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245화 (245/289)

황립 셀레니스 기사단 - #232. 붉은 색의 안개(4)

큰일 났다. 아시엘은 혀를 깨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아연실색해 분노한 황자를 올려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책을 덮었다.

"전하...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차가운 목소리로 유트리안이 그의 말을 딱 잘라버렸다. 황금색 두 눈에서 여과되지 못한 여러 감정들이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당황스럽게도 아시엘이었다.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아시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황자님이 생각하는 그런 게-"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유트리안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안돼. 이대로 가면 위험해- 아시엘은 직감했다.

"황자님."

"너도 결국은 뭔가 목적이 있었던 거군. 온전히 날 위한 게 아니었어. 아바마마도 너도. 호위? 검을 가르쳐? 웃기지 말라고 그래. 내가 모를 것 같아? 너도 결국 아무 권한도 가지지 못하고 애물단지 취급만 받는 내가 만만했던 거잖아."

"황자님."

"이용하려고 그랬던 거지? 하! 그럴 줄 알았어. 다른 사람은 믿는 게 아니란 걸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나도 아직 멀었나 보군. 너 따위를 믿었으니까."

"황자님!"

결국 아시엘도 버티지 못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의 기세에 유트리안이 움찟 입을 다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서고, 그 중에서도 굳게 잠겨 있던 숨겨진 방. 두 소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말 해.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절대로 말 못해요."

유트리안이 사납게 캐물었지만 아시엘 역시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그 지나칠 정도로 올곧은 붉은색의 커다란 눈동자 때문에 황자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왜? 왜 나한테 말 안 한다는 건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너.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 이렇게 말 하면 속이 그렇게 시원하겠어요?"

"그럼 아니야?"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그 덕분에 아시엘은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유트리안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실 전용 도서관은 금서만 모아 둔 곳이야. 이런 곳에 몰래 숨어 들어와서 책들을 뒤진다니, 뭔가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잖아!"

"저는 폐하께 열람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정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정이란 게 뭔데? 그걸 말 해. 난 황자야. 넌 내 호위 기사고. 숨길 이유가 뭐가 있어? 뭔가 켕기는 게 있지 않고서야."

아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황자의 두 눈동자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 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전하가 화 내시는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때때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머리 좀 식혀 보세요. 폐하께서 절 황자님 곁에 붙여 두는 조건으로 이곳의 통행증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절대로 전 전하를 이용할 생각으로 접근한 게 아니에요."

"... 그건 보면 알겠지."

그렇게 짧게 답한 유트리안은 아시엘이 말릴 새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무심히 두꺼운 책장 하나를 넘기려 했다. 그 때, 소년의 비명과도 같은 다급한 일갈이 폭발했다.

"보면 안 돼!"

".....!"

툭, 굳어 버린 유트리안의 손에서 책이 떨어졌다. 그는 뻣뻣해진 목을 간신히 돌려 아시엘을 바라보았다. 만난 뒤로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황자를 노려보며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책에 손 끝 하나 대지 마세요."

"어째서...?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왜 화를 내는 건데?"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유트리안은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시엘은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허리를 숙여 방금 그가 펼쳐 들려 했던 책을 주워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그런 그의 하얀 손 끝이 조금 떨려 나오고 있다는 것을, 유트리안이 알아 차렸을 리 없었다. 마치 무시당하는 기분에 황자는 다시 화가 치밀어 윽박질렀다.

"왜냐고 묻고 있잖아!"

"묻지 마! 묻지 말아요! 나도 지긋지긋하니까."

아시엘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고개를 숙인 채라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하얀 제복에 감싸인 작은 몸에서는 어떻게든 분노를 절제하려는 듯한 가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유트리안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순간 머리에 올랐던 열이 가라앉으며 지금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과해야 해. 하지만 순간- 그의 금색 눈동자에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너, 나가."

그리고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쑥스러운 사과의 말이 아니라 차디 찬 한 마디였다.

"뭐라고요?"

아시엘이 기가 막혀 황당히 되물었다. 하지만 유트리안은 아예 못이라도 박듯, 그에게 성큼 다가서 윽박질렀다.

