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4. 폭풍전야(3)
선배들을 먼저 보낸 뒤, 아시엘은 치료사와 영광스러운 1대1 독대를 가질 수 있었다. 혼이 쏙 빠진 채 멍하니 한쪽 팔을 맡기고만 있던 그는 노인의 깊은 한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세요?"
"얼빠진 놈. 독에 당했다고 했냐? 마력의 흐름이 뚝뚝 끊겨 있군. 게다가..."
치료사는 맥을 짚으며 혀를 끌끌 찼다. 노인의 거친 손가락이 소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아프지 않게 매만졌다. 그 손길에 조금의 온기가 배어나오는 느낌에 아시엘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너, 마검사라고 했던가? 그럼 검기랑 마법 둘 다 사용할 줄 아는 거냐?"
"네. 일단은요."
"그럼 다른 녀석들에 비해서 마력의 흐름이 활발할 텐데. 이건 독기 때문인가... 지금 속단해서 말하긴 어렵겠군."
잠시 혼자 고민에 빠져 눈썹을 찌푸리던 그는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잠은 잘 자냐?"
"요 며칠동안 못 자긴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푹 자서 별로 피곤하진 않아요."
"그 말이 아니야. 평소에 밤잠을 설치지 않냐고. 그걸 묻는 거다. 아냐, 됐어. 말 안 해도 알겠군. 꽤 오래 됐지?"
차마 부정하지 못 할 말에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 으휴,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낮은 곳에 있는 찬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시엘은 멀뚱멀뚱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찬장의 잡동사니를 밖으로 밀어내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망할 놈들이, 좋을 나이에 툭하면 걸레짝이 되질 않나... 이번에는 스물도 못 된 애새끼가 별 지랄같은 약에 중독이라니. 하여튼 몸 아까운 줄 모르는 새파란 놈들 같으니라고."
"아...죄송해요."
우물쭈물하던 아시엘은 저도 모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치료사는 못 들은 척 하던 일을 계속하다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기 있었군. 받아라."
갑자기 휙 날아드는 것을 아시엘은 우왓, 하며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손 안에 안착한 것은 작은 꾸러미였다. 그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노인이 대꾸했다.
"환약이다. 맛은 좀 없겠지만 하루에 세 번, 아침에 눈 뜨자마자, 대충 정오쯤, 자기 전에 먹어라. 하루면 대충 마력은 돌아오겠다만 그 뒤로 5일은 빼먹지 말고 먹어야지 완전히 해독되니까 꼭꼭 처먹어."
"아, 네..."
처먹어, 라. 아시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꾸러미를 살짝 풀었다. 녹빛이 감도는 작은 환이 20개가량 들어 있었다.
"영감님-"
"치료사님이라고 불러,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아. 루이스도 무슨 정신으로 네놈 같은 걸 주웠는지. 적어도 그 놈은 머리가 좀 되는 줄 알았더니 마찬가지로 얼간이었어."
"죄송합니다, 치료사님이 직접 제조하신 건가요?"
또다시 터져 나오는 불호령에 아시엘이 잽싸게 꼬리를 내렸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만들었지 누가 했겠냐. 귀한 거니까 한 알이라도 남기면 당장에 네 모가지를 날려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그리고!"
그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아시엘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치료사는 사나운 기세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가 바로 코앞에 서슬 퍼런 얼굴을 디밀었다.
"흐익!"
"루이카엔 놈한테 전해. 네놈한테 적어도 일주일 간 일! 파견! 이딴 것들 시키면 꼬마 너도, 루이카엔 놈도 내가 직접 조져준다고. 알겠냐? 생활관에 처박혀서 잠이나 퍼 자.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그리고 내일도 와. 경과를 봐야 하니까."
"하지만- 전 별로 상처도 없고."
"시킨 대로 해!"
찌잉-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귀에 박혀들자 아시엘은 잽싸게 귀를 틀어막았다. 치료사는 가차 없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알겠냐!"
"네, 네!"
