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1화 (241/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28. 새로운 불씨(3)

여관에서 나온 아시엘은 이내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에 의아해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한가할 일 없는 시내였지만 거리는 평소보다도 다소 시끄럽게 북적이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꼽아 보았다.

"곧 야시장인가..."

입단한 뒤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존재마저 잊고 있었다. 잠시 그 특유의 공기와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사람들, 반짝이는 불빛을 떠올리던 아시엘은 이내 히죽 웃었다. 이번에도 구경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황자님에게 돌아가야지. 그리고 할 일을 하는 거야. 그는 조금 더 가벼워진 발걸음을 사뿐 사뿐 옮기기 시작했다.

"아..."

다시 제복으로 갈아 입고 황자궁에 갈 채비를 끝낸 뒤, 아시엘은 생각지도 못한 적에게 막혀 버렸다. 막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앞에 카이스가 떡 버티고 선 것이었다. 아시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카이. 왜 그래?"

"어디가?"

평소처럼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하지만 강력한 고집이 담긴 눈빛으로 카이스가 그를 압박했다. 아시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어디라니... 황자님한테  가 보려고...."

"약은 먹었어?"

"아. 헤헤헤."

그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자 카이스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아시엘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깜빡했어! 지금 먹을게!"

"깜빡할 걸 깜빡하라고. 약도 안 먹었으면서 그냥 가려고 했어? 그리고 손은 또 왜 그래?"

망했다. 아시엘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넘어가기는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았다. 카이스는 드물게도 화난 얼굴을 하고 그에게 성큼 한 걸음 다가섰다.

"어제까지는 없었잖아. 왜 그러냐고."

"어어- 그러니까..."

"선배한테 들었어, 바보야. 설마 숨길 생각이었어?"

그럼 도대체 왜 물어본 거야! 그런 말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담은 그는 애써 미소 지으며 그를 살살 달래려 했다.

"그런거 아냐. 그냥 별 것도 아니고..."

"그게 별 게 아니라고?"

"으아아, 잘못했어!"

하지만 역효과가 났는지 오히려 카이스가 와락 신경질을 냈다. 덕분에 아시엘은 질겁하며 잽싸게 사과를 건넸다. 먼발치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케빈이 애완뱀 앤을 쓰다듬으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잘한다, 카이스! 그대로 혼 좀 더 내라고."

"웃지만 말고 도와 달라구요."

아시엘이 울상을 지었지만 다음 순간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온 카이스 덕분에 화들짝 돌라 다시금 뒤로 물러서야 했다. 카이스는 한껏 험악해진 얼굴을 그의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같이 가."

"뭐, 뭐?"

순간 그는 친구의 말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해 멍청히 되물었다. 카이스는 아시엘의 어깨를 꽉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댈 기세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같! 이! 가!"

"아..."

반박이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시엘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가 봤자 할 일이라곤 말다툼밖에 없지만 뭐 상관 없겠지- 하지만 한없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아마 기분 탓이 아닐듯 했다.

똑똑. 집무실에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류 앞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던 루이카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 와."

"실례하지."

달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제르닌이었다. 조각 같은 그의 근엄한 얼굴에 반창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을 본 루이카엔은 저도 모르게 푸큽,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르닌은 언짢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 불만 있냐?"

"아니, 큭. 꼭 시치미 떼는 장난꾸러기 같아서. 무슨 일이야?"

단장의 달갑잖은 묘사에 그의 눈썹이 한번 더 꿈틀했지만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 문을 닫았다. 루이카엔은 턱을 괴며 빙글거렸다.

"뭐야, 상대하기도 싫다는 거야? 그러면 내가 좀 섭섭한데."

"알면 좀 닥쳐. 답지도 않게 집무실에 얌전히 처박혀 있다길래 와 봤더니."

제르닌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손님용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꾸르륵, 횃대에 앉아 있던 독수리 에니르가 푸드덕 날갯짓해 제 주인의 어깨에 내려 앉았다. 루이카엔은 어질러진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왜, 차라도 줘? 아니면 따로 할 말이라도?"

