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36화 (236/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3. 폭풍전야(2)

일동은 뻣뻣하게 치료사의 거처 앞에 정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안으로 들어설 엄두는 내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거 폐하 나름의 복수 아닐까."

"내 생각도 그래."

제르닌이 심각하게 입을 열자 루이카엔이 동의했다. 성에 들어서자 마자 병사 편으로 라이펜에게 귀환 보고를 한 그들은 곧 "치료사한테 먼저 다녀와" 라는 상냥한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황제의 사악함과 치료사의 성질머리를 아는 이상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킨 케빈이 아시엘의 등을 떠밀었다.

"야. 네가 먼저 가 봐."

"왜, 왜요? 싫어요!"

"원래 제일 어린 놈이 앞장서는 거야! 패기를 보여, 짜샤!"

아시엘이 격하게 저항했지만 그가 케빈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와락 등을 밀쳐버리는 선배 덕분에 아시엘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가 딱 세 걸음을 디뎠을 때ㅡ

부우웅! 기다렸다는 듯 날아든 서늘한 칼날이 그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 정원수에 탁, 박혔다. 아시엘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에서 차마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아, 아아..."

굳어버린 것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건 무언의 협박이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죽여버리겠다는 치료사로부터의 경고였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치료받으러 왔다가 시체가 될 가능성이 80%..."

카이스가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말에 오스카가 답했다. 그들은 생채기를 입는 정도로 끝난 덕분에 이 시련에서 쏙 빠져나간 아델레트와 늑대 쌍둥이들이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 나도 약만 바르고 있으면 나을 텐데..."

"나, 나도 침 발라두면 괜찮을 거야."

제르닌이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며 물러서자 루이카엔이 재빨리 편승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목을 아시엘이 덥석 잡아챘다.

"어디 가시려구요?"

"하, 하하..."

루이카엔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시엘은 악의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깜찍한 미소를 띠며 탈출 시도를 하는 단장과 참모를 끌어당겼다.

"얌전히 같이 들어가요. 저 혼자 죽을 수는 없잖아요?"

"왜 낭떠러지에 몰린 사람 같은 말을 하고 그래, 넌!"

"맞거든요! 벨킨 선배의 마법 효과가 떨어져서 영감님한테 진찰받지 않으면 전 마력 운용을 못한다고요! 선배들은 도망칠 수 있겠지만 전 아니란 말이에요!"

"착하지, 아시엘? 이거 놓고 얼른 치료받고 와. 응?"

"루이카엔 씨도 같이 가야죠. 애도 아니고 치료사를 무서워한다는 게 말이 되요?"

"보통 치료받으러 온 사람한테 단도 던지는 사람을 치료사라고 부르던가?"

아시엘과 루이카엔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제르닌은 꾸준히 은근슬쩍 손을 떼어내려 애썼지만 눈치 빠른 아시엘이 힘을 꽉 주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했다. 오스카와 카이스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고 뒤로 슬쩍 한 걸음을 뺐다. 이 틈에 사라지자. 저것들끼리 알아서 할 거야. 하지만 그들의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는 순간, 피이잉ㅡ 무언가가 발사되는 소리가.

"우아아악!"

두 사람은 질겁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푹 숙였다. 공기를 가르며 그들의 정수리 위를 지나간 것은 다름아닌 화살 두 자루였다. 도망쳐도 죽이겠단 뜻인가...! 카이스와 오스카의 얼굴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켰다. 아시엘과 루이카엔 역시 싸움을 멈추고 포기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싸울 때보다도 더한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결국 그들은 일제히 한숨을 푹 내쉬며 상처 투성이의 몸을 축 늘어뜨렸다. 결국은 숙연히 운명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유트리안은 살짝 눈을 떴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얼굴에 내리쬔 탓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곁에 대기하던 하인에게 쏘아붙였다.

"햇볕이 들잖아."

"예?"

"햇볕이 눈부시다고!"

그가 짜증스레 소리치고 나서야 하인은 아차, 하며 급히 양산을 펼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스테반이 키득 웃음소리를 냈다.

"너무 화내지 마, 황자님. 그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시끄러워. 정신을 빼놓고 사는 이 자식이 잘못한 거야."