반항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바짝 쫄아든 아시엘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치료사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소년을 석방해 주었다.
간신이 진한 약초 향이 감도는 치료사의 거처에서 벗어난 아시엘은 잠시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어깨죽지가 뻣뻣했다. 그는 우두둑, 간단히 몸을 풀었다.
"갈비뼈는 놔 두면 붙는다고 하셨고, 마력도 돌아온다고 하셨으니."
이제 신경 안 써도 되겠지, 방금 그렇게 시달리고도 그렇게 무책임한 답을 내놓은 아시엘은 약 꾸러미를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그 난리통이 마치 거짓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황도는 평화로웠다. 드나드는 귀족들은 여전히 바빠 보였고 하인들과 병사들 역시 제 일에 정신이 팔려 분주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않을 평화였다. 언제 이 일상이라는 껍데기에 감싸인 폭탄을 터뜨릴지는, 온전히 황제가 정할 몫이었지만.
"하..."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꺼번에 바깥으로 뱉어냈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들어앉은 것은 쉬이 자리를 비켜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잊어버리려 애쓸수록 에쉬리아의 은근한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 짜증나네."
아시엘은 이내 고개를 세차게 털어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더 큰 골칫거리를 찾는 게 제일이지. 기분 나쁜 여자의 헛소리에 심란해하는 것 보다야 조금 귀염성이라도 있는 고집불통 황자님을 상대하는 게 백번 나을 터였다. 쓸데 없이 돌아다니지 말라는 치료사의 불호령 따위는 이미 저 멀리 어딘가에 처박히고 없었다.
"노예 매매라..."
"이게 그 자료입니다."
루이카엔이 건넨 서류 뭉치를 받은 페이튼이 곧바로 라이펜에게 전달했다. 라이펜은 자료를 대강 훑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들을 사고 판 거래 내역이 서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라면...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그렇죠. 아무래도 이 거래 내역을 빌미로 교단에서 돈을 꾸준히 받아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나, 참. 어이가 없군."
라이펜은 헛웃음을 삼켰다. 후작에 귀족, 정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들도 대다수였다. 점잖다고 이름이 퍼진 사람도 있었고 사업을 크게 부흥시켜 황성에도 돈을 대고 있는 평민 사업가와 여생을 보내겠다며 후미진 영지로 올라간 늙은 후작 역시 명단에서 빠지지 않았다.
"하긴,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게 사람이니까... 돈은 꽤 벌었겠군. 주모자는 놓쳤다고? -페이튼, 잠시만 나가줘."
"예."
정중히 고개를 숙인 페이튼은 소리 없이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루이카엔은 끙, 신음소리를 내며 편하게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네, 보기 좋게요. 케빈이랑 아시엘, 카이스가 같이 있었는데 그대로 놓쳐 버렸답니다. 그리고... 아시엘의 말로는 우두머리와 대공이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 페이튼을 내보내기 잘 했군. 계속 해."
황제의 재촉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교단의 교주는 에쉬리아라는 여자입니다. 전 그 여자를 직접 본 게 아닙니다만 케빈과 카이스의 말에 따르면 검은 연기랑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시엘도 그녀가 마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했고요."
"흠... 그래서 그 여자가 마족이란 말이야?"
"아니요. 또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루이카엔이 부정의 말을 내비치자 라이펜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그녀는 자신은 인간이라고 말했답니다. 물론 이것도 아시엘에게서의 정보에요. 아무래도 모종의 실험으로 후천적으로 마족과 비슷한 능력을 얻은 것 같다고 아시엘이 그러더군요."
"실험이라..."
라이펜은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처음 이변이 나타났던 게 제 5경비대에서의 이상 현상. 기이한 마법 작용이 일어나던 그 곳의 감옥에서 수상쩍은 구슬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대공의 귀환 파티에서 수상쩍은 남자와 어느 상인이 비슷한 구슬을 두고 거래하려는 것을 아시엘이 빼돌렸고, 그 상인은 그 뒤로 실종. 그 뒤에는 변이된 몬스터가 출현했고 토벌 후에 몬스터의 시신에서 마찬가지로 그 구슬이 나왔다. 그리고 종내에는 메르티스 가의 숲에서 대형 변종 몬스터가 나타났고, 어째서인지 정신을 놓은 그 상인- 게르만이 발견되었다.