"갑자기 웬 손님 대접이야."

살며시 미간을 구긴 제르닌은 이내 맞은편의 소파에 다가와 앉는 루이카엔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루이카엔은 의아해졌다. 그가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빨리 제르닌이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찾고 있어?"

"...아아."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따로 듣지 않아도 루이카엔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색은 하고 있지만 흔적도 안 남기고 사라져 버렸어. 그리고 지금은 팔려간 아이들을 추적하는 데 주력하고 있고... 덕분에 나도 골치 아파서 미칠 것 같다. 인신매매 외에도 교단과 돈을 주고받은 귀족들도 꽤 있는 것 같으니까."

"그 사람들은 다 숙청하는 건가?"

"설마. 네놈들 돈 받아 먹은 거 다 아니까 순순히 뱉어 내고 우리 편에 붙어라, 하면서 어르는 거지. 아무리 막나가는 폐하라도 그 많은 귀족들을 밀어내면 위태로워질 테니 나름 수 쓰고 있는 거야. 얼마나 먹혀들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이카엔의 입술에 쓰디 쓴 웃음이 걸렸다. 제르닌 역시 얼굴을 살짝 굳혔다.

"황권이 확실히 많이 약해졌어. 이전보다도 더욱."

"그래. 둔한 네가 느낄 정도라면 심각한 거겠지."

히죽 웃으며 루이카엔이 농담조로 툭 내뱉자 제르닌의 곱지 못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알았어, 알았어. 그는 양 손을 살짝 드는 것으로 간단히 항복 표시를 하고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 역시 표면적으로는 거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 덕분에 목소리가 커지는 건 같잖은 귀족들 뿐이라고. 하지만 이번 일이 앞으로 흐름이 어떻게 될지... 그건 그야말로 신만이 알겠지."

"신 같은 건 믿지도 않으면서."

드물게도 제르닌이 툴툴거리자 루이카엔은 눈을 조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꾸르륵, 에니르가 애교스럽게 그의 뺨에 부리를 부벼 왔다. 그는 손을 뻗어 독수리의 목을 살살 긁어 주었다.

"어쨌든- 지금 이래저래 상황이 불안정해. 너도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어어... 그런데 루이카엔.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루이카엔이 다시 그에게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제르닌은 이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시엘이 찾아낸 구슬이랑 몬스터들에게서 나온 구슬들. 얼마 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직도 조사 중인가?"

"...어?"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루이카엔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거 마탑의 캐롤 교수에게 맡겼는데. 아직 그 교수에게 있어?"

"그렇, 그렇지 뭐."

어색하게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감이 좋은 거야, 루이카엔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제르닌이 다시 운을 뗐다.

"루이카엔."

"어?"

"말 할 수 없는 거냐, 말 할 게 없는 거냐."

정곡을 제대로 찌르는 한 마디였다. 루이카엔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내 다시 입술을 앙다물었다. 뿌리치기 힘든 제르닌의 푸른 눈이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경비대에서 그게 설치됐다고 추측되는 시기 직전에 루아 이클립스가 전 부대장과 접촉했다고 했지. 역시 그건 대공과 관계 있는 건가?"

이 녀석이라면 아시엘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떠올렸지만 이내 루이카엔은 픽 힘 빠진 웃음을 내보냈다.

"그건 아직 몰라. 그리고 말 할 게 없는 거야. 내가 너희한테 뭘 숨기겠어?"

"... 그래."

잠시 뜸을 들이던 제르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은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두 사람 다 먼저 선뜻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게 싫었는지 에니르가 꾸룩, 하고 울었다. 짧은 정적의 끝, 곧 제르닌은 몸을 일으켰다.

"그 구슬을 맡길 때 내가 아시엘이랑 같이 갔던 건 기억하지?"

"어어."

"할 말이 생기면, 꼭 해라."

마치 굳은 약속이라도 건네는 듯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그는 곧장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철컥- 다시 무거운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되자 루이카엔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믿는다, 는 말인가..."

직접 알아볼 수 있지만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우직한 한 마디. 루이카엔은 하,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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