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4화 (244/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1. 붉은색의 안개(3)

"잘잘못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라이펜은 언제나와 같은 느긋함으로 몸을 황자에 푹 기댔다. 말을 꺼낸 하노빌 백작은 그 뱀과도 같은 눈동자를 데룩 굴리며 주변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수사 중에 발생했던 문제들. 하나 둘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누구의?"

분명 알고 있으면서도 라이펜은 그렇게 되물었다. 루이카엔은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더 이상 나설 생각은 없는 듯 하노빌 백작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거야 저기 계신 기사님들의 보고를 자세히 들어 보면 판명이 날 터입니다. 단지 이번 건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좀 더 확실히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을 올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케시비언 경, 보고를 부탁하네."

대기하고 있던 케빈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앞으로 나서자 좌중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집중되었다. 젠장, 이딴 건 안 맞는다고.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루이카엔은 원망스럽게 쏘아본 뒤 입을 열었다.

"이번 후카덴 백작령의 사건은 한 사이비 종교 단체가 약물을 사용해 주민들을 세뇌, 영지를 장악했던 대형 사기 사건이었습니다. 부하들마저 교단에게 잡아 먹힌 후카덴 백작은 셀레니스 기사단에게 유령 출몰 사건을 빌미로 지원을 요청했고 저, 케시비언을 중심으로 꾸려진 팀이 파견되었습니다."

"처음에 파견에 나섰던 인원은 누가 있었는지 여쭤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하노빌 백작의 곁에 서 있던 콘로드 자작이 입을 열었다. 쯧, 케빈은 일순 꺼림칙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다소 날카롭게 대꾸했다.

"저와 오스카 경, 카이스 루 메르티스 경, 그리고 아시엘 아르셰인 경입니다. 이 정도는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콘로드 자작."

"그런 큰 사태에 고작 네 명의 기사만이 파견되었단 말씀이십니까?"

무슨 개뼈다귀같은 소리야. 대공파의 다른 귀족 하나의 질문에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 한 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처음에 백작이 보내 왔던 것은 단순히 영지 내에 출몰하는 유령 출몰 소동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라고 할 것 없이. 당연히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것 아니오?"

"물론 그렇지만, 유슬란 후작. 저희들은 인력이 남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해 보이는 사건에는 일단 3명, 4명을 투입해 상황을 보고 그 뒤 지원을 요청하는 방식이지요."

처음부터 마음껏 분풀이라도 하려는 심산인지 귀족들은 쉴 틈 없이 그를 물어뜯고 있었다. 루이카엔은 쯧 혀를 찼다. 거기다 심지어 몇몇 황제파 일원조차 케빈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교단과 셰단 후작을 통해 뒤로 부를 축적해 오던 이들일 터. 결국 보다 못한 파슬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케시비언 경, 처음에 백작령에 도착했을 때의 구체적인 상황은 어땠나?"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영지처럼 보였습니다만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영지민들과 심지어는 백작 부인마저 교단의 마수에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후카덴 백작이 곁에 두고 유일하게 신임하던 집사마저 사실은 이그니스 교단의 일원이었습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어째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후카덴 백작령은 황도와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셰단 후작의 영지가 인접해 있을 뿐 상당히 고립된 지역에 있습니다. 영지는 삽시간에 그들에게 점령되었고- 백작 역시 도움을 청할 곳을 찾지 못했을 겁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던진 힐난식의 질문에 낯익은 얼굴의 귀족이 쏘아붙였다. 일전 파티에서 여장한 아시엘에게 치근거리던 초보 마법사, 웨슬린 백작이었다. 나름 유능하고 청렴한 청년이라고 하더니. 루이카엔은 헛웃음을 흘리고 다시 시작된 공방을 눈여겨 보았다.

둘의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 재빨리 케빈이 끼어들었다.

"인질로 잡혔던 아시엘 경이 안쪽에서 정보를 빼돌리고, 바깥의 오스카 경과 카이스 루 메르티스 경, 그리고 제가 따로 움직여 신도들의 교단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셰단 후작이 주도하는 영지전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알아낸 뒤 급하게 본성으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주모자 제스퍼와 셰단 후작은 긴밀히 금전적인 관계를 맻고 함께 군사를 일으켰고, 후카덴 백작을 살해하려 했지만 마침 도착한 지원으로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교주였던 에쉬리아는 도주해 지금 수배 중에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사전에 살짝 각색된 이야기였다. 에쉬리아의 존재를 드러내되 최대한 권한이 적었던 것처럼 꾸며 그녀를 놓쳤다는 일 때문에 벌어질 귀찮은 일들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케빈과 오스카, 그리고 카이스에게 둘러댔지만 사실 그녀의 존재를 덮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고, 그것을 모두 아는 사람은 루이카엔과 라이펜, 아시엘 뿐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의 흔적은 찾았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의 물음에 그렇게 답하면서도 케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찾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는 회의적이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눈 앞에서 봐 버렸으니. 그게 도대체 뭐냐고 마법사인 아시엘에게 물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아니 그 전에 그 여자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 아시엘에게 줄줄 늘어놨던 말들. 그것의 의미는 도대체...

"케시비언 경."

"아, 예."

잠시 딴 생각을 하던 그는 또 다른 중년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른 이를 확인하고는 다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대공 측에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실세 귀족 중의 한 사람, 윈프라운 후작이었다.