"이쯤 되면 형님 쪽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건 지나칠 정도로 잘 알겠어. 지난번에 찾은 그 이상한 힘을 담은 구슬은..."
"그것도 실험의 결과물이겠죠. 이건 단순히 제 추측입니다만... 그 구슬에 힘을 옮겨 담는 일 따위를 했던 건 실험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과정?"
"인간의 몸에 자신들의 힘을 이식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성과. 결국 그 구슬들도 힘을 강제로 옮겨서 담아 둔 것들이니... 그냥, 정말로 제 생각을 뿐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괜찮습니다."
루이카엔이 그렇게 덧붙였지만 라이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턱으로 매끄러운 턱을 쓸었다.
"참고하지."
"어쨌든... 그 명단은 어쩌실 겁니까? 조금만 쑤셔 보면 줄줄히 낚여 올라올 텐데."
"터뜨려야지, 타이밍을 재서. 그리고 그 여자. 에쉬리아? 그 사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보고서에 올려. 당분간은 공개하지 않을 테지만."
황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개구쟁이처럼 반짝였다. 뭔가 꾸미고 있구나, 루이카엔은 직감적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라이펜은 짝,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제 가도 좋아. 너도 피곤할 텐데. 셰단 후작 건은... 아깝게 됐지만 별 수 없고. 근무지 무단이탈은 감봉 정도로 용서해 주지."
"감사합니다만... 그 정도로 끝이에요?"
루이카엔이 미심쩍게 되묻자 라이펜 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뭐야, 불만 있냐? 야, 나도 내일 대전회의에서 탈탈 털릴 생각만 하면 꿈만 같거든. 네놈들 단체로 탈주해서 이 며칠 동안도 엄청 고생했다고. 도대체 간덩이가 얼마나 부었으면 왕복 일주일 걸리는 영지로 튈 생각을 해?"
"딱히 튄 건 아닙니다만..."
루이카엔이 답지 않게 조금 수그러든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네놈들이 성문을 나갔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어디로 갈 지는 대충 짐작했으니까. 특별 파견 지원 명목으로 뒤에 승인 내려 놨으니까 별로 문제될 건 없을 거다. 너희가 월척을 물고 돌아온 덕분에 내 살도 좀 파 먹히게 생겼지만 그래도 성과도 났고. 봐 주는 건 이번 뿐 이다."
생각지도 못한 너그러운 처사에 루이카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이펜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뭐,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이라도 시켜 줘? 그러면 속이 시원하겠냐?"
"아뇨, 그건 아니지만. 뭐 잘못 드시기라도..."
"죽을래?"
"죄송합니다."
루이카엔은 빠르게 항복했다. 쳇, 못마땅하게 혀를 찬 라이펜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어쨌든 그렇게 됐으니까 다른 녀석들한테도 전해. 이번 파견은 특히 길었으니까 휴식은 3일이면 되겠지? 부상 심한 녀석은 쉬게 하고. 그건 그렇고, 아시엘은?"
"슬슬 치료가 끝났겠네요. 왜, 부르시게요?"
"아니. 별로."
트러블을 몰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폭풍이 그 소년을 쓸어 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인지. 그렇게 매번 대형 사건에만 휘말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라이펜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일이라도 유트에게 가 보라고 전해 줘. 그 녀석 요즘 심통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니까."
"심통이요?"
"어어. 아시엘이 파견 간 뒤로 날카로워져서 호위병들이랑 하녀들이 울상이야. 종종 혼잣말도 한다던데 아마 큰 문제는 아닐 테지만."
루이카엔은 네에,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황자에게 혼잣말하는 버릇이 있었던가- 잠깐 고민했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