유트리안이 차갑게 대꾸했지만 그는 기분 나쁘다는 티도 내지 않고 아름다운 얼굴에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자신의 새하얀 머리칼을 소중하게 쓸어내린 아이는 그에게 사뿐 사뿐 다가갔다.

"황자님, 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

"어디로?"

"내가 있던 곳."

소년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송이로 만든듯 현실감 없는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자 멍하니 있던 유트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있던 곳이라니, 그게 어디야!"

"알려줄 수 없어. 난 요정님이라니까."

에스테반은 키득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눈꼬리를 가득 휘며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무엇보다- 황자님이 애지중지하는 금빛의 어린 기사님이 돌아왔으니까."

"뭐? 아시엘 말이야? 난 딱히 애지중지는..."

"그래, 그 아이. 황성에 돌아왔어. 난 알 수 있어."

유트리안이 볼멘소리를 냈지만 에스테반은 듣지 않고 대꾸했다. 유트리안은 미간을 구겼다.

"뭐? 어떻게 아는 거야? 큰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는데..."

"일이 잘 끝났나 보지. 어쨌든 이걸로 내 역할은 끝이야."

"역할?"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이 소년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유트리안의 물음에 에스테반은 생긋 미소지었다.

"기사님이 무심하게 떠나버린 뒤 외로워진 왕자님을 안타까워해, 대신 곁을 지켜주는 요정. 하지만 그것도 기사님이 돌아왔으니 끝맺어야지."

"뭐?"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는 더 이상 말해줄 생각이 없는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난 이만 사라질거야. 기사님이 돌아와도 왕자님의 외로움이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무리도 아니지- 기사님이라고 해서 꼭 황자전하의 곁을 지키는게 즐거울 리는 없으니까."

"......."

"난 충고를 하는 거야. 어리광쟁이 황자님. 아시엘 아르셰인이 정말로 황자님의 사람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한 가지 시험을 해보는 건 어때?"

"시험?"

유트리안이 그의 말을 따라하자 에스테반은 히죽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내가 전에 말해줬잖아. 단 둘이 남았을 때야말로 상대방의 진심을 알아보기 제일 좋은 법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딱,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아이의 작은 몸을 감쌌다가 일순 사라졌다. 유트리안은 그가 모습을 감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치료는 잘 받고 왔냐?"

황제의 집무실. 라이펜이 놀리듯 하는 말에 루이카엔은 썩어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젠장, 이라는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러담은 그는 애써 답했다.

"예, 덕분에요. 무사귀환했는데 돌아오자마자 죽을 뻔 하긴 했습니다만."

단도가 날아들었던 것은 약과였다. 안에 들어서자 마자 쏟아졌던 욕설들은 생전 처음 듣는 레벨의 것이었다. 이 개보다도 못한 뭐들이 왜 단체로 지랄을 해서, 로 시작된 환영사는 노인의 소싯적 특기였다던 화려한 창술과 결합되어 최고의 시너지를 일으켰고 기사들의 정신을 반 이상 죽여 놓았다.

미리 준비라도 해 놓았는지 벽에 세워뒀던 장창을 들고 사정없이 휘두르는 바람에 도망치느라 진땀을 뺀 그들이었다. 와장창, 우당탕! 그들을 대신해 희생당한 노인의 몬스터 내장 컬렉션들이 바닥에 쏟아졌던 모습은 꿈에 다시 나올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네놈들이 벌여 놓은 짓거리에 비해서는 약과지, 이 빌어먹을 사고뭉치들아. 이번만큼은 나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고."

"죄송합니다."

순순히 루이카엔이 사과하자 라이펜은 끙,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그래서, 보고를 듣기 전에. 이번 행동은 네놈의 결정을 대변한다고 봐도 되겠지?"

"애초에 결정하고 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시엘은 아시엘일 뿐이니까요. 귀여운 후배들이랑 동료가 위험에 빠졌는데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루이카엔은 천연덕스레 미소지었다. 하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라이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 결정이라면 나도 이제 시험하는 짓은 관둬야겠군. 이제 자세히 보고해 봐. 얻은 것, 잃은 것, 잃어버릴 것들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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