯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난데없이 두 마법사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흠칫했다.  살짝 아시엘을 곁눈질한 벨킨은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빠졌다. 두 사람을 망연히 바라보던 루이카엔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넌 왜 이리 와?"

"... 옆에 있으면 안 될것 같아서."

벨킨이 조용히 대꾸했지만 그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꿈뻑거렸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킨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짧게 덧붙였다.

"저 녀석 눈이 맛이 갔어."

"아."

모두가 납득하며 짧은 탄성을 터뜨린 순간, 아시엘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몸을 살짝 긴장시키며 그를 지켜보았다. 아시엘의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후후후... 후하하하하...!"

아시엘이 고개까지 젖혀 가며 드물게도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어째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병사들 역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작은 소년 하나가 단신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섯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을 웃어젖히던 아시엘은 어느 순간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신의 레이피어를 번쩍 치켜들더니- 콰드득! 지면에 힘차게 박아 넣었다. 병사들은 움찔하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칼에 가린 소년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네놈들 불꽃놀이 좋아하지?"

"뭐?"

아시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소년은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것은 천사의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아시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귀신 소동인가 해서 왔더니 이런 대형 사고가 터졌어. 그걸로도 억울해 죽겠는데 동료들한테 버려지고 인질로 잡혀서 지하에 처박히질 않나, 마법이 봉인당하질 않나. 참 즐거운 일이다, 그치? 근데 다 같이 개고생한 덕분에 선배들도 카이도 다 저 모양 저 꼴이 나 버렸으니 성질도 못 내게 되버리고."

"......"

"그리고 선배들을 저 꼴로 만들어서 내가 화풀이도 못 하게 한 게 네놈들이다, 그렇지?"

그게 무슨 논리야! 병사들은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시엘이 저벅, 저벅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오는 통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과 존재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같은 편인 셀레니스 기사단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내가 1대 1로 싸우면 루이카엔 씨나 선배들한테 상대도 못 되는 실력이야. 근데 지금은 며칠 동안이나 마법을 못 쓴 통에 마력이 아주 넘쳐나고 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선두의 병사가 고함을 쳤다. 하고 싶은 말-? 아시엘은 그의 뒷말을 따라하다 곧 씩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네놈들 전원,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엿 먹일 정도는 충분히 된다고."

저런. 제르닌이 짤막하게 내뱉자 루이카엔이 하, 하하, 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의 화살이 자신을 피해갔다는 것을 깨달은 케빈과 오스카 그리고 카이스는 이때까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엉망진창이 된 것이 도리어 감사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아델레트가 이마를 짚었고 베르칸은 어깨를 으쓱했다. 셋, 둘, 하나. 벨킨이 조용히 카운트다운을 했다. 그리고ㅡ

"파이어 스피어, 버스트!"

콰과과광! 아시엘의 분노가 고스란히 실린 폭발음이 성을 뒤흔들었다. 일행은 귀를 틀어막고 급히 몸을 숙였다. 콰앙! 콰아앙! 백작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어 가는 정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 저 분, 말릴 수는 없습니까...?"

"지금 말리면 최소 사망입니다."

카이스의 조용한 말에 백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콰앙, 쾅! 끼아아아악! 끊이지 않는 폭음과 거기에 살짝 올려진 비명소리의 하모니는 꽤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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