"나가라고. 여기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마. 도서관에 드나들건 뭘 하건 상관 없는데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진 절대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지긋지긋 하다면서?"

"전하..."

아시엘은 잠시 황망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이 가져왔던 펜과 종이들을 주워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잠시 굳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유트리안은 하얀 제복 옷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자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입을 손으로 세게 틀어 막았다. 도대체 난 뭘.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서 혼란스러움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분명 사과하려고 했었는데. 텅 빈 서고, 유트리안은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하하하하!"

갑자기 에스테반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소파에 드러누워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아울이 응? 하며 상체를 들었다.

"왜 그래? 에스테반."

"아니, 일이 좀 재밌게 된 것 같아서. 하하하!"

그는 눈물까지 훔치며 깔깔 웃어댔다. 그런 그에게 이상하다는 시선을 던진 아울은 다시 게으르게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기다란 그의 검은 머리칼이 한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뭘 꾸미는 건진 모르겠지만 뭔가 잘 되어 가나 보네. 축하해."

"아아, 아울. 레이란 소년은 녹스가 감독하고 있어?"

에스테반은 그 요정처럼 작고 예쁜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가득 담아냈다. 으음- 손가락 끝에 앉은 까마귀의 깃을 살짝 살짝 쓰다듬으며 아울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럴 걸. 그쪽도 꽤 성공적인 모양이야. 아아- 일이 잘 안 풀리는 건 나 뿐이란 건가."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마, 아울. 내가 곧 방해꾼을 치워 줄 테니까. 그리고 네 작품들은 하나같이 성공했잖아."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순백의 소년은 가느다란 손을 뻗어 아울의 머리칼을 위로하듯 매만졌다. 주인의 손길을 받는 검은 고양이처럼 그는 눈을 살풋 감았다.

"아아.. 그래도 너무 하면 슈베이만이 화낼 거야."

"걱정 마. 지금 딱 타이밍이 좋은 때니까."

에스테반은 키득 웃음소리를 냈다. 은으로 만든 종이 딸랑, 하고 울리는 듯한 고운 목소리가 넓은 방에 채워졌다.

"그럼 이쪽의 일은 마무리 지어진 것 같으니 내 차례로군."

라이펜이 짝짝, 두 손을 맞부딪히며 쾌활하게 주의를 돌렸다. 귀족들의 의아한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자 그는 품을 뒤져 얇은 서류 뭉치 하나를 꺼내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모두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소?"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족들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을 쭉 둘러본 황제는 히죽 미소를 그리며 서류 한 장을 팔락 넘기고 크게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아벨리오 남작, 루카스 백작. 체르웰 백작, 퓨리언 후작. 그리고- 하노빌 백작."

마지막으로 호명된 하노빌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펜은 다시 서류를 덮고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상이 이 명단의 제일 위에 적힌 5명. 이제 이게 뭔지 알겠나? 자네들이 방금까지 반역도들이라며 물어 뜯었던 이그니스 교단에서 나온 금전 거래의 장부다. 익숙한 이름들을 이런 곳에서 보니 매우 반갑군."

"... 폐하."

이제 하노빌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불린 다른 귀족들 역시 창백하게 질려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라이펜은 키들키들 짓궂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라, 표정들이 왜들 그러지? 방금 수사의 진척에 방해가 되었다며 케시비언 경을 징계하자고 주장한 여러분이니, 마찬가지로 그 사이비 교단에 대한 수사를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협조해 줄 것을 굳게 믿고 있소. 그런 의미로 미리 오전에 병사들에게 일러 두었지. 다소 결례가 될 테지만 여러분의 저택과 성을 샅샅이 뒤지라고."

"......"

"한 치의 실수도 넘기지 못하는 완벽한 여러분이니, 그 정도의 일은 당연히 허락하겠지요? 켕기는 것이 없다면."