"기사들 중 한 사람이 인질로 잡혔었다고."

".... 예."

불안한 감이 물씬 끼쳐 오는 것을 그는 가까스로 눌러 담았다. 윈프라운 후작은 짧게 깎은 수염을 매만지며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기사 때문에 여러분의 활동에 다소 문제가 생겼던 것은 아닌가?"

"...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내부에서 정보를 빼돌려 주지 않았다면 분명 영지전이 있을 거란 사실조차 몰랐을 테고."

"하지만 도착하는 즉시 원군을 요청했다면 늦지 않았을 거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하다못해 지원 요청이 좀 더 빨랐더라면 셀레니스 기사단의 단장을 포함한 5명이 황성을 무단 이탈했다고 오해받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터."

"처음에는 교단에게 눈에 띄지 않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후작은 그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그렇다면 상황을 깨달은 즉시 백작만을 보호하고, 황성에 보고해 영지민들 모두를 진압했다면 되었을 문제다. 고작 9명의 기사에게 무너질 교단이었다면 손쉽게 부술 수 있었을 텐데."

"후작님. 그들은 민간인이었습니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 케빈은 다소 격하게 대꾸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루이카엔이 끼어들려 했지만 라이펜이 그를 막았다. 윈프라운 후작의 말에 힘입에 가만히 상황만을 지켜보던 다른 귀족들이 하나 둘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제국에 반하는 조직에 속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민간인이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단지 반란자일 뿐입니다!"

"케시비언 경. 자네는 단순히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침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기사가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그의 목숨을 걱정하여 지원 요청을 망설인 것인가."

윈프라운 후작이 쐐기를 박자, 케빈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편을 들어줄 황제파의 귀족들은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부분 그의 권력이 두렵거나, 아니면 이번 이그니스 교단이 붕괴된 일로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위험한데. 루이카엔이 신음을 흘렸다. 윈스턴 백작이 반박에 나섰다.

"후카덴 백작의 영지민들은 세뇌당한 상태로, 자신의 의지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무턱대고 진압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인륜적으로요!"

"내 생각도 같네, 후작. 피해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네."

파슬렌 공작도 끼어들었지만 후작은 물러 설 생각이 없는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 난 사상자는 최근 들어 가장 최고로 꼽힙니다. 셰단 후작의 병사들과 용병들, 그들 역시 세뇌당하지 않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건 단순한 억측이네. 그들은 돈으로 고용된 자들이었어."

"하지만 인질로 잡혔던 기사 때문에 일의 해결이 늦어지고 쓸데없는 피해가 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윈프라운 후작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대전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루이카엔은 어이가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단 쪽에서 주는 단물을 마음껏 빨아먹던 자들이 어째서 빨리 없애지 못했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윈프라운 후작도,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다 셀레니스 기사단이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그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가 성공적으로 침투하지 못했더라면 셰단 후작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교단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어디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는지도요."

"루이카엔 드 카시마엘 경. 그렇다면 신입 기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케시비언 경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로군. 그 파견팀을 이끄는 리더는 케시비언 경이었을 터. 부하의 관리 역시 그의 책임이지 않나."

이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루이카엔은 분노를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으며 그에게 반박했다.

"부하가 아닙니다. 셀레니스 기사단은 단장인 저, 부단장인 아델레트 드 리비안 경의 판단으로 팀을 이루게 되고 그 팀에는 기본적으로 상하 관계가 없습니다. 따로 명령을 내리고 누군가가 대신 책임을 진다는 일 따위 있을 수 없단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지. 그렇게 말한다면 적들에게 부주의하게 붙잡힌 아시엘 아르셰인 경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되네.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는 으득 이를 갈아붙였다. 저 능구렁이 새끼, 어떻게든 아시엘이나 케빈 둘 중 하나를 물고 늘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하노빌 백작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수사 중에 발생했던 문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지요. 뒤를 위해서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흐음. 그렇단 말이지?"

라이펜은 나태하게 턱을 괴고 대전을 쭉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반짝였다가 곧 사라졌다. 그는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케빈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루이카엔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모인 귀족들 역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케빈은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황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 불찰로 후배가 곤란에 빠지고 수사에도 차질이 생겼으니, 그 책임은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이건-"

"됐어, 루이카엔."

루이카엔이 급하게 나섰지만 케빈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윈프라운 후작을 노려보았다.

"차라리 내가 뒤집어 쓰는 게 낫지."

"......."

윈프라운 후작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마주보았다. 라이펜은 킥 웃으며 고개를 까닥했다.

"하지만 큰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니 큰 처벌은 무리입니다. 그건 모두 다 잘 아시겠죠. 그러니 6개월의 감봉과 3개월의 근신. 하지만 그는 따로이 집도 돌아갈 곳도 없으니- 생활관 내에서 대기하는 걸로. 불만 있습니까?"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자는 없었다. 황제가 직접 이렇게 말 한 이상 웨스턴 백작도 파슬렌 공작도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루이카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펜은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케빈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케시비언 경. 들은 대로 이 대전회의가 끝난 뒤 3개월의 근신, 복귀 후에도 6개월간은 무상으로 임무에 임할 것."

"...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케빈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보던 루이카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펜은 웃고 있었다. 분명 이 모든 것을 예상했던 것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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