찬물을 끼얹은 듯 귀족들 측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국 그런 속셈이었나. 루이카엔은 꿈틀거리는 얼굴 근육을 주체하지 못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표정들을 보아 하니 설마 장부까지 넘어갔다고 예상한 사람은 전혀 없는 듯 하고- 아마 교단 측에서 장부 같은 건 남기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이라도 한 모양일 터였다- 결국 그들은 이그니스 교단에 대한 수사를 빌미로 케빈을 공격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수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라이펜은 그것을 의도하고, 순순히 그들을 말을 따르며 케빈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 터였다. 자신의 것을 내주고 많은 것을 뒤흔들어 놓는다. 라이펜 다운 행동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더러운 세상이었다. 그는 슬쩍 곁의 케빈을 곁눈질했다. 그 역시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귀족 측에서 다급한 외침이 튀어 나왔다.

"폐, 폐하!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응, 그래. 결백하니까 조사 받으면 되잖아."

라이펜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병사들을 보냈다는 그의 말은 아마 거짓이 아닐 터. 황제 파 대공 파 누구랄 것 없이 귀족들은 썩어 들어가는 낯빛을 차마 숨기지도 못했다.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스란히 조사받기는 뒤가 지저분했다. 그 때, 윈프라운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결백한 자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면 될 터. 문제될 것은 없지요."

"후작님!"

"역시 윈프라운 후작. 그대의 지혜에는 언제나 탄복하게 되는군."

중간에 누군가가 기겁해 외쳤지만 라이펜은 묵살하고 말았다. 이건 완벽한 라이펜의 승리였다. 아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겠지만 여차하면 에쉬리아와 대공의 관계성에 대해 밝힐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조사 과정에서 나왔다며 코앞에 증거를 들이밀면 슈베이만까지 엮어 들어갈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진짜 징글맞도록 치밀한 자였다, 라이펜은. 설마 이 타이밍에 명단을 공개할 줄이야. 그것도 모두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차례 차례. 누가 먼저 지목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귀족들은 저마다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물밑 작업에 들어갈 터였다. 그 중엔 결국 황제 쪽으로 돌아서는 자들 역시 생길 테고 반대로 어지간이 간이 크지 않은 이상 황제를 배신하겠다며 나설 이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루이카엔은 가슴 속에 내려앉은 묵직한 것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단장으로서 기사 하나를 지켜내는 것조차도.

그런 그의 속을 모르지 않는 라이펜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미안. 하지만 사과는 하지 않을 거야. 많은 것이 잘못되었고 어긋나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반박하지 못 할 진실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케빈을 먼저 보낸 루이카엔은 황성 이곳 저곳을 떠돌다 밤늦게야 생활관으로 들어섰다. 복잡한 심경을 가누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촛불 하나만 켜진 로비 소파에 혼자 동그라니 앉아 있는 아시엘이었다.

"아시엘?"

"아... 루이카엔 씨."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아시엘은 그의 존재를 알아 차리고는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마찬가지로 막 귀가한 건지 여전히 불편한 제복 차림이었다. 루이카엔은 터덜터덜 힘 없는 걸음을 옮겨 소년의 곁에 털썩 자리 잡았다.

"왜 이러고 있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네에. 그럴 일이 좀. 루이카엔 씨는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가 느릿느릿 다시 물어 오자 루이카엔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어, 그럴 일이 좀."

"그래요..."

아시엘은 히, 하고 작게 웃음 소리를 내고는 무릎에 얼굴을 반쯤 묻어버렸다. 루이카엔 역시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갑갑하네. 되는 일이 없어."

"그러게요..."

또다시 아시엘이 멍하니 맞장구를 쳤다. 루이카엔은 슬쩍 팔을 들어 소년의 머리 위에 올리고 살살 쓰다듬었다. 아시엘 역시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 이내 줄 끊어진 인형처럼 툭, 루이카엔의 어깨에 몸을 기대버렸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듯 허탈히 중얼거렸다.

"왜 이 모양인 걸까요."

"그러게..."

보들보들한 머리칼의 감촉을 손 끝으로 느끼며 루이카엔이 멍하니 대꾸했다. 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정말 왜 이모양인 걸까. 되는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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